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445 슬픔의 미각 슬픔의 미각/강영은 오늘 밤, 나무는 유정하게 부풀어 크고 흰 빵이다 두 사람이 먹다가 한 사람이 죽어도 모를 빵이 된 것처럼 죽음의 달콤한 풍미마저 풍긴다 나무를 집어 삼키는 허공의, 저토록 깊은 허기가 이별을 나누는 이 별의 방식이라면 채워지지 않는 나의 허기는 빵을 굽는 일, 화장터의 연 기처럼 새어나오는 빵 냄새를 맡으며 이 별에서 한 발짝 멀어지는 이별을 배부르게 먹는 일 일 것이다 유리창의 미각이 딱딱하게 굳은 밤의 풍경을 꺼내어 먹는 동안, 하얀 덩어리가 부풀어 오 른다 뜨거운 빵틀에서 구워지는 빵, 잘 익은 슬픔 속으로 허기를 밀어 넣는 이 모반을 무엇 이라 불러야 하나 모양도 빛도 없는 어둠 속으로 불쑥불쑥 미각이 찾아오고 슬픔을 모르는 나라에 다다른 이 파리처럼 새가 떠나간 나무를 새로.. 2020. 12. 16. 장미 탁본 장미 탁본/강영은 고양이 발자국이 골목을 돌아나가며 꽃잎을 흩날린다. 붉은 꽃잎은 태양의 혈족, 꽃잎 무늬를 판각한 저녁이 흐릿해진다. 쓰레기통 속에는 장미꽃다발, 헤어진 애인이 목이 꺾인 채 놓여 있다. 장미봉오리는 갓 출하된 립스틱, 쏟아낸 향기는 지워지지 않는다. 버려진 애인은 말이 없는 게 정석이죠, 그러니 당신, 분홍 우산이 범람하는 골목길에 묶 음묶음, 애인들을 내버리세요, 색소침착증 앓는 입술이 가시를 내뱉는다. 여자는 몇 번이나 가시에 찔렀을까, 장미의 내면을 탐색하다 보면 까무러쳐 죽은 건 처녀 성, 혹은 남아있는 풍경이다. 어제의 구름이 넝쿨 없이 퍼져나간다. 느린 걸음으로 오후를 횡단한 그리움에도 꽃과 가시 가 대립하는 국면이 있다는 뜻 일게다. 쓰레기통 속이 잠시 환해진다. 장미가 .. 2020. 12. 16. 자연주의자(自然主義者 자연주의자(自然主義者)/강영은 나를 꽃이라 부를 때마다 나는 너에게 코스모스를 보여줬네 이것 봐, 밀려가고 밀려오는 모습이 별 같지 않니? 어느 먼 바닷가ㅇ에서 아름답고 반복적인 물결 들추어내는 별빛을 보듯 나는 너에게 방향을 편애치 않는 꽃을 내밀었네 피고 지는 일이 별의 운행이라면 푸른 별빛에 너를 파묻는 일은 너를 잃는 일, 나를 꽃이라 부를 때마다 나는 너에게 피기 시작한 우주를 보여 주었네 이것 봐, 떨어지는 꽃잎이 별 같지 않니? 너는 없고 내가 보낸 우주는 광활하고 끝이 보이지 않네 『시와 소금』 2020년 가을호,부분 수정 2020. 10. 7. 투케(tuche)에 대한 소고(小考) 투케(tuche)에 대한 소고(小考)/강영은 바나나를 입에 물고 계단을 오른다 계단을 오르는 건 몸에 좋지 등이 꼿꼿하게 펴지거든 헤엄쳐온 생각을 혀로 핥는데 입속으로 사라지는 아, 바나나 긴장도 희열도 없는 바나나를 씹으며 바나나에 닿는다 슬픔 따위와 이별하듯 씹혀주는 바나나 즙액도 씨앗도 없는 열매의 거만함을 생각하다가 종족에게서 멀리 떠나온 외로움에 닿는다 갓 태어난 무덤 같은 아, 바나나 철학자처럼 게걸스러운 날들과 헤어진 바나나 껍질은 이빨에 좋다 이빨에 묻은 얼룩을 하얗게 닦아 준다 죽음 뒤엔 무엇이 남는지 말하지 않는 바나나 껍질만 남은 계단을 오른다 우연히 식탁에 놓여 있던 아, 바나나 --------------------------------------------------- 우연한 .. 2020. 10. 7. 阿Q의 시 읽기 (41) 阿Q의 시 읽기 (41) 도연명의 귀거래사 "천명을 즐길뿐 무엇을 의심하리" 글: 김태완 기자 중국의 시인 도연명 귀거래사 도연명 정원을 날로 거닐며 아취를 이루어가고 문은 달아놓았지만 늘 닫혀 있노라 지팡이에 늙은 몸 의지하여 거닐다가 쉬며 때로 고개 들어 멀리 바라보니구름은 무심히 산골짝 굴헝에서 솟아나오고 새는 날다 지치면 다시 돌아올 줄 아는 도다일광은 뉘엿뉘엿 장차 어두워지는데 외로운 소나무 어루만지며 주저주저 하는도다 돌아와야지 모든 사귐 그쳐 어울리지 않으리라 가리라! 돌아가고파 돌아 왔는데 다시 무슨 미련을 두랴!세상과 내가 가는 길 다르니 어찌 다시 벼슬길 구하겠는가 친척들과의 정겨운 대화를 기뻐하고 금서를 즐기며 시름을 삭이노라 농부 와서 봄이 왔음을 알리니 이제 서편의 밭에 할 일이.. 2020. 10. 7. 깊은 우물 깊은 우물/강영은 테린쿠유*는 입구가 좁고 낮은 문장, 무릎걸음으로 걸어야 읽을 수 있네 땅속으로 이어진 수천 개의 단락을 읽으려면 내 몸이 글자가 되어야 하네 돌로 통로를 막아버리면 단 한 명의 천사도 들어 올 수 없는 캄캄한 구절에 깜짝 놀란 나는 어두운 숲이 되기도 하네 ‘이 거친 숲이 얼마나 가혹하며 완강했는지 얼마나 말하기 힘든 일인가’** 어둠에 가로막힌 나는 돌벽이 파고 들어간 문장을 개미들의 교회, 개미들의 학교, 개미들의 공동 부엌, 개미들의 회의 장소, 개미들의 마구간과 포도주 제조 구역까지 있는 구문으로 오독하네 잘못 읽은 문장은 내게 지옥 같아서 이 지옥 속에서 어떻게 살까, 살 수 있을까, 더듬더듬 돌벽을 더듬는 생각이 깊이를 파네 내가 아는 건 보이지 않는 깊이에 우.. 2020. 7. 9. 경계도시 경계도시/강영은 언제부턴가 왼쪽이 아프다 기침을 하면 왼쪽 가슴이 쿨럭이고 고개 돌리면 왼쪽 등허리가 땡긴다 어떤 권력이 점거했는지 어떤 부조리가 관여했는지 미세먼지 같은 대답을 듣는 날에는 목줄기까지 뻣뻣하다 내 몸의 기득권자는 누군가요, 내가 아닌가요, 당귀즙을 앞에 놓고 외쳐 보아도 단단한 근육질에 묶인 도시는 오른쪽으로 돌아서지 못한다 어쩜 여기는 잘 드는 날로 다듬어진 인형들의 도시일지 몰라. 선반 위에 놓인 목각인형처럼 사지를 내려놓고 빙그르르 돈다 누가 총을 들이댄 것도 아닌데 네, 네, 그렇군요. 유리벽에 박힌 나를 보려고 선 채로 돈다 움직이는 벽에게 애걸하듯 산 채로 돈다 고통의 계단을 높이는 건 누구일까, 계단 위에 놓인 목에 붕대를 감고 계단 아래까지 내려간다 어느 쪽에도 유리한 증.. 2020. 5. 28.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강영은 키스할 때 코는 어디다 두죠? 당신의 입술이 코의 행방을 물어 왔을 때 봄이 왔다 꽃 보라 날리듯 비말(飛沫)뿜는 봄의 숨결은 뜨겁기만 한데 마스크 속에 숨은 코는 찬피동물처럼 살려고, 살아내려고 몸부림친다 괜찮아요, 당신? 당신의 안부를 발로 찬다 사랑의 얼굴을 내면에 숨긴 발길질은 보노보식 인사 그럴 때 당신의 코는 너무나 멀리 있다 내가 모르는 대륙에 있는 것 같다 몇 개의 대륙을 건너야 입술에 닿나 절정에 목숨 건 꽃나무처럼 사랑은 죽음을 만발하게 피워내는데 꽃향기 날리는 봄날의 키스는 오리무중 코의 행방을 찾기까지 당신도 나도 마스크를 벗지 못 한다 . *마그리뜨 의 그림 제목. 원제 '이미지의 변용' 웹진『시인광장』 2020년 5월호 마그리뜨 의 그.. 2020. 5. 28. 나의 삶 나의 시- 오래 남는 눈 36:08 (시인과의 만남) 강영은 시인 2편- 나의 삶 나의 시- 오래 남는 눈주병율의문학TV _cine-poem 2020. 2. 5. 시의플랫폼 - 그물과 종달새 시의플랫폼 - 그물과 종달새 그물과 종달새 / 강영은그물에 걸린 종달새를 본 적 있니?나는, 그 종달새와 그물 앞에 허공을 놓아 주겠다바람과 햇살이 들락거리며 동아줄이 지닌 감옥을 비워 내리라내 입술은 그물을 찢은 칼처럼 흐느끼리라종달새에게는 종달새의 자유를, 나에게는 종달새의 하늘을 달라종달새가 모든 노래를 풀어 놓으리라종달새가 모든 노래를 풀어 놓으리라.................................................................................모든 종달새는 그물에 걸리기 가장 적합하게 날아다닌다. 이것은 세상에 그물과 종달새가 존재할 때의 얘기다. 세상의 모든 그물은 종달새를 잡기 위해 존재한다면, 세상은 종달새와 그물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이 .. 2020. 2. 5. 나의 삶 나의 시 -저녁과의 연애 47:42 (시인과의 만남) 강영은 시인(1편) -나의 삶 나의 시 -저녁과의 연애- 주병율의문학TV _cine-poem 2020. 2. 5. 눈물의 이면/ 눈물의 이면/강영은 눈물은 어디서 태어나나 당신 눈 속에 괴어있다 꽃으로 피어나나 당신 입속에 잠겨 있다 혀로 돋아나나 뺨 위를 흐르는 꽃과 혀가 있어 어떤 날의 나는 오목렌즈 어떤 날의 나는 볼록렌즈 햇빛과 빗방울도 투명 렌즈를 낀 눈이어서제 맘대로 부풀거나 졸아든 돌덩이.. 2020. 1. 16. 이전 1 ··· 4 5 6 7 8 9 10 ··· 3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