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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말의 서정과 감각의 촉수 손말의 서정과 감각의 촉수 /강영은            - ​양시연 시집『따라비 물봉선』해설    오늘날, 언어만을 인간의 의사소통 도구로 특정한 데에는 언어의 보편적 특성이 작용한다. 임의성, 분절성, 창조성, 역사성, 전위성, 문화적 전달 등이 그것인데, 언어가 가지는 이러한 특성은 시인들에게 있어 시 쓰기의 중요한 기점이 되며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도 중요한 소통체계가 된다.    인간이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이 신호체계를 사용할 수 없는 이들이 있다. 언어는 더 이상 유용한 것이 아니게 된다. 그때 우리는 신체의 동작, 외양, 접촉행위, 유사언어, 등을 수단으로 뜻을 전달하고 표현하게 된다. 즉 신체 언어를 사용하게 되는데, 하나의 예로 손말(手話)을 들 수 있다.    이번에 첫 시집을 내는.. 2024. 11. 15.
그 리움의 거리를 측량하다 그리움의 거리를 측량하다/강영은                -오승철 시집 를 읽고 오승철 시인은 절절함과 신명이 묻어나는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언어로 보고 느끼고 살아온 존재의 본질과 현상 즉, 삶의 모든 풍경을 유감없이 끄집어내는 시인이다. 다시 말해 사람의 마음을 단숨에 베는 단검이 그의 시 속에 들어 있다는 말이다.  그가 휘두르는 언어의 광휘(光輝)는 한마디 말이 수천 마디의 말을 능가하는 미학임을 여실히 드러낸다. 이번 시집에서는 그러한 그의 미학이 정점에 다다른 듯 여겨진다. 무위(無爲)의 도량처럼 폭넓은 서정이 사람의 마음을 단숨에 끌어안는 시적 행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서시(序詩)로 자리 한 ​다음 시를 보자. 판소리 한마당을 집약해놓은 듯한 절창이며 완창이다. 이 시 하나가 이번 시집의.. 2024. 11. 15.
울릉(鬱陵) 울릉(鬱陵)/ 강영은   섬잣나무 같은 사내에 눈이 먼다면, 울릉도에 가볼 일이다.​ 깊은 바다 외롭게 솟아있는 해산海山처럼 폭발하는 마음, 아무도 모르게 출렁거리는 마음 데리고 울릉도에 가볼 일이다.​ 남몰래 띄우는 편지처럼 나리분지 북쪽에 일렬로 늘어선 봉우리 어느 한 칸에 우데기* 같은 초막 한 채 세워도 되리.​ 밤이면, 섬잣나무 무릎에 누워 사랑하는 이의 귓밥 파주듯 가만가만 속삭이는 파도 소리 들어도 좋으리. 젊은 화산체 같은 마음 다시 타오르기를 기다려도 좋으리​ 섬과 섬 사이, 안개 짙어지면 오갈 데 없는 마음 고요해져 출렁거리는 밤의 기척은 한층 더 깊어지리. 세간의 이목구비는 아무래도 상관없으리.​ 좋았다가 흐리다가 비 오가를 반복하는 날씨 더불어 오직 그대만이 그리워지리. 슬픔이 울창.. 2024. 10. 6.
눈물은 공평하다 눈물은 공평하다/ 강영은 ​​​경기가 끝났을 때 승자도 패자도 눈물 흘렸다.​땀으로 얼룩진 표정을 닦는 척, 수건에 감정을 파묻고 꾹꾹, 목울대를 치받고 올라오는 울음을 눌렀다.​양팔을 높이 쳐든 승자는 메달을 가져갔지만텅 빈 손을 내려다보는 패자에게도 메달은 있었다.​시간이라는 메달!승부는 다만 순간 속에 녹여낸 사물일 뿐​딱딱한 기쁨을 목에 걸었다고 시간이 늘어나는 건 아니다. 물컹한 슬픔을 손에 쥐었다고 시간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시간은 안다. 그 공평함이 세상을 걷게 한다는 것을​흐르지 않는 시간 있어 눈물이 한 생을 완성하는 그때이슬처럼 영글게 하는 ​그 공평함이 신의 은총이라는 것을 먼 길 걸어본 당신과 나는 안다.『신동아』 2024년 9월호 2024. 9. 24.
무한을 향해, 무한의 너머를 향해 / 이승희 『현대시』 2024년 7월호 《커버 스토리》 무한을 향해, 무한의 너머를 향해 / 이승희  1. 바람의 행보  강영은 시인과 드물게 통화를 한다. 상냥하고 밝은 톤의 목소리, 천천히 느리게 잘 있느냐고 묻는다. 내가 묻고 싶은 말을 항상 먼저 한다. 잘 있다는 나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자신의 안부라고 할, 그러나 내게는 일상어가 아닌 시의 문장 같은 말들을 한차례 쏟아낸다. 마치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다. 제주의 안부를 섞은 바람이 불고, 이미 한 번의 바람이 지난 후의 남은 쓸쓸함 같은 게 빠르고 쏜살같이 지나간다. 외로웠구나, 또 시에 갇혀 살았구나, 그녀의 또 어떤 삶이 시를 불러 모으고 있구나, 그러다가 통화는 우리 언제 봐야 하는데 라는 말로 또 갑자기 마무리된다.  가끔, 그러니까 1년에.. 2024. 8. 17.
여름 밤이 남긴 것 여름 밤이 남긴 것/강영은​​네 눈 속에 별이 들어 있어,​논짓물*에 스며든 그 말을 들은 날부터 밤마다 속눈썹에 네가 돋았다 ​​​피에로의 웃음 같은 슬픔, 혹은 기쁨일지도 모를 너의 그 말​항아리 뚜껑 위에 올려놓고 복을 비는 정화수처럼한 그릇 물이라도 된다는 말​은하수 가득 별을 뿌려놓은 여름밤이 모두의 눈을 가리기 위해 반짝였지만​태풍처럼 왔다가 사라진 그림자를 찾아 헤맬 때면한 그릇 물에 고인 별빛이 흐렸다​죽어도 낫지 않는 피부병처럼 모호하고 불확실한 사랑이 찾아온 것은​폭풍우를 피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오두막에서였다 ​* 그냥 버리는 물'이라는 뜻의 제주 방언.​『문학 에스프리』 2024년 여름호 2024. 8. 17.
뫼비우스의 띠 뫼비우스의 띠/강영은  슬픔은 내부와 외부를 갖고 있다. 이 둘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나로 통합된다. ​너는 말한다. 울지만 말고눈물을 꼭 눌러 봐, 슬픔의 뒷면이구나 싶은 그때, 눈물은 처음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거야. ​눈물이 얼마나 멀리 가는지 알지 못하는 너는 그것을 슬픔이라 생각하는데고개 들어 창밖을 보니강아지풀과 부추꽃이 사는 바깥이 시들어 있다 ​꽃 피는 일에도 꽃 지는 일에도 한결같은 너와 나 사이, 구분할 수 없는 어둠이 있는 것일까, 눈동자 속으로 자꾸 고여드는 별빛​등만 바라보는 외줄기 사랑은 슬픔을 통과하지 못한다. 아무리 울어도 안팎이 모호한 눈동자 속의 첫 장면으로 돌아간다.​​『동행문학』 2024년 봄호 2024. 6. 27.
섬망(譫妄)의 숲 섬망(譫妄)의 숲/ 강영은  고라니는 소리의 본기(本紀)와 열전(列傳)을갖는다.  어떤 소리가 고라니의 진짜 소리인지 고라니가 기술하는 소리의 내력을 알지 못하지만 고라니의 목청은 방울을 굴리거나 개처럼 짖어대거나 사람처럼 휘파람 불기도 한다. 개울가 풀숲에서 불쑥 튀어나온 고라니를 본다. 반가운 마음에 휘익, 휘파람 불자 방울뱀처럼 목젖 굴리며개울 너머로 달아난다.  주고받은 소리 사이, 남아 있는 숲 축축한 낙엽, 썩은 나무뿌리, 가시덤불, 막 돋아난 어린 새싹들, 망설임 없이 뛰어내린 동백 꽃송이들, 삶과 죽음이 어우러져 한층 풍만해진  소리의 바닥이 거기 있었다.소리에 소리가 쌓여도  고라니의 눈높이에선 하늘이 보이지 않았을 거다.​ 고개 들어 하늘을 본 적도 없었을 거다. 고라니를 다시 본 것은.. 2024. 6. 27.
나의 애인 나의 애인/강영은  나를 가장 많이 울리고 나를 가장 많이 웃게 하는 이가 나의, 애인입니다.누구보다 나를 잘 알고 누구보다 나를 모르는 이가 나의, 애인입니다.나의 표정과 감정을 살피거나 나의 외모와 마음을 지배하는 이가나의, 애인입니다. 함께 쓰러지고 함께 일어서는 이가나의, 애인입니다.어제 했던 약속도 어제라는 독약도 모두 삼키는 이가 나의, 애인입니다.매일 만나거나 죽어서도 만날 이가나의, 애인입니다.너무 많은 애인을 가져서 무겁습니다.너무 많은 애인을 두어서 괴롭습니다. 아니 외롭습니다.내가 나의, 애인이기 때문입니다. ​『미네르바』 2024년 봄호 2024. 6. 27.
지붕과 바닥의 연계성에 대한 고찰/강영은 지붕과 바닥의 연계성에 대한 고찰/강영은 -나의 태양이 밤에도 빛날 수 있다면 색채에 물들어 잠자겠네-샤갈 도시 위에서* 나, 지붕 위로 한 발을 내디뎠네 한 순간 지붕이 환해졌네 발은 가깝고 지붕은 멀었네 허공이 붕 뜨고 지붕이 꺼졌네 길이 사라졌네 지상에 포물선이 사라졌네 더 이상 사라질 것이 없었네 청람 빛 스커트가 펄럭이며 날았네. 몸뚱이를 벗어던지고 어디론가 한없이 날아갔네 성당의 종탑이 나를 뚫고 지나갔네 푸른 언덕과 우리 속에 잠든 양떼와 광장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내 몸을 통과했네 내 몸에서 핏줄기가 흘러 나왔네 핏자국이 바닥을 물들이는 동안 차디찬 바닥이 나를 끌어 당겼네. 바닥에 드러누운 내 그림자가 어둠을 애무했네 어둠이 눈동자에 복사되었네 슬픔이 블랙으로 현상되었네 나, 그때 모든 도.. 2024. 1. 20.
이승악*/ 강영은 이승악*/ 강영은 ​ ​ 공동묘지 지나 닭 모가지 비트는 토종닭집 지나 벼슬 없는 닭처럼 이승에 든다. ​ 삼나무 팽나무, 새덕이, 죽나무, 생달나무, 참식나무, 꽝꽝나무, 산딸나무, 산뽕나무, 굴거리나무, 사스레피나무, 개서어나무, 개섬벚나무, 윤노리나무, 터널을 이룬 숲속에서 ​ 이름 없는 산새처럼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건너간다. ​ 제주 산수국, 보라빛 꽃망울 들인 허파꽈리가 부푸는데 이승에서 이승을 맛보고 싶은 여러 겹의 육신들, 저승을 다녀온 것처럼 왁자지껄 다가온다. ​ 이승에서 이승이 보이지 않는다고, 투덜대며 다가온다. 혼자 걸으니 무섭지 않나요? 탁탁거리는 스틱들, 배낭 없는 나를 무거워한다. ​ 살쾡이 한 마리, 키 낮춰 숲길 건넌다. 마음을 할퀴고 가는 생각이 이승이라면, 세상 같은.. 2024. 1. 20.
비자연화를 소멸시키는 태초의 언어/염선옥 비자연화를 소멸시키는 태초의 언어/염선옥 ​ 강영은의 시가 우리 삶에 울림을 주는 것은 그의 시적 상상력이 현실과 삶에 유의미한 충격과 감동을 끊임없이 선사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자연 속에서, 우리의 안과 밖에서, 존재의 근원을 파고 들어가 원초적 언어로 교감하며 위로를 주고받는 마술적 관여를 수행한다. 현대는 곱자의 세계다. 나무나 쇠를 가지고 90도 각도로 만든 ‘ㄱ’ 모양의 자(ruler)를 이용해 목수와 건축가들은 도시를 혈구(絜矩)한다. 시인은 비록 우리가 네모반듯한 측량의 세계에 살면서 자주 유용(有用)의 언어를 발음하지만, 그것으로 존재의 고독과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고 사유한다. 우주의 고향인 자연으로 회귀하는 ‘귀거래’를 택함으로써 위로와 치유를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침묵에 가까운 .. 2023. 11.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