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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머의 신작

말테우리/강영은

by 너머의 새 2023. 11. 25.

 

 

말테우리/강영은

 

  말을 방목하는 아침에는 홍옥을 먹고 말을 거두는 저녁에는 황금향을 먹는다. 내가 아는 초원의 빛깔이 다르다는 말, 침묵이 밴 초원에선 과일 익는 냄새가 난다.

 

  풀어 놓은 말들이 울타리를 뛰어넘을까 봐, 재갈 물린 말 속엔 참새들이 드나든다. 말을 돌보는 건 나의 사명. 나의 분복, 재잘재잘 종일 지껄이며 입 다문 나를 흉내 낸다.

  탱자처럼 입이 굳어질까 봐, 가시넝쿨 우거진 길과 돌짝밭을 달린다. 마른풀 태우는 바람의 채찍, 말은 말을 버린 짐승처럼 사납게 날뛴다.

 

  영혼의 몸처럼 말랑해진 말을 마구간 안으로 몰아넣는다. 졸음에 지친 말의 등허리를 감싸 안으면 털이 보송한 말잔등에 젖어드는 슬픔, 내가 키우는 말의 근육이 팽팽해진다.

 

  별도 달도 뜨지 않는 밤, 말 중의 말, 고독이 마중 나온다. 말과 나는 유일한 어둠이 된다. 말과 나 사이 경계가 없어진다.

 영원히 말을 모는 말 속에 영혼을 모는 나는 말테우리* 말을 방목하는 아침에는 초원을 달리고 말을 거두는 저녁에는 우주를 달린다.

 

*말몰이꾼(제주 방언)

『 한국시인협회 사화집 경계境界』20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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