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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머의 신작 59

절망 절망/강영은  솔직히 말한다. 나는 네가 먼 별로 떠난 것을 믿지 못한다. 지구가 푸른 유리구슬 같다고 우주선을 탔던 사람들이 돌아와 말했을 때​너와 나는 지구에 불시착한 바이러스라고, 그러니, 떠난다는 말은 하지 말자고, 바이러스 천국을 용서했잖니? 솔직히 말하자. 나는 너를 볼 수 없고 너도 나를 기다리지 않는다. 힘내, 라고 위로해봐도 나는 너에게 따뜻한 서정시 한 편 건네기 어렵고사랑해, 속삭여 봐도 너를 사랑한 일이 거짓인 것만 같다. 기다림의 정서는 풀만 무성한 벌판, 기다리는 방식은 풀피리가 되는 일,​묻는다. 들판에 퍼지는 풀피리 소리가 너는 좋으냐, 솔직히 말한다. 햇살은 어제보다 더 투명해지고여름에서 가을로, 새를 날려 보낸 ​나무는 계절을 새로 만드는데 근황의 세계는 기다림이 시드는 .. 2021. 9. 27.
자연주의자(自然主義者 자연주의자(自然主義者)/강영은 ​ 나를 꽃이라 부를 때마다 나는 너에게 코스모스를 보여줬네 이것 봐, 밀려가고 밀려오는 모습이 별 같지 않니? ​ 어느 먼 바닷가ㅇ에서 아름답고 반복적인 물결 들추어내는 별빛을 보듯 나는 너에게 방향을 편애치 않는 꽃을 내밀었네 피고 지는 일이 별의 운행이라면 푸른 별빛에 너를 파묻는 일은 너를 잃는 일, 나를 꽃이라 부를 때마다 ​나는 너에게 피기 시작한 우주를 보여 주었네 이것 봐, 떨어지는 꽃잎이 별 같지 않니? ​ 너는 없고 내가 보낸 우주는 광활하고 끝이 보이지 않네 『시와 소금』 2020년 가을호,부분 수정 2020. 10. 7.
깊은 우물 깊은 우물/강영은 ​ 테린쿠유*는 입구가 좁고 낮은 문장, 무릎걸음으로 걸어야 읽을 수 있네 땅속으로 이어진 수천 개의 단락을 읽으려면 내 몸이 글자가 되어야 하네 돌로 통로를 막아버리면 단 한 명의 천사도 들어 올 수 없는 캄캄한 구절에 깜짝 놀란 나는 어두운 숲이 되기도 하네 ‘이 거친 숲이 얼마나 가혹하며 완강했는지 얼마나 말하기 힘든 일인가’** 어둠에 가로막힌 나는 ​ 돌벽이 파고 들어간 문장을 개미들의 교회, 개미들의 학교, 개미들의 공동 부엌, 개미들의 회의 장소, ​개미들의 마구간과 포도주 제조 구역까지 있는 구문으로 오독하네 잘못 읽은 문장은 내게 지옥 같아서 이 지옥 속에서 어떻게 살까, 살 수 있을까, 더듬더듬 돌벽을 더듬는 생각이 깊이를 파네 ​ 내가 아는 건 보이지 않는 깊이에 우.. 2020. 7. 9.
경계도시 경계도시/강영은 언제부턴가 왼쪽이 아프다 기침을 하면 왼쪽 가슴이 쿨럭이고 고개 돌리면 왼쪽 등허리가 땡긴다 어떤 권력이 점거했는지 어떤 부조리가 관여했는지 미세먼지 같은 대답을 듣는 날에는 목줄기까지 뻣뻣하다 내 몸의 기득권자는 누군가요, 내가 아닌가요, 당귀즙을 앞에 놓고 외쳐 보아도 단단한 근육질에 묶인 도시는 오른쪽으로 돌아서지 못한다 어쩜 여기는 잘 드는 날로 다듬어진 인형들의 도시일지 몰라. 선반 위에 놓인 목각인형처럼 사지를 내려놓고 빙그르르 돈다 누가 총을 들이댄 것도 아닌데 네, 네, 그렇군요. 유리벽에 박힌 나를 보려고 선 채로 돈다 움직이는 벽에게 애걸하듯 산 채로 돈다 고통의 계단을 높이는 건 누구일까, 계단 위에 놓인 목에 붕대를 감고 계단 아래까지 내려간다 어느 쪽에도 유리한 증.. 2020. 5. 28.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강영은 ​ 키스할 때 코는 어디다 두죠? 당신의 입술이 코의 행방을 물어 왔을 때 봄이 왔다 꽃 보라 날리듯 비말(飛沫)뿜는 봄의 숨결은 뜨겁기만 한데 마스크 속에 숨은 코는 찬피동물처럼 살려고, 살아내려고 몸부림친다 ​ 괜찮아요, 당신? 당신의 안부를 발로 찬다 사랑의 얼굴을 내면에 숨긴 발길질은 보노보식 인사 ​ 그럴 때 당신의 코는 너무나 멀리 있다 내가 모르는 대륙에 있는 것 같다 ​몇 개의 대륙을 건너야 입술에 닿나 절정에 목숨 건 꽃나무처럼 사랑은 죽음을 만발하게 피워내는데 꽃향기 날리는 봄날의 키스는 오리무중 코의 행방을 찾기까지 당신도 나도 마스크를 벗지 못 한다 . *마그리뜨 의 그림 제목. 원제 '이미지의 변용' 웹진『시인광장』 2020년 5월호 마그리뜨 의 그.. 2020. 5. 28.
안탈리아 안탈리아/강영은 고고학적 가치가 있는 거리에서 고고학적인 사랑을 만나는 건 아프지 않다 기억 속에 밀폐된 당신과 나와의 거리를 재어 보는 일 같아서 속 모른 당신에게 빠지는 건 두렵지 않다 처음 본 거리는 레몬빛이니까 익숙한 느낌이 익숙해서 아플 때 헤이, 리라 꽃다발을 줄게 죽음을 항해하는 오디세우스처럼 나를 사랑해줘 올리브 나무를 지나온 바람처럼 나를 흔들어줘 풍경만 논하는 애인이 되어줄게 내륙의 작은 식당에서 깨물었던 올리브 절임처럼 역사와 정치를 말하지 않는 열매가 되어줄게 헤이! 어제와 내일로부터 고립된 나를 속여 봐 낡아빠진 골목을 연주하는 기타리스트처럼 나를 울려봐 고대 성곽을 넘은 길처럼 푸른 애인들을 투두둑, 떨구어 줄게 나 혼자 충분히, 낯선 관광지가 되어 줄게 『시인시대』 2019년 .. 2019. 10. 22.
돛대 검정색과 금색의 녹턴; 떨어지는 불꽃*/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 돛대/강영은 너는, 마지막 사랑을 번역하려 한다 바람을 매단 기둥답게 바람의 방향에 몰입하려 한다 사랑의 방향은 아니? 너는, 내가 모르는 깊이에 닻을 내리려 한다 너와 나는 푸르스름한 골목 끝에 서 있었는데 마지막이니, 마지막이니? 말의 절벽에서 뛰어내릴 뿐 ​ ​찢어진 말의 의미는 버려두고 폭풍우를 안은 사물이 되려 한다 입술에서 입술로 건너간 불꽃이 있고 타오르는 입술은 아무런 수단이 되지 않는데 검정색과 금색의 녹턴; 떨어지는 불꽃* 두 손으로 불꽃을 감싼 너는, 어떤 감정도 건네지 않는다 ​ 『시작』2019년 가을호, 2019. 10. 6.
블랙홀 탈출 익스프레스 블랙홀 탈출 익스프레스/강영은 토로스산맥*을 넘는 기차는 시속 60킬로, 지금은 사라진 비둘기호처럼 완행이네 산줄기를 돌아가는 나의 여정도 완행이어서 쇠로 된 지붕에 날아가 앉은 비둘기 같네 내 마음의 급행 속도를 창공에 던져버린 나의 비둘기는 과녁 없는 화살, 시간을 쓰러뜨.. 2019. 7. 16.
에페소, 잿빛 고양이 에페소, 고양이 /강영은 고양이는 가만히 앉아있다 사선으로 내리쬐는 햇살, 사람들의 애교 섞인 어떤 부름에도 구애받지 않으려는 듯 무너진 돌기둥 위 채 떨어져 나가지 않은 조각의 남은 부분처럼 앉아있다 불불산을 내려온 바람 소리도 에게해를 올라온 물결 소리도 목덜미 털을 세우는 실오라기 잔향일 뿐 고양이의 모든 감각은 휘어지면서 들어 올려진 꼬리에 멈쳐져 있다 고양이는 의식적으로 나를 밀어내는 듯하다 쿠레테스(Guretes) 거리를 걸어 내려가는 나를 타오르는 불길로 보고 있는 듯 하다 흔들리는 내그림자가 폐허의 외부를 그려내도 번져오는 불길을 막으려는 듯 고양이의 푸르고 깊은 눈동자는 마을이 가라앉은 저수지처럼 고요하다 폐허가 남긴 역사에 흔들림은 없었다 고양이는 지금 시간의 어떤 침입자에게도 틈을 내.. 2019. 7. 16.
젖은 돌 젖은 돌/강영은 눈썹씨름하는 돌을 만났다 밤새 울었는지 온몸이 젖어 있었다 눈자라기를 받아주는 떼받이처럼 바라보는 눈사부랭이가 따라 젖었다 아그려쥔 손금에선 물 흐르는 소리, 신성한 숲에 놓인 것처럼, 돌은 오전 8시의 숲속에 앉아 있었다 ​ 비비새가 울고 가고 모들뜨기 같.. 2019. 6. 21.
전유專有 전유專有/강영은 버려진 꽁초 더미에서 조금 더 긴 토막을 찾는 것은 길에서 토막잠 자는 사람들의 전유만은 아니다 침상에서 막 깬 로얄 코펜하겐, 푸른 꽃무늬 찻잔으로 해피 모닝 마시는 당신도 유리 재떨이 속을 뒤져 그것을 받쳐 든다 침과 재로 더렵혀진 꽁초를 집어 들고 자랑스럽.. 2019. 6. 21.
새해 새해/강영은 새가 날아왔다 어둠 헤쳐 온 새는 관형사로 떠올랐다 소나무가 새장만큼 커지자 사람들은 품고 온 새를 높이 던졌다 새가 없는 나는 떨어지는 깃털을 모아 새를 다시 만들었다 당신과 나 사이 해, 라는 문자가 생겨났다 구입한 지 얼마 되지 아니한 모자(帽子) 같은 것, 낡지 .. 2019. 6.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