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Tree Of Life * /강영은
태어나기 전부터 나는 당신의 딸이었습니다. 가을날, 은행잎이 떨어지는 것처럼 그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습니다. 은행잎이 금화가 되는 일처럼 비현실적이기도 했습니다. 내가 나를 기록하기 전이어서 은행에 맡겨둔 백지수표처럼 사랑이 존재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은행잎으론 아무것도 살 수 없었지만, 당신의 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배가 불렀습니다. 굶주림은 죄가 아니었습니다. 몸 안에 피가 맴돌던 그때, 바람의 노래를 허밍으로 따라부르던 그때, 당신은 깨어지지 않는 놋그릇에 우주를 담아주었습니다. 새벽 별로 땅의 기초를 놓던 유일신 같았습니다.‘같다’보다 가까운 거리를 지닌 나는 순종의 나무였습니다. 내가 놓인 장소는 자발적 선택인가, 피동의 속삭임은 오로지 당신의 영역이어서 풍경이 녹스는 저녁마다 날카로운 별빛이 나뭇가지를 넘나들었습니다. 까닭 모른 슬픔이 닥칠 때면 그 별빛으로 손목을 긋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우연과 필연이 집적돼 이루어진 결과물이었다면, 한 남자를 만나 가족을 이루고 자식을 낳는 맹목적인 죄를 짓지는 않았을 겁니다. 눈앞에 놓인 모든 당신을 우상으로 섬기지도 않았을 겁니다. 당신을 향한 나의 기도는 필사적이어서 지금 여기, 인류세의 나에 이르기까지 당신을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욕망 속에 나를 방임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무엇이든 되고 싶었던 나는, 당신을 잃는 일에 골몰했습니다. 나는 무엇입니까? 벌레 먹은 나무, 무너진 성터, 해골 골짜기에 놓인 해골입니까? 빙하기의 나와 인류세의 나 사이, 어떤 내가 있는 것인지 아직도 나를 알지 못하는 나는, 우연과 필연이 뒤엉킨 거리에서 나와 거리 두기를 합니다. 그리하여 나는 마스크에 목숨 건 얼굴들이 유령처럼 흘러가는 거리에서 太古의 당신을 찾습니다. 별도 뜨지 않는 밤, 깊고 어두운 심장에서 이파리 하나를 꺼내 듭니다. 이 이파리는 유전처럼 오래된 지표에서 솟아나는 문장, 끊임없이 흐르는 핏줄의 유적. 최초의 지문으로 쓴 나의 고백서입니다.
* 제목 수정
『시작』 2022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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