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등 바다의 등31 흙잠 흙잠/강영은 얼었다 녹았다 하는 물자배기 속 빙점이 직립의 꽃대를 쓰러뜨렸다 물과 흙이 사이좋게 밀어 올렸던 보라 빛 꽃대가 12월의 습지대로 유배 된다 당신과 내가 꽃을 피우는 건 근친상간이래 여름의 부록 같은 꽃 무덤 속 등이 까무룩하니 휘어진 바람이 주석을 단다 그리움의 .. 2015. 10. 22. 수화手話 수화手話/강영은 인사동 골목길에서 털모자를 샀다 귀밑까지 눌러썼더니 달팽이관이 덜거덕거렸다 모자 속 달팽이가 귀속을 파고든 것 같았다 모자를 벗고 달팽이를 찾아보았다 흙바닥과 흑흑거리는 귓바퀴 사이, 흙과 흑 사이 묵음으로 놓여 있는 ㄹ이었다 ㄹ은 소리나지 않는 받침 ㄹ.. 2015. 10. 22. 아르카이크 스마일 아르카이크 스마일* /강영은 고딕식 미소를 지닌 사내를 알고 있다 양 끝을 살짝 올린 입매가 선량해 보이는 조각상의 얼굴을 복원하기 전까지 조각난 얼굴이 얼마나 모호한 죽음인지 알지 못했다 차가운 인형인채로 두는 것에 염증이 난 미숙한 조각가가 두 뺨에 별빛을 새기려 했는지 .. 2015. 10. 22. he Yellow House The Yellow House/강영은 테오야, 네가 부친 돈으로 나는 꿈에 그리던 집을 장만했다 창문을 열면 아를의 들판이 부시게 피어난다 세상이 노랗게 빛나는 것을 보면 나의 동공은 태양의 흑점을 지닌 해바라기가 아닐까? 까맣게 여문 씨앗들을 화폭에 뿌리면 오후의 현관문이 하염없이 목을 늘리.. 2015. 10. 22. 나는 항상 성탄절이다/ 나는 항상 성탄절이다/ 강영은 - 고 이탄 선생님 영전에 선생님, 낭송회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가셨습니까? 뒤풀이는 언제 하라고, 동네 아저씨가 구멍가게에 가듯 이발소에 가듯 이리 말없이 가셨습니까? “말없음 중에 말을 해 준 예수의 목젖”처럼 “이 땅의 평면들, 울퉁불퉁한 평.. 2015. 10. 22. 모볍연화경 모볍연화경/강영은 바람벽에 붙어서 야채 파는 할머니 찬밥 한 덩이 끓이신다 푹 퍼진 밥 한 숟가락 떠먹을 때마다 오물오물 햇살이 따라 들어간다 햇살 한 덩이 삼키기 위해 허물어진 등짝까지 걸어 온 할머니 마른 어깨에 노을은 몇 가마쯤 쏟아졌을까? 달그락대는 동전들이 손자놈 목.. 2015. 10. 22. 블록 놀이 블록 놀이/강영은 지하철 계단 입구의 가판대에 놓여 져 있는 신문의 사회면은 어제와 오늘 사이에 접혀 있다 접힌 페이지 같은 철길 위로 바람소리가 다가온다 "본 역은 열차와 승강장 사이가 넓사오니 승객 여러분은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몇 명의 승객들이 미확인된 행선지에 그림자.. 2015. 10. 22. 그리운 칠판 그리운 칠판/ 강영은 1927년, 북간도 명동 촌에 봄이 왔습니다 흙먼지 이는 운동장에 파릇파릇 글자가 돋아납니다 벌판 끝 아지랑이는 모락모락 글자를 완성합니다 송판 내음 향긋한 문을 열면 코흘리개 몇이 목청 높여 가갸거겨고교구규그기, 모국어를 일으킵니다 삐뚤빼뚤 글자가 신이 .. 2015. 10. 22. 붉은발말똥게의 귀가 붉은발말똥게의 귀가/ 강영은 주름 잡힌 하루의 저물녘, 그녀의 원피스 속엔 한 번도 펼치지 못한 하늘이 들어있다 초겨울 바람이 그려 낸 한 벌의 고독 속엔 붉은발망똥게의 알집같은 노을이 무정란으로 번식한다 섭지 바닷가에서 태어난 조에아 유생처럼 나이 든 재능 산수 여선생인 .. 2015. 10. 22. 붉은 고무호스 붉은 고무호스 /강영은 누가 그녀의 배꼽을 열어놓았나 꽃집에서 걸어 나온 그림자가 그녀를 집어 든다 오른쪽 손아귀로 얼굴을 잡고 엄지와 검지로 입술을 누른다 찌그러진 울음이 몇 개의 물줄기로 분산된다 미처 새어나오지 못한 울음은 젖무덤의 부푼 젖처럼 입가로 흘러내린다 울.. 2015. 10. 22. 눈雪의 거처 눈雪의 거처 /강영은 사내가 사라졌다 CCTV가 없는 현장에는 물이 흥건했다 물이 사내라는 혐의는 너무나 투명했지만 눈이 오는 계절이어서 불어나거나 줄어들지 않는 몸뚱어리가 얼어붙은 몸의 안쪽으로 흐르고 있을 뿐 한낮에 보면 한 마리의 은빛용이 잠자는 모습 같았다 음유시인이.. 2015. 10. 22. 로마를 다시 읽다 로마를 다시 읽다/강영은 수락산 기슭에 로마 나이트가 성업 중이다 봄바람을 붙잡고 현기증 사태를 일으키는 생강나무, 볼이 발그스레 물든 진달래, 앳띤 얼굴의 아카시아까지 지분 향기 날리며 부킹을 기다린다 별내면 오리집 비닐 장판 위에 앉은 사내들, 화투 패 돌리느라 그녀들 안.. 2015. 10. 22. 이전 1 2 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