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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과 바닥의 연계성에 대한 고찰/강영은 지붕과 바닥의 연계성에 대한 고찰/강영은 -나의 태양이 밤에도 빛날 수 있다면 색채에 물들어 잠자겠네-샤갈 도시 위에서* 나, 지붕 위로 한 발을 내디뎠네 한 순간 지붕이 환해졌네 발은 가깝고 지붕은 멀었네 허공이 붕 뜨고 지붕이 꺼졌네 길이 사라졌네 지상에 포물선이 사라졌네 더 이상 사라질 것이 없었네 청람 빛 스커트가 펄럭이며 날았네. 몸뚱이를 벗어던지고 어디론가 한없이 날아갔네 성당의 종탑이 나를 뚫고 지나갔네 푸른 언덕과 우리 속에 잠든 양떼와 광장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내 몸을 통과했네 내 몸에서 핏줄기가 흘러 나왔네 핏자국이 바닥을 물들이는 동안 차디찬 바닥이 나를 끌어 당겼네. 바닥에 드러누운 내 그림자가 어둠을 애무했네 어둠이 눈동자에 복사되었네 슬픔이 블랙으로 현상되었네 나, 그때 모든 도.. 2024. 1. 20.
이승악*/ 강영은 이승악*/ 강영은 ​ ​ 공동묘지 지나 닭 모가지 비트는 토종닭집 지나 벼슬 없는 닭처럼 이승에 든다. ​ 삼나무 팽나무, 새덕이, 죽나무, 생달나무, 참식나무, 꽝꽝나무, 산딸나무, 산뽕나무, 굴거리나무, 사스레피나무, 개서어나무, 개섬벚나무, 윤노리나무, 터널을 이룬 숲속에서 ​ 이름 없는 산새처럼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건너간다. ​ 제주 산수국, 보라빛 꽃망울 들인 허파꽈리가 부푸는데 이승에서 이승을 맛보고 싶은 여러 겹의 육신들, 저승을 다녀온 것처럼 왁자지껄 다가온다. ​ 이승에서 이승이 보이지 않는다고, 투덜대며 다가온다. 혼자 걸으니 무섭지 않나요? 탁탁거리는 스틱들, 배낭 없는 나를 무거워한다. ​ 살쾡이 한 마리, 키 낮춰 숲길 건넌다. 마음을 할퀴고 가는 생각이 이승이라면, 세상 같은.. 2024. 1. 20.
비자연화를 소멸시키는 태초의 언어/염선옥 비자연화를 소멸시키는 태초의 언어/염선옥 ​ 강영은의 시가 우리 삶에 울림을 주는 것은 그의 시적 상상력이 현실과 삶에 유의미한 충격과 감동을 끊임없이 선사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자연 속에서, 우리의 안과 밖에서, 존재의 근원을 파고 들어가 원초적 언어로 교감하며 위로를 주고받는 마술적 관여를 수행한다. 현대는 곱자의 세계다. 나무나 쇠를 가지고 90도 각도로 만든 ‘ㄱ’ 모양의 자(ruler)를 이용해 목수와 건축가들은 도시를 혈구(絜矩)한다. 시인은 비록 우리가 네모반듯한 측량의 세계에 살면서 자주 유용(有用)의 언어를 발음하지만, 그것으로 존재의 고독과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고 사유한다. 우주의 고향인 자연으로 회귀하는 ‘귀거래’를 택함으로써 위로와 치유를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침묵에 가까운 .. 2023. 11. 25.
시간의 나비/강영은 시간의 나비/강영은 ​​ ​ 말랑말랑한 젤리를 먹을 때처럼 슬픔을 아껴먹던 소녀를 기억한다. 눈가엔 흐느낌이 번져 있었지만, 젤리 껍질을 벗긴 것처럼 빛나던 눈빛 산사(山寺)의 종소리가 내려와 오후 네 시의 마음에 울릴 때까지,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입속말 되뇌이던 소녀를 기억한다. 소녀의 슬픔을 기억할 필요는 없다. 소녀의 머리칼에 앉아 있던 분홍 리본이 시간의 나비처럼 날아왔으므로 기억이 저 혼자, 날개를 접은 나비처럼 시간을 접어보는 것이다. 실밥이 너덜너덜해진 리본처럼 나는 자주 울고 자꾸 실패하지만, 분홍으로 물드는 저녁이 되면 시간 속에 사라진 소녀를 불러온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흰 무명 커튼이 펄럭이는 어두운 창가에서 내 가 왜 울었는지는 중요하지가 않다. ​ ​ ​ ​ 『시와.. 2023. 11. 25.
말테우리/강영은 말테우리/강영은 ​ 말을 방목하는 아침에는 홍옥을 먹고 말을 거두는 저녁에는 황금향을 먹는다. 내가 아는 초원의 빛깔이 다르다는 말, 침묵이 밴 초원에선 과일 익는 냄새가 난다. 풀어 놓은 말들이 울타리를 뛰어넘을까 봐, 재갈 물린 말 속엔 참새들이 드나든다. 말을 돌보는 건 나의 사명. 나의 분복, 재잘재잘 종일 지껄이며 입 다문 나를 흉내 낸다. ​ 탱자처럼 입이 굳어질까 봐, 가시넝쿨 우거진 길과 돌짝밭을 달린다. 마른풀 태우는 바람의 채찍, 말은 말을 버린 짐승처럼 사납게 날뛴다. 영혼의 몸처럼 말랑해진 말을 마구간 안으로 몰아넣는다. 졸음에 지친 말의 등허리를 감싸 안으면 털이 보송한 말잔등에 젖어드는 슬픔, 내가 키우는 말의 근육이 팽팽해진다. 별도 달도 뜨지 않는 밤, 말 중의 말, 고독이 .. 2023. 11. 25.
지슬 지슬/강영은  나는 드디어 말상대를 고안해냈다​거기 누구 없소? 소리칠 때 누구도 들을 수 없는 나밖에 들을 수 없는 목소리를 만들어냈다​내 귀의 바깥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내가 섬일 때날다가 지친 갈매기들이 섬에 집중할 때​갈참나무 잎사귀처럼 침몰하는 귀가 저절로 닿는 심연, 그 아득한 깊이에서 들려오는 존재의 목소리​그것이 설령, 내 몸의 줄기에서 뻗어나간 것일지라도놀란 흙 밖으로 튀어나온 그것을 나는 지슬*이라 불렀다​그럴 때 나는 불타오르는 산이고 쏟아지는 빗줄기이고 숲을 뒤덮는 바람이고 계곡에 넘쳐 흐르는 물 나는 드디어 나의 고독과 대화하는 나를 가지게 되었다​나의 예언은 어디에서 오는지 나의 방언은 어디에서 유래했는지마침내 감옥이고 차가운 별이 되고 마는 ​나의 독백을 대화체로 바꾸어주.. 2023. 9. 20.
본질로 뻗어나가는 가지 [현대시가 선장한 이달의 시인/ 작품론] 본질로 뻗어나가는 가지 /김진석 1. 누군가의 등을 보며 망설여 본 사람이라면 이해할 것이다. 명치쯤에 뭉쳐있던 한 사람의 이름이 목을 타고 올라오다 턱에서 막혀버리는 듯한 느낌을. 뱉을 수도 삼킬 수도 없는 단어가 입 안에서 난기류처럼 맴돌 듯 느껴지는 감각을. 부유하던 기의가 단단한 음절로 정제되는 순간, 가볍게 휘발되어 흩날리는 뒤편의 의도들에 대해서 말이다. ​ 고작 이름 하나를 부를 뿐인데 양 갈래로 갈라지는 마음을 앞에 두고 주춤거리다 호명이 숙명인 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물에 어떤 비의(秘義)가, 하이데거식으로 존재가 스치는 찰나 이를 향해 손을 뻗어서, 마침내 형형한 빛을 내는 의도를 손아귀에 쥐었다고 확신하고는, 무형의 신비를 온전히 담아내고자.. 2023. 9. 20.
숲/강영은    너는 한 번도 나를 마중 나오지 않는다. 등을 돌리거나 달아나지도 않는다. 나의 기분을 판단하거나 분석하지도 않는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 대로 생각의 숲을 이룰 뿐, 너는 나를 간섭하지 않는다. 빗소리에 잠겨 걸을 때도 낙엽 진 길을 밞고 간 사람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만목(蔓木)의 자세를 꿈꾸기 때문일까, 칡넝쿨처럼 엉켜있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바람 부는 세상이 온통 굽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아아, 풀리지 않는 의문이 키 큰 교목을 죽이고 그렇게 너를 의지하다 보면, 관목에 걸려 바둥대는 새처럼 나도 울게 되는 것일까,   너는 수만 마리 물고기 떼를 이끌고 온다. 쏴아. 쏴아이~, 적도(赤道)의 결계를 바꾸는 물결 소리로 윤슬에 빛나는 바다를 뒤집는다.. 2023. 9. 7.
간격 간격/강영은   적금을 해약하고 근처 식당에서 월남쌈을 먹는다. 피망과 오이처럼 당신과 마주 앉아 느끼는 입맛은 미완성의 재료보다 높은 가성비(價性比),  침묵과 침묵 사이에 놓여있는 포크를 들었을 때 살아있거나 죽어있는 구간이 시작된 것처럼 당신은 자꾸 콧물을 훌쩍이고 돌기 돋은 혀는 쓰디 쓴 미각을 꺼낸다. ​ 당신은 얼마나 먼 거리에 놓여있는 포크인가,​ 포크 든 오른손이 테이블 아래로 떨어질 때 창자 속으로 떨어진 것은 재료들의 삶도 죽음도 아니었다. 식용 꽃봉오리에 얹혀있는 내 눈이었다.   그때 나는 먹이사슬에 매달린 짐승처럼 휴지를 꺼내 조심조심 눈을 닦았지. 손의 관습도 습관도 아닌, 포크에 묻어 있는 공포를 지우는 일이었지.  바닥에 눕힐 때마다 당신은 죽여 준다고 말했지. 생의 절정을 .. 2023. 9. 5.
책장冊張, 낱낱이 펼쳐진 밤의 숲 책장冊張, 낱낱이 펼쳐진 밤의 숲/ 강영은 ​ 시인의 나라는 중립국이다. 아군 적군이 없다. 은유(隱喩)로 빚은 밤의 숲처럼 꽃을 꽃이라 말하지 않고 벌레를 벌레로 보지 않는다. 신(神)을 높이거나 짐승을 업신여기지 않는다. 가지 끝, 허공을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지 않는다. 나무가 되기 이전의 형상들 숲을 채우는 온갖 기호들 너와 내가 약속하기 전까지 몰랐던 상징들 말똥이 뒤섞인 지뢰밭에서 처음 죽은 병사처럼 소모전을 치른다. 죽은 자들만이 장벽을 넘어간다. ​ 아무도 거할 수 없고 누구도 살 수 없는 언어의 신전(神殿) 시인의 나라는 그 숲에 세워진다. 『현대시』 2021년 9월호 ​ 2023. 9. 5.
시간의 연대(連帶) 시간의 연대(連帶)/강영은 돌 위에 돌을 얹고 그 위에 또 돌을 얹어 궁극으로 치닫는 마음 마음 위에 마음을 얹고 그 위에 또 마음을 얹어 허공으로 치솟는 몸 돌탑은 알고 있었다 ​ 한 발 두 발 디딜 때마다 무너질 걸 알고 있었다 무너질까 두근거리는 나를 알고 있었다 그건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므로 ​ 조그만 돌멩이를 주워 마음의 맨 꼭대기에 올려놓았다 ​ 태어나기 전의 돌탑을 태어난 이후에도 기다렸다 ​ 한 곳에 머물러 오래 기다렸다 ​ 돌멩이가 자랄 때까지 돌탑이 될 때까지 ​ ​ 『현대시』 2022년 10월호 ‘현대시가 선정한 이달의 시인’ 에서 2023. 9. 5.
청춘의 완성 청춘의 완성/강영은 탁자 위에는 늘 물컵이 놓여 있었다 너는 왜 물만 마시니? 눈앞을 오가는 어항 속의 금붕어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너는 묻고 있었지만 물풀 사이 오버랩 되는 물의 눈동자, 일렁이는 네 눈동자는 작은 어항 같아서 숨을 헐떡이며 목마름을 이겨내던 나는 어항 속에 갇힌 금붕어였다 청춘은 고상하지도 비천하지도 않은 음악 같아, 지하의 음악다방에서 청춘을 소모하는 동안 금붕어와 나 사이 흐르는 건 베토벤도 슈벨트도 아니었다 “어머니, 내 삶은 이제 막 시작한 것 같은데 난 내 삶을 내팽개쳐 버린거에요” 보헤미안 랩소디*를 칼 복사하던 가슴이 무대이고 악기이던 그때, 너를 기다리는 시간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레코드판 위를 도는 바늘처럼 너를 기다렸던 것 같다 무수한 기다림과 스파링하는 동안 잃은 것.. 2023. 9.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