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학교/ 김혜순
나는 유령학교에 근무한다
이 동네에선 유령된지 10년이 지나면 자동으로 제도권 유령이 된다
나는 신참 유령들에게 수업을 한다
(이 일 때문에 도무지 잠적이란 부가능하다)
우선 머리에 발을 올리고 발을 땅에 대지않고 걷는 연습
말해봤자 아무도 듣지 않고 설자리 누울 자리 없고
눈밭에 제 발자국이 남지 않아도 놀라지 않도록
공중에 떠서 잠드는 법을 연구한다
관속에서의 우울증 극복법이라든지
지하 시체보관실에서 더운 공기 내뿜지 않는 법
사막에게 잡혀가도 미라가 되지 않는 법이라든지 하는 것은
나도 모르지만 그냥 목청 터지는 대로 한다
시간공장 제조망원경이나 현미경 착용법 유체이탈법
잊혀진 영혼이 되거나 메아리가 되지 않아도 서러워하지 않는 법
불을 확질러버렸으면 하고 생각만 하는 법
폭죽이 밤하늘에 떠 있는 그 순간만큼은 환하게 당신에게 창궐하는 법
은 교과서를 참고하세요 그렇지만 교과서는 짓지 않는다
노래 속에 숨어 들어가 흐느끼는 법
흐느낌 속에 숨어들어가 숨을 막는 법
흐르는 사람들과 함께 흐르다가 나무처럼 하늘로 속속 박차오르는 법
금관에서 소리가 퍼져나가는 모습의 항법에 있어서
내 몸의 테두리를 지우는 법
그리하여 나날이 엷어지는 법
은 전해 내려오는 마술 속에 다 있어요
그러면서 덧붙여 말한다
앙갚음하는 유령은 하급
눈비 내리는 밤에만 출몰하는 유령은 중급
썩어서 파리만 피워올리는 유령은 상급
구름처럼 물음처럼 기체처럼 유령은 상상급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상상상급, 등등 기타
자 그럼 파리떼가 죽은 몸뚱어리에서 왼쪽 날개 먼저 꺼내듯
춘설처럼 창궐하는 유령연습 한번 해볼까요?
그러면서 숙제 안해오는 유령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유령학교 졸업하고 제도권 유령밖에 될 수 없다니, 쳇!
월간 『현대시』 2011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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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센은 전작(前作)인《인형의 집》(1879)이 결혼과 가정을 파괴하는 것이라는 사회적 비난에 대한 해답으로써 1881년 《유령》을 발표한다. ‘노라가 사회인습과 타협하여 집을 나가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유령》이라는 사회극(社會劇)을 통해, 허위에 찬 결혼 생활에서 파생된 비극의 실상을 보여준다. 사회에서 명성이 있던 아버지로부터 성병을 이어받아 파멸되어 가던 아들을 어머니가 약을 주어 죽게 한다는 내용은 유전 ·근친상간 ·안락사(安樂死) 등을 다룸으로써, 전작보다 더 철저하게 사회의 부패와 부도덕을 폭로한 문제작으로 평가되었다. 등장 인물들은 실존하는 육체를 지녔음에도 하나같이 “이름뿐이고 실제(實際)는 없는" 유령의 이미지다. 인간존재의 본질적 허구성을 파헤치는 상징적 존재로서의 유령을 그려낸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상징성은 유령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유령이란 무엇인가, "죽은 사람의 혼령(魂靈), 죽은 사람의 혼령이 생전의 모습으로 나타난 형상, 이름뿐이고 실제(實際)는 없는 것" 이라 되어 있다. 국어사전의 풀이다. 이러한 뜻풀이가 아니더라도 유령은 오랫동안 비가시적, 무 공간적인 형질을 지닌 비실체적 존재로 자리매김을 해왔다.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있을 수 있는 상징적 존재로써, 인간의 상상 속에 다양한 이미지로 자리해온 유령의 세계가 4차원의 세계라면,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그들의 이미지는 3차원의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불가해한 속성으로 인하여 공포심과 경외심을 동시에 일으킨다.
김혜순의 "유령학교"는 이러한 비가시적 세계를 현실로 끌어들임으로써 혼재하는 현상의 알레고리를 재미있게 보여준다. 학교라는 하나의 상징적 틀과 결합된 제도권의 폭력성 내지는 전형성에 대해 일침을 가하면서 ‘아무도 모르는 상상상급, 기타 등등’으로의 본래적 공간으로 이동코자 하는 소망을 보여준다. '이 기타 등등'의 영역은 제도권으로 표상되는 조건과 상황, 모순과 부조리의 암울한 현실이 아닌, 아무도 모르는 어느 공간에 속해 있다. 구름처럼 물음처럼 기체처럼, 우리가 상상해낼 수 있는 공간으로의 이동은 상상급의 세계이지만 상상상급으로 명명되어진 이 공간은 죽음마저 넘어선 어느 곳인지 모른다. 모든 본질을 향유하는, 영원불멸을 사수하는 그곳, 시의 기저에는 절망적인 세계인식이 자리하고 있지만, 그곳으로의 이탈 행로만이 진정한 유령이 되는 길임을 말하는 듯 하다.
개인적인 읽기이지만 유령을 시인으로 바꾸어 읽어본다. 시적 메타포에 충일한 시로 읽는 재미는 어떤 면에서 깊이를 더해준다. 김혜순 교수의 시작법, 교수법, 그리고 시인으로서의 고민등을 얼핏 감지해낼 수 있다. 수많은 시인들이 시인학교를 졸업하지만 제도권 시인 밖에 될 수 없는 이 시대, 진정한 시인이 되는 길이 무엇인가? 이 시가 함의하고 있는 깊이에 문득 숙연해진다./ 강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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