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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눈 늦은 눈/강영은     늦은 눈 오시는 날 희디흰 꽃씨들이 빈 봉투에 들어찬다   온다는 조짐도 예측도 없는 기별은 불규칙한데 빈 봉투에 내리는 아주 규칙적이고 아름다운 꽃모양 눈  공중으로 흩어지다 햇빛을 받을 때면 더 없이 빛나는 눈이 가장 우아한 무늬와 모양을 이루는 바로 그 때   당신은 당신 눈 속에 나는 내 눈 속에 눈꽃을 피워낸다 각기 다른 창가에 꽃눈을 티워낸다  ​아, 당신과 나는 서로에게 늦은 눈.   삼짇날 지나 흰 제비꽃 피어나듯 무수한 눈송이로 진화할지 모르지만 ​ 각막의 가장 안쪽에서 흐릿하게 피어나는 눈꽃은 이 계절에 없는 꽃이니 ​ ​잠깐 피었다 지는 눈의 씨앗들이여, ​ ​얼듯 녹을 듯 존재하는 그리움 속으로 가만가만 다녀가시라 2025. 3. 3.
책장冊張, 낱낱이 펼쳐진 밤의 숲 ​ 책장冊張, 낱낱이 펼쳐진 밤의 숲/ 강영은​ 시인의 나라는 중립국이다.아군 적군이 없다. 은유(隱喩)로 빚은밤의 숲처럼 꽃을 꽃이라 말하지 않고벌레를 벌레로 보지 않는다.신(神)을 높이거나짐승을 업신여기지 않는다. 가지 끝, 허공을천국과 지옥으로 나누지 않는다. 나무가 되기 이전의형상들숲을 채우는 온갖기호들너와 내가약속하기 전까지 몰랐던상징들 말똥이 뒤섞인 지뢰밭에서시인은처음 죽은 병사처럼 소모전을 치른다. 죽은 자들만이 장벽을 넘어간다.​아무도 거할 수 없고누구도 살 수 없는 언어의 신전(神殿)​시인의 나라는 그 숲에세워진다. 2025. 1. 26.
겨우살이 겨우살이/강영은​  느려터진 한 해를 하루의 시간으로 앞지르려던 나는 부은 얼굴에 얼음을 갖다 댑니다. 얼어붙은 시간의 침묵에 타박상을 입은 거죠 그래도 온 누리 가득 퍼지는 햇살 두서너 개 호주머니에 꽂아 두어야겠죠 머지않아 봄이 올 거라고, 덕담 한마디 잊지 말아야겠죠  파릇파릇 새잎 돋아나는 봄이 오면 어떤 나무가 원고지가 될지, 글자들이 돋아나는 이파리에선 어떤 국경(國境)이 태어날지 벌거벗은 하늘을 바라보는 나의 상상은 남쪽을 지극하게 자극 합니다  그러니까, 나는 겨우 살아가는 목숨인데요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 많은 까닭을 당신에게 묻어두고 세밑에서 정초로 건너가보는 것인데요 얼어붙은 겨울을 건너야 하는 나의 언어는 아무런 말없이 등을 내주는 당신의 슬픔에 기생하는 까닭에 겨우 살아요  그렇게.. 2025. 1. 26.
상대성(相對性) 상대성(相對性)/강영은​ 유리컵에 담긴 포도알처럼꺼내기 좋은얼굴 유리컵에 비친 포도알처럼꺼낼 수 없는얼굴 아침의 일출과 저녁의 일몰처럼기분이 다른얼굴 이렇게 많은 나를 누가 키웠나? 수없이 많은 나와 연애해도수없이 많은 나와 이별해도온도가 같은얼굴 내가 뱉은 씨앗과내가 삼킨 열매처럼법칙이 같은얼굴 새가 노래하는 아침과새가 돌아오는 저녁처럼좌표가 같은얼굴​포도밭 지기 같은 당신이 키웠나?​한 넝쿨에서 나왔는데왜 나왔는지 모르는어제 만났다 오늘 헤어지는 작은 손바닥 안얼굴들 2025. 1. 23.
독자(讀者) 독자(讀者)/강영은   한 문장 속에는 눈, 코, 입 같은 여러 개의 문(門)이 달려 있습니다. 열거나 닫힐 뿐인 문(門)은 상징일지 모르지만 문(門)이 있다는 건 나를 안내하는 자가 있다는 것  더 빨리, 더 간절히, 문(門)을 열려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럴 때 문(門)은 계단이 필요합니다. 뛰어내리거나 뛰어오를 계단이 준비되었다면 문패(門牌)와 같은 알레고리를 열어야 합니다.  이를테면, ‘열려라 참깨’와 같은 주문(主文)을 지나야 합니다. 아, 저런! 잘못된 문(問)이 문(聞)을 통하여 수치를 갖는군요. 그럴수록 패(牌)를 쥔 손이 밑줄 긋습니다.  속독(速讀)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단번에 담장을 넘습니다. 페이지 뷰를 원하는 사람들은 한 장면에 오래 머물러 있기를 좋아 하구요.  반복적이거나 인상적.. 2025. 1. 23.
청춘의 완성 청춘의 완성/강영은     탁자 위에는 늘 물컵이 놓여 있었다     너는 왜 물만 마시니?    눈앞을 오가는 어항 속의 금붕어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너는 묻고 있었지만 물풀 사이 오버랩 되는 물의 눈동자, 일렁이는 네 눈동자는 작은 어항 같아서    숨을 헐떡이며 목마름을 이겨내던 나는 어항 속에 갇힌 금붕어였다    청춘은 고상하지도 비천하지도 않은 음악 같아, 지하의 음악다방에서 청춘을 소모하는 동안 금붕어와 나 사이 흐르는 건 베토벤도 슈벨트도 아니었다    “어머니, 내 삶은 이제 막 시작한 것 같은데 난 내 삶을 내팽개쳐 버린거에요”   보헤미안 랩소디*를 칼 복사하던 가슴이 무대이고 악기이던 그때, 너를 기다리는 시간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레코드판 위를 도는 바늘처럼 너를 기다렸던 것 같다 .. 2025. 1. 23.
시계의 미래 시계의 미래/강영은  지나간 것은 지나갔을 뿐이에요. 지나간 줄 모르고 지나간 것에 매달려 있다면 시계가 아니겠죠. 시계는 알아요. 강물이 마침내 하늘로 흐른다는 걸당신은 나를 기다리지 말아요. 자꾸 떠나가니까요. 당신이 온다 해도 나는 떠나가겠죠. 그러니 시계겠죠.한밤중에 시계는 홀로 울겠죠. 사랑과 이별에 내일이 없다고, 끝없이 재생되는 어제 속으로 돌아가겠죠.당신과 나는 고장 나겠죠. 당신이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다 해도멈추지 않고 우는 일, 그것이 시계가 꿈꾸는 일이겠죠마음의 분침과 초침을 믿어 봐요. 내일의 시계가 내일의 세계가 될지 시계가 걸어가는 그곳이 내일의 세계겠죠. 고장난 시간에 붙잡히지 않는 시계의 미래겠죠. - 2024년 겨울호 2025. 1. 1.
지구인 지구인/강영은   아픔은 정체 모르는 과일이다.  가슴에 총소리가 고이고 이마에 폭탄이 터질 때 썩은 과일처럼 짓무르는 증상이 몸에 속한 건지 마음에 속한 건지 그 맛을 알 수 없다.   고통의 진실은 생각 속에 있는 거라고 생각을 두둔하지만, 생각이 모르는 아픔도 있는 것 인지 아픔이 몰고 오는 전쟁터를 알지 못했다.   어느 저녁에 나는 숲속에 있었다.   벌 떼가 아카시꽃에 몰려드는 것처럼 딱, 꼬집어 말할 수 있는 아픔이 있는 건 아니었다.   노을이 지고 떠돌이 벌처럼 헤매는 피의 향기가 숲속으로 흘러들었다. 누구의 무덤에서 풍겨 나오는 것일까,   뉴스에서 보았던 시신(屍身)들, 무덤에 닿지 않은 생명들이 썩은 과일처럼 버려지고 있는 것이 생각났다.  생각 속의 느낌이 흐느낌으로 변할 때, 어.. 2024. 12. 22.
당신의 결심 당신의 결심/강영은​​ 지키기 힘든 마음자리에 놈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나의 전유물인지 당신의 자존심인지 어떻든 어떻게든 지켜야 할 존재 같아서 일인칭인지 이인칭인지 마음을 뺏긴 적이 하도 많은 존재 같아서​ 놈의 입술에 키스한다. 놈의 입속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온다. 지킬 수 없는, 그러나 지켜야 하는 연기(煙氣)의 말,​ 구겨진 종이를 펴지 못해 헤매는 손처럼 미망(迷妄)으로 가득 찬 이 비문(非文)이 당신의 결심이었나,​ 그렇다고 당신 것만은 아닌,​ 밑 빠진 항아리 속을 빠져나가는 생쥐처럼 죽이기도 어렵고 살리기는 더욱 어려운 마음의 실체​ 마지막이야, 정말, 마지막이야!​ 식탁 위에 남은 한 조각 케이크처럼 입술에 담기는 다정한 말에 방심(放心)을 선택한 나의 무심(無心)은 당신을 그저, 놈이.. 2024. 12. 22.
백로전미발白露前未發* ​ 백로전미발白露前未發*/ 강영은  ​ 난데없이 부는 바람에강아지풀이 화분을 벗어나려고 발버둥 친다.귀로 듣는 이야기는 모두 아픈 것이어서 귀를 버리니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는 것일까?​명줄이 끊어지는 강아지를 품에 안고병원으로 달려가던 날처럼낯설지만 낯설지만은 않은 풍경.​전쟁과 폭풍, 가짜뉴스 같은비명은 비명을 모르고 슬픔은 슬픔을 모르고초록이 친구이길 바랐으나초록을 초록으로 마주하기엔 절벽 같은 시간​귀가 남긴 풍경 속에서 돌아오지 않는 당신, 다시 볼 수 없는 당신을여름이라 불러도 되나,​생사를 알 수 없는 계절 속에나를 세워두고 처서 지난다.​갓 태어난 생명이 삶과 죽음의 테두리를 도는 이 땅은 계절이 무용(無用)한 세계​이중 고기압과 열대야에 짓눌렸어도비의(比擬)를 알 수 없는 소슬바람 분다고.. 2024. 12. 22.
자연 서정과 도시 풍자, 시간성의 주제와 언어적 매개의 방법 강영은 시집 『너머의 새』 해설 자연 서정과 도시 풍자, 시간성의 주제와 언어적 매개의 방법                       - 강영은의 네 가지 시적 양식과 그 중층적 복합성   오형엽( 문학평론가.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강영은의 시는 두 권의 서정 시집에서 출발하여 세번 째 시집 『녹색비단구렁이』(종려나무, 2008) 네 번째 시집 『최초의 그늘』(시안, 2011), 다섯 번째 시집 『풀등, 바다의 등』(문학아카데미, 2012), 여섯 번째 시집 『마고의 항아리』(현대시학, 2015) 등을 경유하고 일곱 번째 시집『상냥한 시론』(황금알,2018)을 지나 여덟 번째 시집인 『너머의 새』(한국문연, 2024)에 도달했다. 첫 시집에서 여덟 번째 시집에 이르기까지 강영은의 시는 시적 형식.. 2024. 11. 15.
시간의 나침반과 공간에 길들여진 숨소리 시간의 나침반과 공간에 길들여진 숨소리/강영은(시인) ​            -노자은 시집 『구름의 건축술』 해설  언어의 역동성은 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를 획득하게 하고 세계를 추 창조하게 한다. 언어를 넘어서는 이러한 말 행위가 구체화 된 것이 시적 작품이라면, 이번에 첫 시집을 내는 노자은의 시집은 말에 집중하고 말에 봉사해온 노작勞作의 결과물로 의식을 주관하는 언어의 역동성을 다각적으로 탐색하는 데 가치를 도모한다.  “시적 경험은 말로 환원 불가능하지만, 그런데도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말뿐”이라는 옥타비아 파스‘의 말처럼 노자은이 시속에 풀어놓는 말(언어)은 ‘생물’로서, 삶의 비의를 드러내는 시적 경험을 유효하게 만드는 기저가 된다. 시 속에 숨은 말이 표면화될 때 드러나는 .. 2024. 11.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