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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머의 새

동대 입구

by 너머의 새 2025. 5. 17.

동대 입구/강영은

 

정오의 태양을 붙들어 맨 텅 빈 테니스장, 학교가 파한 아이들 둥근 머리가 테니스공처럼 날아다니는 장면과 장면 사이에 있다 동대 입구

가랑잎 몰려가는 그곳으로 들어서면 정문이 있고 삼문(三門) 중, 큰문으로 가는 벼슬아치처럼 동대로 가는 차들은 한결같이 그곳으로 올라간다

해가 떠오르는 방향으로 등을 돌리면 동대 입구는 산으로 가는 길을 낸다 상아탑 만큼 오르기 힘든 오솔길은 가고 없는 소월을 향해 보이지 않는 길을 낸다

가시덤불과 쑥구렁 사이, 함초롬히 놓인 동대 입구, 나는 그 입구에서 아들의 상처를 만진다

축축한 지면에 닿아 검게 부식되어가는 가랑잎처럼 긁어 부스럼 난 슬픔을 만져본다 수액 돌지 않는 계절이 검은 꽃 피워냈나,

엄마, 동대 입구로 와요, 국립극장 앞으로 오든지요. 아토피가 덕지덕지 피워낸 꽃송이 몸에 달고 빼빼 마른 나무처럼 서 있는 아들

죽을 만큼 아픈 꽃의 염증에 견디지 못한 아들아이가 병가(病暇) 내던 날, 향기 나지 않는 열꽃의 언저리로 나를 불러 낸 아들아이와 나는 남산길을 오른다

얼마나 많은 가랑잎을 밟았을까, 지구라는 광활한 숲을, 몇 바퀴 돌았을까

가을에서 겨울로 건너가는 계절이 가랑잎을 셈하는 동안 동대 입구는 내가 읽은 아들아이의 가장 첫머리에 꽂아둔 책갈피가 되었다

동대 입구에는 가랑잎 앉았다 가는 벤치가 있고 가랑잎을 떨구는 나무가 있고 가랑잎처럼 쓸쓸한 벤치를 끌어안은 공원이 있다

그 벤치에 새잎 돋을 때까지 걸어가는 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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