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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머의 단평

갈대는/이수익

by 너머의 새 2019. 6. 21.

갈대는/이수익

 

 

저 갈백색 물결이 부드럽게 일렁이고 있는 일은

 

겨울 햇살 아래서는 참으로 보기 드문 경이로움이다.

 

모두가 허무하게 무너져 내린, 척박한 1월의 변두리 지역에서

 

살아 있음을 저리도 분명하게 드러내어 주는, 그 상대적 일체감이

 

죽어 있는 물체들 사이에서 환히 빛을 낸다.

 

봄부터 가을까지 그들은 제 빛깔과 소리와 향기가 가득히 넘쳐나던 때,

 

그때는 당신도 나도 끝 모를 온통 푸르름에 젖어 있었는데

 

그래, 지내놓고 보면 겨울은 가장 황홀한 색깔만이 은근히도

 

어두운 제 무덤 속을 휘황하게 드러내어 주는 것.

 

보라, 저 갈대들 제 스스로 꺾이며 일어서는 힘과 저력을

 

나는 확고하게 믿나니, 오로지 갈대만이 이 겨울에 찬란한 부활이 되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습지濕地를 온통 갈백색으로 물들이고 있는

 

오오 눈부시게 피어나는 빛의 파장과 설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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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존재는 탈 존재와 합일되는 상대적 일체감 속에서 생명을 지속해나간다 삶과 죽음, 빛과 그림자, 정신과 육체, 허무와 실존, 상상과 현실, 상반되는 세계가 빚어내는 갈등 속에서 길항하는 존재는 '어두운 제 무덤 속을 휘황하게 드러내어 주는’ 거기서부터 윤회를 시작한다. 그것이 생명이며 본질적 삶의 형태라는 것을 시인의 예리한 눈이 밝혀낸다.

 

봄, 여름, 가을을 다 보내고 난 후에야 모습을 드러내는 갈대의 본색, ‘제 빛깔과 소리와 향기가 가득히 넘쳐나던 때’ ‘끝 모를 온통 푸르름에 젖어 있던 그때’는 알지 못 했던 생명의 환희가 구도의 미학 속에 찬연하다. 제 스스로 꺾이며 일어서야 하는 힘과 저력이야말로 인간이란 전 존재에 바쳐진 생명의지의 상징인 것, 척박한 삶의 풍토에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역설의 묘미가 역동적이다. 압축된 시어, 명민한 감각, 정갈한 이미지에 그려낸 시인의 메세지에 경의를 표한다.

 

’살아 있음을 저리도 분명하게 드러내어 주는, 그 상대적 일체감‘이야말로 갈 때, 갈 데를 찾는 존재들에게 ’눈부시게 피어나는 빛의 파장과 설렘‘이다. /2014 시인들이 뽑는 좋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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