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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머의 신작

에페소, 잿빛 고양이

by 너머의 새 2019. 7. 16.

 

 

에페소, 고양이 /강영은

 

고양이는 가만히 앉아있다
사선으로 내리쬐는 햇살, 사람들의 애교 섞인
어떤 부름에도 구애받지 않으려는 듯
무너진 돌기둥 위 채 떨어져 나가지 않은
조각의 남은 부분처럼 앉아있다
불불산을 내려온 바람 소리도
에게해를 올라온 물결 소리도
목덜미 털을 세우는 실오라기 잔향일 뿐
고양이의 모든 감각은
휘어지면서 들어 올려진 꼬리에 멈쳐져 있다
고양이는 의식적으로 나를 밀어내는 듯하다
쿠레테스(Guretes) 거리를 걸어 내려가는 나를
타오르는 불길로 보고 있는 듯 하다
흔들리는 내그림자가 폐허의 외부를 그려내도
번져오는 불길을 막으려는 듯
고양이의 푸르고 깊은 눈동자는
마을이 가라앉은 저수지처럼 고요하다
폐허가 남긴 역사에 흔들림은 없었다
고양이는 지금
시간의 어떤 침입자에게도 틈을 내주지 않으려는 듯
하루살이에게도
동그란 몸을 한껏 세운 채 미동이 없다
한참을 걸어가다 뒤돌아보아도
고양이는 여전히 앉아있다
잔해 속에 살아넘은 시간의 표상처럼
무너진 돌더미에 참회록을 새기는 내 마음의 폐허를
폐허의 흔적을 가만가만 일으키고 있다
폐허는 시간의 힘으로 복원된다는 듯

 

 

 

『발견』 2018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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