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너머의 신작 59

나의 애인 나의 애인/강영은  나를 가장 많이 울리고 나를 가장 많이 웃게 하는 이가 나의, 애인입니다.누구보다 나를 잘 알고 누구보다 나를 모르는 이가 나의, 애인입니다.나의 표정과 감정을 살피거나 나의 외모와 마음을 지배하는 이가나의, 애인입니다. 함께 쓰러지고 함께 일어서는 이가나의, 애인입니다.어제 했던 약속도 어제라는 독약도 모두 삼키는 이가 나의, 애인입니다.매일 만나거나 죽어서도 만날 이가나의, 애인입니다.너무 많은 애인을 가져서 무겁습니다.너무 많은 애인을 두어서 괴롭습니다. 아니 외롭습니다.내가 나의, 애인이기 때문입니다. ​『미네르바』 2024년 봄호 2024. 6. 27.
이승악*/ 강영은 이승악*/ 강영은 ​ ​ 공동묘지 지나 닭 모가지 비트는 토종닭집 지나 벼슬 없는 닭처럼 이승에 든다. ​ 삼나무 팽나무, 새덕이, 죽나무, 생달나무, 참식나무, 꽝꽝나무, 산딸나무, 산뽕나무, 굴거리나무, 사스레피나무, 개서어나무, 개섬벚나무, 윤노리나무, 터널을 이룬 숲속에서 ​ 이름 없는 산새처럼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건너간다. ​ 제주 산수국, 보라빛 꽃망울 들인 허파꽈리가 부푸는데 이승에서 이승을 맛보고 싶은 여러 겹의 육신들, 저승을 다녀온 것처럼 왁자지껄 다가온다. ​ 이승에서 이승이 보이지 않는다고, 투덜대며 다가온다. 혼자 걸으니 무섭지 않나요? 탁탁거리는 스틱들, 배낭 없는 나를 무거워한다. ​ 살쾡이 한 마리, 키 낮춰 숲길 건넌다. 마음을 할퀴고 가는 생각이 이승이라면, 세상 같은.. 2024. 1. 20.
시간의 나비/강영은 시간의 나비/강영은 ​​ ​ 말랑말랑한 젤리를 먹을 때처럼 슬픔을 아껴먹던 소녀를 기억한다. 눈가엔 흐느낌이 번져 있었지만, 젤리 껍질을 벗긴 것처럼 빛나던 눈빛 산사(山寺)의 종소리가 내려와 오후 네 시의 마음에 울릴 때까지,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입속말 되뇌이던 소녀를 기억한다. 소녀의 슬픔을 기억할 필요는 없다. 소녀의 머리칼에 앉아 있던 분홍 리본이 시간의 나비처럼 날아왔으므로 기억이 저 혼자, 날개를 접은 나비처럼 시간을 접어보는 것이다. 실밥이 너덜너덜해진 리본처럼 나는 자주 울고 자꾸 실패하지만, 분홍으로 물드는 저녁이 되면 시간 속에 사라진 소녀를 불러온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흰 무명 커튼이 펄럭이는 어두운 창가에서 내 가 왜 울었는지는 중요하지가 않다. ​ ​ ​ ​ 『시와.. 2023. 11. 25.
말테우리/강영은 말테우리/강영은 ​ 말을 방목하는 아침에는 홍옥을 먹고 말을 거두는 저녁에는 황금향을 먹는다. 내가 아는 초원의 빛깔이 다르다는 말, 침묵이 밴 초원에선 과일 익는 냄새가 난다. 풀어 놓은 말들이 울타리를 뛰어넘을까 봐, 재갈 물린 말 속엔 참새들이 드나든다. 말을 돌보는 건 나의 사명. 나의 분복, 재잘재잘 종일 지껄이며 입 다문 나를 흉내 낸다. ​ 탱자처럼 입이 굳어질까 봐, 가시넝쿨 우거진 길과 돌짝밭을 달린다. 마른풀 태우는 바람의 채찍, 말은 말을 버린 짐승처럼 사납게 날뛴다. 영혼의 몸처럼 말랑해진 말을 마구간 안으로 몰아넣는다. 졸음에 지친 말의 등허리를 감싸 안으면 털이 보송한 말잔등에 젖어드는 슬픔, 내가 키우는 말의 근육이 팽팽해진다. 별도 달도 뜨지 않는 밤, 말 중의 말, 고독이 .. 2023. 11. 25.
책장冊張, 낱낱이 펼쳐진 밤의 숲 책장冊張, 낱낱이 펼쳐진 밤의 숲/ 강영은 ​ 시인의 나라는 중립국이다. 아군 적군이 없다. 은유(隱喩)로 빚은 밤의 숲처럼 꽃을 꽃이라 말하지 않고 벌레를 벌레로 보지 않는다. 신(神)을 높이거나 짐승을 업신여기지 않는다. 가지 끝, 허공을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지 않는다. 나무가 되기 이전의 형상들 숲을 채우는 온갖 기호들 너와 내가 약속하기 전까지 몰랐던 상징들 말똥이 뒤섞인 지뢰밭에서 처음 죽은 병사처럼 소모전을 치른다. 죽은 자들만이 장벽을 넘어간다. ​ 아무도 거할 수 없고 누구도 살 수 없는 언어의 신전(神殿) 시인의 나라는 그 숲에 세워진다. 『현대시』 2021년 9월호 ​ 2023. 9. 5.
시간의 연대(連帶) 시간의 연대(連帶)/강영은 돌 위에 돌을 얹고 그 위에 또 돌을 얹어 궁극으로 치닫는 마음 마음 위에 마음을 얹고 그 위에 또 마음을 얹어 허공으로 치솟는 몸 돌탑은 알고 있었다 ​ 한 발 두 발 디딜 때마다 무너질 걸 알고 있었다 무너질까 두근거리는 나를 알고 있었다 그건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므로 ​ 조그만 돌멩이를 주워 마음의 맨 꼭대기에 올려놓았다 ​ 태어나기 전의 돌탑을 태어난 이후에도 기다렸다 ​ 한 곳에 머물러 오래 기다렸다 ​ 돌멩이가 자랄 때까지 돌탑이 될 때까지 ​ ​ 『현대시』 2022년 10월호 ‘현대시가 선정한 이달의 시인’ 에서 2023. 9. 5.
청춘의 완성 청춘의 완성/강영은 탁자 위에는 늘 물컵이 놓여 있었다 너는 왜 물만 마시니? 눈앞을 오가는 어항 속의 금붕어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너는 묻고 있었지만 물풀 사이 오버랩 되는 물의 눈동자, 일렁이는 네 눈동자는 작은 어항 같아서 숨을 헐떡이며 목마름을 이겨내던 나는 어항 속에 갇힌 금붕어였다 청춘은 고상하지도 비천하지도 않은 음악 같아, 지하의 음악다방에서 청춘을 소모하는 동안 금붕어와 나 사이 흐르는 건 베토벤도 슈벨트도 아니었다 “어머니, 내 삶은 이제 막 시작한 것 같은데 난 내 삶을 내팽개쳐 버린거에요” 보헤미안 랩소디*를 칼 복사하던 가슴이 무대이고 악기이던 그때, 너를 기다리는 시간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레코드판 위를 도는 바늘처럼 너를 기다렸던 것 같다 무수한 기다림과 스파링하는 동안 잃은 것.. 2023. 9. 5.
사구(沙丘) 이야기 사구(沙丘) 이야기/ 강영은 바닷가 폐가를 지나다 쪽잠 자는 여인을 보았다 파도의 칭얼거림을 받아주는 모습이 실퇴*에 웅크린 나무쩍지 ​같았다 도끼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축축이 젖은 몸맨두리엔 파도가 부려놓은 물결무늬가 어룽져 있었다 ​ 여인의 길고 가느다란 머리카락은 해초처럼 풀어져 모나고 날카로운 돌을 몸것인 양 끌어안고 있었다 낡은 햇살이 맹세의 서약으로 주고받았던 금가락지처럼 여인의 손가락에 걸려 있었다 집터서리 너머 지척을 달구던 물결 소리가 별안간 놀라 따끔하게 울리는 목담을 부수며 바다로 갔다 ​ 여인의 목구멍에선 흐느끼는 파도 소리가 새어나왔다 파도는 자꾸 모래 알갱이들을 뱉어냈다 물금 너머 어두운 물결이 마득사리**처럼 밀려오고 밀려갔다 부서진 마음이 묵돗줄되어 물이랑을 나르는 걸까, .. 2022. 3. 31.
은행나무 서사 e Tree Of Life * /강영은 태어나기 전부터 나는 당신의 딸이었습니다. 가을날, 은행잎이 떨어지는 것처럼 그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습니다. 은행잎이 금화가 되는 일처럼 비현실적이기도 했습니다. 내가 나를 기록하기 전이어서 은행에 맡겨둔 백지수표처럼 사랑이 존재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은행잎으론 아무것도 살 수 없었지만, 당신의 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배가 불렀습니다. 굶주림은 죄가 아니었습니다. 몸 안에 피가 맴돌던 그때, 바람의 노래를 허밍으로 따라부르던 그때, 당신은 깨어지지 않는 놋그릇에 우주를 담아주었습니다. 새벽 별로 땅의 기초를 놓던 유일신 같았습니다.‘같다’보다 가까운 거리를 지닌 나는 순종의 나무였습니다. 내가 놓인 장소는 자발적 선택인가, 피동의 속삭임은 오로지 당신의 영역이어서 풍경.. 2022. 3. 31.
블로거 블로거/ 강영은 그는 걷는 자, 생각 속으로 걸어 들어가 자신을 방목한다 밤눈 어두운 말을 타고 본 적 없는 이웃을 만나기도 한다 고독은 그의 반려감정, 벌레 먹은 밤이 나무에서 떨어질 때 외따른 곳에 다다른 그의 표정은 외로운 벌레, 상처를 드러내고 상처를 봉합하고, 부화된 외로움은 정지된 허공을 열어 도착하지 않는 어제의 풍경을 불러오거나 미리 온 내일을 풀어놓는다 새가 들어 있는 그림엽서처럼 지구 바깥으로 안부를 날려 보내기도 한다 그의 발자국을 따라가 보면 꽃과 나비와 그들을 키운 숲이 들어 있다 어떤 숲이 좋니, 그는 별빛에 질문 한다 그의 목록에 첨가된 별의 선택은 그가 죽은 뒤에야 확인되는 ​것, 몇억 광년 지나야 들을 수 있는 대답이어서 경계 없는 지경의 나무들은 늘 별빛에 목을 매단다 전.. 2022. 3. 18.
베겟머리 송사 베겟머리 송사/강영은 숏커트를 한 나무들이 지면에 즐비해요 전기톱을 실은 트럭이 추억의 가지들을 쳐냈다지요 오소리 목덜미에 오소소 소름 돋은 오늘 새벽엔 추억에 올가미를 매단 박새가 느티나무 둥치에 감쪽같이 새끼를 깠대요 난생의 둥근 울음들로 공원이 떠들썩했대요 공원 지나 푸른 미용실 유리창 너머 엊그제 자살을 시도한 젊은 벚나무의 우울증에 대해 입소문이 분분해요 미용실에 통째로 들어앉은 벚나무의 사인(死因)이 타살일지 모른다고, 때 없이 찾아온 남자가 용의 선상에 올랐다나요 태양이 무슨 귀띔이라도 해주지 않을까, 구름이 유리창을 여러 차례 들락거렸다는데 미용실은 하루종일 뭉게뭉게 피어나는 구름만 퍼머했대요 시간을 너무 세게 코팅했다나 봐요 구불거리는 자줏빛 노을이 목덜미에 흘러넘칠 때, 더이상 자라지 .. 2021. 11. 23.
책장冊張, 낱낱이 펼쳐진 밤의 숲 책장冊張, 낱낱이 펼쳐진 밤의 숲/ 강영은 시인의 나라는 중립국이다 아군 적군이 없다 은유隱喩로 빚은 밤의 숲처럼 꽃을 꽃이라 말하지 않고 벌레를 벌레로 보지 않는다 신神을 높이거나 짐승을 업신여기지 않는다 가지 끝, 허공을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지 않는다 나무가 되기 이전의 형상들 숲을 채우는 온갖 기호들 너와 내가 약속하기 전까지 몰랐던 상징들 말똥이 뒤섞인 지뢰밭에서 처음 죽은 병사처럼 소모전을 치른다 죽은 자들만이 장벽을 넘어간다 아무도 거할 수 없고 누구도 살 수 없는 언어의 신전神殿 시인의 나라는 그 숲에 세워진다 『현대시』 2021년 9월호 2021. 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