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445 김경미 시인의 문학이야기 김경미 시인의 문학이야기 2021-11-23 현관문을 여는 두 개의 방식 -강영은 쇠 자물쇠와 도어 록, 여는 순서가 틀리면 잠겨버리는 두 개의 자물쇠가 있다 미로와 활로 사이 간절히 기다려 온 손이 있음에도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혼재해 있는 열쇠는 자물쇠를 쉽게 내주지 않는다. 어떤 날은 숫자가 자물쇠를 내어주지 않는다 감성과 감각이 엇갈린 숫자는 기억나지 않는 첫사랑처럼 거리를 헤맨다 열쇠가 되기 위해 살아온 고집 때문일까 부르짖고 갈마된 마음이 노크할수록 열쇠가 되고 싶어진다 누군가 몸을 만지면 겁이 덜컥, 난다는 집의 안부를 묻고 싶어진다 문 안쪽이 궁금해질수록 열쇠를 어머니로 바꾸고 싶어진다 세상의 어머니들은 얼마나 쉽게 현관문을 여는가, 잊히지 않는, 잊고 싶지 않은 열쇠 , 아무렇지 않.. 2022. 3. 31. 사구(沙丘) 이야기 사구(沙丘) 이야기/ 강영은 바닷가 폐가를 지나다 쪽잠 자는 여인을 보았다 파도의 칭얼거림을 받아주는 모습이 실퇴*에 웅크린 나무쩍지 같았다 도끼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축축이 젖은 몸맨두리엔 파도가 부려놓은 물결무늬가 어룽져 있었다 여인의 길고 가느다란 머리카락은 해초처럼 풀어져 모나고 날카로운 돌을 몸것인 양 끌어안고 있었다 낡은 햇살이 맹세의 서약으로 주고받았던 금가락지처럼 여인의 손가락에 걸려 있었다 집터서리 너머 지척을 달구던 물결 소리가 별안간 놀라 따끔하게 울리는 목담을 부수며 바다로 갔다 여인의 목구멍에선 흐느끼는 파도 소리가 새어나왔다 파도는 자꾸 모래 알갱이들을 뱉어냈다 물금 너머 어두운 물결이 마득사리**처럼 밀려오고 밀려갔다 부서진 마음이 묵돗줄되어 물이랑을 나르는 걸까, .. 2022. 3. 31. 은행나무 서사 e Tree Of Life * /강영은 태어나기 전부터 나는 당신의 딸이었습니다. 가을날, 은행잎이 떨어지는 것처럼 그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습니다. 은행잎이 금화가 되는 일처럼 비현실적이기도 했습니다. 내가 나를 기록하기 전이어서 은행에 맡겨둔 백지수표처럼 사랑이 존재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은행잎으론 아무것도 살 수 없었지만, 당신의 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배가 불렀습니다. 굶주림은 죄가 아니었습니다. 몸 안에 피가 맴돌던 그때, 바람의 노래를 허밍으로 따라부르던 그때, 당신은 깨어지지 않는 놋그릇에 우주를 담아주었습니다. 새벽 별로 땅의 기초를 놓던 유일신 같았습니다.‘같다’보다 가까운 거리를 지닌 나는 순종의 나무였습니다. 내가 놓인 장소는 자발적 선택인가, 피동의 속삭임은 오로지 당신의 영역이어서 풍경.. 2022. 3. 31. 블로거 블로거/ 강영은 그는 걷는 자, 생각 속으로 걸어 들어가 자신을 방목한다 밤눈 어두운 말을 타고 본 적 없는 이웃을 만나기도 한다 고독은 그의 반려감정, 벌레 먹은 밤이 나무에서 떨어질 때 외따른 곳에 다다른 그의 표정은 외로운 벌레, 상처를 드러내고 상처를 봉합하고, 부화된 외로움은 정지된 허공을 열어 도착하지 않는 어제의 풍경을 불러오거나 미리 온 내일을 풀어놓는다 새가 들어 있는 그림엽서처럼 지구 바깥으로 안부를 날려 보내기도 한다 그의 발자국을 따라가 보면 꽃과 나비와 그들을 키운 숲이 들어 있다 어떤 숲이 좋니, 그는 별빛에 질문 한다 그의 목록에 첨가된 별의 선택은 그가 죽은 뒤에야 확인되는 것, 몇억 광년 지나야 들을 수 있는 대답이어서 경계 없는 지경의 나무들은 늘 별빛에 목을 매단다 전.. 2022. 3. 18. 살려고, 살아내려고 [신동욱 앵커의 시선] 살려고, 살아내려고 [신동욱 앵커의 시선] 2022, 03, 04, TV 조선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사랑은 원래 아픈 건데 김광석은 왜 사랑이 아니라고 탄식했을까요. 또 이런 노래도 있습니다.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을 난 난 잊을 테요…" 상처받는 게 두려워 다가가지 못하는 사랑을 심리학에서 '고슴도치 딜레마' 라고 합니다. 고슴도치들은 날씨가 추워지면 한 데 모여 체온을 나눕니다. 하지만 가시에 찔리기 때문에 어느 선 이상은 가까이 가지 못합니다. 키에르케고르도 말했지요. "현대인은 북풍한설 동토에 버려진 한 마리 가시 돋친 고슴도치"라고… 세 해째 코로나의 광풍 속에 선 우리의 처지가 그렇습니다. 이제 봄이 오기에 더 비극적인 심사를 시인이 노래합니다. "꽃보라 날리듯 비.. 2022. 3. 6. 디스토피아 dystopia 영화 '오징어 게임'의 한 장면 디스토피아 dystopia/강영은 두족류도 고통을 느낀다 오징어나 게를 삶을 때 통각 신경을 마비시켜 죽인 다음 삶아야 한다 오징어를 삶으려는데 티브이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듣는다들고 있던 오징어가 끓는 물 속으로 빠진다 앗 뜨거! 평소에는 듣지 못했던 오징어의 비명이 냄비 속에서 요동친다 온몸이 데인 것처럼 육신 밖으로 육성이 흘러넘친다 지옥이다수족이 오그라들고 몸통이 찌그러든 모양이 드라마 ‘지옥’에서 보았던 지옥의 모습이다 여긴 인간이 세계라고하느님도 부처님도 개입할 수 없는 감정의 세계라고 육신을 지옥으로 내모는 사람들, 그들이 휘두르는 몽둥이가 열탕이었다 구체적인 대상이 없어 불안했던 몽둥이는 호모사피엔스의 도구먹고 살기 위해 짐승을 때려잡던 도구였지만인간의.. 2022. 2. 24. 눈물 병(甁) 눈물 병(甁)/강영은 고대 이스라엘에는 눈물을 받아주는 병(甁)이 있었다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병이었다 울 일이 있으면 꼭 챙겨야 했고 간직한 사람이 죽으면 함께 묻어야 했던 그 병이 발굴됐다는 소식은 전해지지 않지만손수건으로, 부의금으로 진화했다는 가담항설이 있는 것을 보면 눈에서 병으로 주소지를 옮긴 눈물은 사물이거나 자본이었는지 모른다 눈물이 병에 담길 때마다 어떻게 다른 삶을 살았는지 눈물의 평생을 연구한 학자도 눈물의 색깔로 마음을 물들인 염색가도 눈물에 비치는 무늬를 짜 넣은 직공도 아니었지만 흘린 눈물을 모아 소중히 보관했던 나는 축축이 젖은 가죽 속에서 죽은 자가 흘린 울음을 꺼내들거나 짐승의 울음소리를 듣기도 했던 것인데눈물은 지상의 모든 입을 얼어붙게 만드는 최고의 창검, 어떤.. 2022. 2. 24. 산수국 통신 산수국 통신/강영은 길고 좁다란 땅을 가진 옆집에서 길고 좁다란 닭 울음소리가 건너옵니다. 길고 좁다란 돌담이 젖습니다. 길고좁다란 돌담을 꽃피우고 싶어졌습니다. 길고 좁다란 돌담 속에서 길고 좁다란 뱀을 꺼냈습니다. 길고 좁다란 목에게 길고 좁다란 뱀을 먹였습니다. 길고 좁다란 목을가진 닭울음소리가 그쳤습니다. 비 오는 북쪽이 닭울음소리를 훔쳤겠지요. 길고 좁다란 형용사만 그대 곁에 남았겠지요. 비 개어 청보라 빛 산수국 한 그루 피었습니다. 그대에게 나는 산수국 피는 남쪽이고 싶었습니다. 『월간문학』 2016년 6월호 2022. 2. 24. 투케(tuche)*에 대한 소고(小考 투케(tuche)*에 대한 소고(小考)/ 강영은 바나나를 입에 물고 계단을 오른다 계단을 오르는 건 몸에 좋지 등이 꼿꼿하게 펴지거든 헤엄쳐온 생각을 혀로 핥는데 입속으로 사라지는 아, 바나나긴장도 희열도 없는 바나나를 씹으며 바나나에 닿는다 슬픔 따위와 이별하듯 씹혀주는 바나나 즙액도 씨앗도 없는 열매의 거만함을 생각하다가종족에게서 멀리 떠나온 외로움에 닿는다 갓 태어난 무덤 같은아, 바나나철학자처럼 게걸스러운 날들과 헤어진 바나나 껍질은 이빨에 좋다이빨에 묻은 얼룩을 하얗게 닦아 준다 죽음 뒤엔 무엇이 남는지 말하지 않는 바나나껍질만 남은 계단을 오른다 우연히 식탁에 놓여 있던 아, 바나나 *실재와의 만남을 뜻하는 우연 『웹진광장』 2017년 6월호 ---------------------.. 2022. 2. 24. 별똥별 별똥별/강영은 한 번의 입맞춤이 나의 새로운 미래를 결정했다-살바도르 달리 얼굴을 들어 올려 첫 키스를 만든다 나는 손목을 들어 올려 죽은 사람의 머리칼이 자란다는 돌을 만진다 길섶에 나뒹구는 두 개의 돌덩이가 부딪힌다탄생하는 찰나의 별부서질 것 같아, 간절하고 격렬한 입술을 지닌 두 개의 돌이 말을 더듬는 동안 목덜미를 뚫고 나간 소름은 별이 된다 바닥에서 보는 별이란 얼마나 아름답고 단단한 흉기이냐 털이 하얗고 눈매가 선한 별을 찾는 것이 너의 미래라면 너는 양치기처럼 어둡고 환한 밤하늘을 가진 것이다 산 너머로 사라지는 부싯돌을 켰다 내일이면 흘러내릴 그 날의 별빛으로 찰나의 빛이 새기고 간 흉터를 지웠다 『예술가』 2015년 봄호 2022. 2. 24. 음치 음치(音癡)/강영은 야영지 한구석에 놓인 노래방 기계가 유행가 가락을 뽑아냅니다. 제 몸이 기계인 것도 모른 채 구곡양장의 음절을 넘는 노래 소리가 밤 강물입니다. 저장된 물결이 강물을 밀고 간다는 걸, 저, 쇳덩어리도 아는 걸 까요, 구겨졌다 펴지는 곡조가 물고기비늘 같아 미늘을 문 마음이 서러워집니다. '어제는 울었지만 오늘은 당신 땜에, 내일은 행복할거야'* 출렁거리는 기계음 속으로 달빛도 동전만한 혓바닥을 집어넣습니다. 악보 없는 허공을 바루는 동안 목젖이 아파 옵니다. 귀의 절벽에 매달린 바보여서가 아닙니다. 울고 웃는 입술이 내 마음 어딘가에 있는 까닭입니다. 가느다란 음절에 입을 여는 돌멩이도 비탈에 목젖을 묻은 소나무도 저마다 소리 내고 싶은 저녁이어서 흐르는 노래에 저당 잡힌.. 2022. 2. 24. 슈퍼문super moon 슈퍼문super moon/강영은 시체 위에는 고추밭과 수박밭이 있었는데 개는 안 짖었습니까, 손과 발이 이유 없이 고개를 돌릴 때 달이 떠올랐다. 하반신이 날씬한 에볼라가 검은 대륙을 껴안을 때 달이 떠올랐다. 합삭이 될 때까지 지속되는 혼돈, 위성 같은 연인들이 바이러스를 퍼트릴 때 달이 떠올랐다. 사람의 옷을 입은 늑대들이 말라붙은 대지의 젖가슴을 빨 때 달이 떠올랐다. 별이 반짝이는 저쪽에서 달은 무슨 의미입니까, 의미와 무의미 사이 지구의 무릎 안쪽으로 커다란 자지가 들어왔다. 초록의, 눈부신 음부를 향해 지구의 흉곽이 부풀었다. 삭망이 될 때까지 지속되는 폭력,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 밤 달이 떠올랐다. 또 다른 위성을 지닌 것처럼 포기할 수 없는 달빛이 차올랐다. .. 2022. 2. 24. 이전 1 2 3 4 5 6 7 8 ··· 3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