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마고의 항아리

배롱나무 自敍傳

by 너머의 새 2020. 1. 16.

 


배롱나무 自敍傳/강영은    

 

  배롱나무를 사랑했습니다. 배롱나무도 나를 사랑했습니다. 죽을 때까지 나를 위하여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온갖 새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아, 그러나 나는 희뿌연 달무리를 가느다란 팔뚝에 끼워줬을 뿐. 옷 한 벌 사주지 않았습니다. 밤 소나기가 창문을 두드리던 어느 날 배롱나무는 피거품 같은 꽃송이를 게워냈습니다. 신록이 우거진 계절이어서 붉은 비누방울처럼 꺼져가는 그것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가뭄 같은 불길한 관계 속에 마음을 담그기가 두려웠습니다. 유산되어버린 꽃송이들을 누이라고 말하기에는 용기가 부족한 탓이기도 했습니다. 마음과 몸이 소슬한 계절 껴안고 간지럼을 태우며 목마처럼 올라타기도 했던 배롱나무는 바싹 마른 가지가 되어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붉게 타오르는 일획을 너무 일찍 읽어버린 탓일까요, 죽음 앞에 불 밝힌 내 눈동자는 검게 그을린 잿더미밖에 볼 수 없었습니다. 한 가지에 나고도 가는 곳 모르니* 나는 누이에게 간다는 말도 다시 돋으라는 말도 하지 못 했습니다.

 

 누이여, 나는 나에게 다시 돌아오지도 못 했습니다. 

    *제망매가,『삼국유사』 권5 감통(感通)7 ‘월명사 도솔가조(月明師兜率歌條)’ 편




'마고의 항아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저녁과의 연애/  (0) 2022.02.24
눈물의 이면/  (0) 2020.01.16
이른 눈  (0) 2020.01.16
카자흐의 검독수리  (0) 2016.03.07
오늘의 구름같은   (0) 2016.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