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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비단구렁이

‘몸’에 깊이 새겨진 기억과 감각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 교수)

by 너머의 새 2015. 9. 22.



■ 강영은 시집『녹색 비단구렁이』 해설

 

 

‘몸’에 깊이 새겨진 기억과 감각


   


유성호(문학평론가․한양대 교수)
        


1.

 강영은 시집 『녹색비단구렁이』 는, 선명한 감각의 재현과 생의 원초적 의미에 대한 집요한 천착을 결속하면서, 우리 시단에 매우 이채로운 음색을 던진 성과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만큼 시인은 이번 시집을 통해 전(全)존재로서의 ‘시’를 쓰고 사는 모습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가령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꽃/집/독”이라는 다중적 속성을 ‘시’에 부여하는데, 그렇게 ‘꽃’과 ‘집’처럼 피고 지고 세워지고 무너지는 동안 ‘시’는 ‘독’처럼 스며 시인 자신을 “시퍼렇게 독 오른” 존재로 만들었다. 이처럼 치명적 독성을 감염시킨 ‘시’에 대하여 시인은 이제 “내 허물을 벗겨다오”라고 말함으로써, 시집 곳곳에 퍼져 있는 독성을 가로질러 새롭게 거듭나려는 존재론적 갱신을 욕망하고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플라톤(Platon)은 문자를 ‘약(藥)’인 동시에 ‘독(毒)’의 속성을 가진 존재로 비유하여, 그것을 ‘파르마콘(pharmakon)’이라 명명하였다. 우리가 자신을 몰입하여 치러내는 모든 언어적 수행이 사실은 ‘약’이자 ‘독’일 것이다. 강영은 시인에게 ‘약’이자 ‘독’인 존재는 다름아닌 ‘시(詩)’다. 그녀는 오로지 ‘시’를 통해서 자신이 ‘시적인 것’을 발견하는 언어의 사제(司祭)임을 확인하고, ‘몸’ 깊숙이 새겨져 있는 물질성의 흔적들을 탐색하고, 원형적 기억들을 섬세하게 재현한다. 이처럼 강영은 신작시집은 ‘시’ 자체에 대한 메타적 인식, ‘몸’에 새겨진 물질성 탐색, 가장 깊은 존재론적 기억의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길지 않은 글은 이러한 강영은 시학의 구체적 육체를 개관하려는 작은 기획으로 씌어진다.




2.

 먼저 강영은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시인’으로서 가지게 되는 깊은 자의식(自意識)을 곳곳에서 고백한다. 곧 그녀는 ‘시’가 궁극적 자아 탐구와 심미적 욕망의 불가피한 형식임을 적극적으로 사유한다. 우리가 잘 알거니와, ‘시’란 ‘언어’ 자체에 대한 탐색에 무게중심을 현저하게 할애하는 예술 양식이다. 그 점에서 ‘시’는 영락없는 ‘언어(에 대한) 예술’이다. 여기서 시인은 언어적 자의식으로 충만한 사람이라는 자기 규정성을 뛰어넘어, 언어를 찾아 헤매고 궁극에는 존재하는 모든 사물 속에서 언어를 발견하고 경험하려는 존재로 탈바꿈된다. 다시 말해 언어의 도구적 기능을 넘어, 언어 자체에 대한 메타적 탐색에 공을 들이는 이가 곧 시인이라는 뜻이 된다.

 강영은 시인에게 ‘시’는 이러한 존재론적 발견을 가능케 하는 편재적(遍在的) 원리이면서, 동시에 스스로를 완성하는 둘도 없는 원천적 기율이기도 하다. 이처럼 그녀 시편들은 ‘시’에 대한 이러한 생각과 경험을 다양하게 변주하면서, 자연 사물 곳곳에서 ‘시’를 발견하는 양상으로 나아간다. 다음 시편은 사물 곳곳에서 ‘시’를 발견하고 있는 그녀의 시선을 아름답게 담고 있다.


마루에 누워 시집을 읽다가 행간을 구르는
매미 소리를 듣는다


피를 토하는 어느 명창의 넋이 들어 있는지
박연폭포 한 소절 폭포수로 쏟아내는데
목구멍에 걸린 울음 하나 제대로 읽지 못해
매미 시편 붙들고 땀을 흘린다


짧고 굵은 생애의 절창을 위해 매미 중,
북미의 어떤 것은 17년을 땅 속에 파묻혀
몸 속 가락을 고른다는데


내 목구멍은 자음과 모음의 엇박자로
울음소리를 흉내낼 뿐
매미의 은신처가 되지 못한다


무엇을 더 비워내야 동안거 하안거 다 지낸
저, 소리의 깊이에 닿을 것인가


매미 빈 몸통에 남아 있는
투명한 바람 소리, 매미 시편의 완결편을
마음에 쓸어 담는다
― 「매미 시편」 전문


 시집을 읽으면서 시의 화자는 행간을 흘러다니는 ‘매미 소리’를 듣는다. 새삼스레 행간 속의 ‘매미 소리’는 “피를 토하는 어느 명창의 넋”으로 환기되고 “박연폭포 한 소절 폭포수로 쏟아내는” 하나의 “시편(詩篇)”으로 살아난다. 그때 화자는 “짧고 굵은 생애의 절창”을 위해 오랜 세월 땅 속에 파묻혀 “몸 속 가락을 고른다는” 매미처럼 살아오지 못한 자신을 성찰한다. 그래서 “내 목구멍은 자음과 모음의 엇박자로/울음소리를 흉내낼 뿐”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아직 득음에도 절창에도 가 닿지 못한 자신의 노래는 얼마나 더 많이 비워내야 “저, 소리의 깊이”에 닿을 것인가. 순간 화자는 “매미 빈 몸통에 남아 있는/투명한 바람 소리”를 통해 비로소 “매미 시편의 완결편”을 듣게 되는데, 이처럼 소리를 듣고, 땀을 흘리고, 몸 속 가락을 고르고, 마음을 비워내는 과정을 통해 하나의 ‘시편’을 성취해가는 과정을 이 시편은 보여준다. 그렇게 이 시편은 그녀 스스로 얼마나 ‘시’를 꿈꾸고 발견하고 사유하는지의 진정성과 절실함을 동시에 보여준다 할 것이다.

 이처럼 ‘매미 소리’를 통해 시작 행위 전체에 대한 메타적 성찰의 품을 보여준 시인은, 숱한 자연 사물이 그려내는 자연스러운 언어를 담아내는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곧 “벼랑 끝까지 기어오르는 기막힌 한 줄의 문장(文章)”(「담쟁이」)이라든지 “느리게 흘러가는 문장”(「접시 위의 한 문장」)을 일관되게 발견하고 읽어내고 표현한다. 그렇게 시인은 모든 사물들을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시인’이 된다. 치명적 독성을 내장했으면서도 둘도 없는 불가항력의 자의식을 던져준 ‘시’를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다음 시편은 그러한 시작 행위의 구체적 과정을 비유하고 있는 또 하나의 가편(佳篇)이다.


먹이를 찾아가는 수백만 마리의 누 떼가
대평원을 흔들며 달리고 있다
떡 벌어진 어깨와 드럼통 같은 몸뚱어리를 떠받치고
가느다란 두 다리가 함께 달린다
날카로운 이빨에 맞서는 것은
기우뚱거리는 발목의 힘뿐이지만
그 가느다란 끈이
서로의 발자국을 묶어주면서
건기를 지나
풀이 무성한 우기로 대평원을 운반한다
구르고 나뒹굴며 생의 행간을
지나는 길


누가,
누가 되지 않고 지나갈 수 있을 것인가


긴 문장을 완성하는 누 떼의 행렬 사이
누에게 길을 묻는
햇빛의 발자국이 간간이 섞인다
― 「작시법(作詩法)」 전문


 화자의 시선은 누 떼의 이동이라는 대평원의 장관을 향하고 있다. “먹이를 찾아가는 수백만 마리의 누 떼”의 행렬을 보면서 화자는 야수들의 “날카로운 이빨에 맞서는 것”이 바로 누들의 “기우뚱거리는 발목의 힘뿐”임을 말한다. 가녀린 것들의 연대를 통해 강하고 날카로운 것과 맞서는 이 무한 역설의 꿈이 시인으로 하여금 “가느다란 끈이/서로의 발자국을 묶어주면서” 이동하는 그들에 대한 애정 어린 관찰로 나아가게 한다. 그때 화자는 누 떼의 행렬을 “구르고 나뒹굴며 생의 행간을/지나는 길”이며, “긴 문장을 완성하는” 지난한 과정으로 읽게 된다. “햇빛의 발자국”이 그 문장의 행렬 속으로 간간이 비치는 순간, 화자는 가느다란 언어가 서로를 일으켜 세우면서 가 닿게 되는 ‘시(문장)’에 대한 강렬한 집착을 확인한다. 언젠가 시인은 ‘감자’를 변주하는 시편에서도 “단 한 줄의 문장”(「감자의 9가지 변주」)을 읽었거니와, 온갖 사물 속에서 ‘시’의 변주인 “바늘잎들의 날카로운 말들”(「소나무 자폐증」)을 듣고야 마는 그녀의 민활한 감각은 시집 여러 군데에서 확연하게 입증된다.

 우리가 잘 알듯이, 서정시의 근본적 전제는 본질적으로 ‘자기 발언(Selbstaussprache)’이라는 것에 있다. 다시 말해 서정시의 수신자는 발화자 자신이 된다. 물론 공적 담론의 주체로서 발화자가 세계에 개입하는 방식의 언술이 반대편에서 서정시의 새로운 권역을 넓힌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원적 의미에서 서정시의 자기 탐색적 의미는 전혀 반감되지 않는다. 강영은 시인은 스스로 화자와 청자가 되어 ‘시(문장, 말)’에 대한 깊은 자의식을 토로함으로써, 자기 탐색의 공을 지속적으로 축적해간다. 그 힘이 그녀를 ‘꽃’이자 ‘집’이자 ‘독’인 ‘시’를 향해 아득하게 퍼져가게 하는 것이다.


3.

 이번 시집의 근간을 형성하고 있는 또 하나의 담론적 실재는, ‘몸’에 관련한 세부적 묘사를 통해 달성된다. 알다시피 ‘몸’은 인간을 구성하는 가장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물리적 실체이자, 모든 문화가 생성되는 최초의 지점이다. “몸을 통한 세계의 무한한 해석 가능성”(니체)의 선언 이후, 우리는 ‘몸’이 이성 중심주의나 이념 지향의 인식론을 극복하는 반성적 거점이 되어왔음을 익히 경험한 바 있다. 그것은 가장 구체적인 원형적 실체에 대한 재발견을 통해 ‘지워진(잊혀진)’ 역사를 복원하려는 욕망과 깊이 관련된다. 또한 이는 인간의 ‘몸’이 주체와 세계를 잇는 가장 구체적인 매개체라는 인식론적 전회(轉回)의 흔적을 담고 있다.

 강영은 시인은 자신의 ‘몸’ 속에 깃들여 있는 기억과 감각들을 선명하게 재현해낸다. 가령 “입술이 입술로 달려가 닿는 소리/플루트처럼 입술을 떨게 했던/풀입 입술을 조율하기도 했던 그 소리는/내가 맨 처음 입맞춤한/엄마, 압빠, 맘마, 젖내 나는 소리”(「두 입술이 내는 소리」)를 섬세하게 들으면서, 그녀는 자연 사물들이 “제 몸을 내던지는 존재의 불꽃”(「비누論」)들을 하염없이 응시한다. 그 흔적을 ‘유적’으로 비유하고 있는 다음 시편!


바람에 나부끼는 돌매화나무 꽃잎을 본다
눈보라를 몰고 오는 구름의 입술 같다
뭉게뭉게 산정을 무너뜨리는 저, 입술들은
젖은 듯 보인다 젖어 있는 건,
피지 못해 침묵하는 내 마음일지 모른다
가벼워진 입술을 날려보낸 나무는
납작하게 뻗은 가지들로 바위를 꽉 붙들고 있다
바위에 새겨진 누군가의 입술 같다
바람의 길을 지나오는 동안
제 몸의 중심을 잃지 않으려는 누군가가
돌 속에 제 입술을 묻은 것일까
화산암, 시커멓게 굳은 침묵 속에서
꽃보라가 날린다 눈 같은 꽃보라다
시퍼렇게 날선 한라의 산정,
절정의 은유에서 흩날리는
저, 꽃보라!


눈 속에 꽃송이를 밀어내는 매화나무처럼 한 그루
고요 속에 들지 못한다
오뉴월 햇빛 속, 가파르게 올라온
내가 녹는다
― 「오래된 유적」 전문


  이 시편은 ‘바람’과 ‘꽃잎’ 그리고 ‘햇빛’이 조율하는 자연의 감각을 아름답게 펼쳐 보여준다. 화자는 “바람에 나부끼는 돌매화나무 꽃잎”을 바라보면서 “눈보라를 몰고 오는 구름의 입술”을 연상한다. 그 ‘입술’의 감각은 침묵하는 화자의 마음으로 이어지고, 꽃잎을 떨군 나뭇가지들을 “바위에 새겨진 입술”로 바라보게 한다. 그것은 또한 ‘몸’의 중심을 잃지 않으려는 누군가가 “돌 속에 제 입술”을 묻은 흔적이기도 하다. 이러한 '입술'의 감각적 연쇄 속에서 화자는 “화산암, 시커멓게 굳은 침묵”처럼 “절정의 은유”를 바라본다. 그 산정(山頂)의 꽃보라 속에서 “고요 속에 들지 못한” 채 오뉴월 햇빛 속을 올라온 자신을 발견하면서, 화자는 정지용의 「白鹿潭」에서처럼 절정에서 소멸해가는 자기 자신을 온몸으로 느낀다. 그러니 ‘오래된 유적’은, “바위에 새겨진 입술”처럼 “바람의 길을 지나오는 동안/제 몸의 중심을 잃지 않으려는” 마음의 움직임 그 자체였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오래된 유적(遺跡)’은 동시에 생의 불가피한 ‘유적(流謫)’이 되기도 한다. 말하자면 시인은 자연 사물 여러 곳에서 “죽은 개펄 하나 밀고 가는/말랑말랑한 힘”(「설법 한 접시」)을 느끼기도 하고, “햇빛 속에 가닥가닥 드러난 핏줄들은/어둑한 삶을 밝혔던 전선줄인 듯/환하게 몸을 켜들고 있었다”(「지렁이」)라든지 “꽃들은 튼튼한 올가미로 제 몸의 벼랑을 이어갔다”(「나팔꽃, 이별을 연주하다」)라고 말하며 시간과 공간을 유적(流謫)하는 뭇 존재자들의 모습을 ‘몸’의 현상학으로 탐색하고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결국 모든 존재자는 “몸이 우주선”(「우주선」)이 된 채 기억과 감각 사이를 유적(流謫)으로 떠돌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 천둥번개 치고 비오는 날이면 비 냄새에 칭칭 감겨 있는 생각을 벗어버리고 몸 밖으로 범람하는 강물이 되고 싶어요 모과나무 가지에 매달린 모과열매처럼 시퍼렇게 독 오른 모가지를 공중에 매달고 뭉게뭉게 피어나는 구름신부가 되어 한 번의 낙뢰, 한 번의 키스로 죽는 천둥벌거숭이처럼 내 몸의 죽은 강물을 퍼 나르고 싶어요


 하지만 어머니, 내가 건너야 할 몸 밖의 세상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뿐이에요 눈부시게 빛나는 햇빛의 징검다리뿐이에요 내 몸에 똬리 튼 슬픔을 불러내지 못하기 때문일까요? 연두에서 암록까지 간극을 알 수 없는 초록에 눈이 부셔 밤이면 독니에 찔려 죽는 꿈들만 벌떡벌떡 일어나요


 어머니, 녹색비단구렁이새끼를 부화하는 세상이란 정말이지 음모일 뿐이에요 희망에 희망을 덧칠하는 초록의 음모에서 나를 구해주세요 제발 내 몸의 비단 옷을 벗겨주세요 꼬리에서 머리까지 훌러덩 벗어던지고 도도히 흐르는 검은 강, 깊이 모를 슬픔으로 꿈틀대는 한 줄기 물길이고 싶어요
― 「녹색비단구렁이」 전문


  시집의 표제작인 다음 시편은, ‘녹색비단구렁이’라는 이색적 소재를 대상으로 하여 심미적 감각을 아름답게 표상하고 있다. ‘어머니’를 직접 청자로 설정하고는 있지만, 시의 화자는 스스로 ‘녹색비단구렁이’가 되어 “천둥번개 치고 비오는 날”에 몸 밖으로 범람하는 강물이 되고 싶다고 토로한다. 그렇게 ‘생각’이 아닌 ‘몸’을 발견하는 과정 자체가 화자가 소망하는 존재 방식이 된다. 독성이 오른 목을 공중에 매달고 “천둥벌거숭이처럼 내 몸의 죽은 강물을 퍼 나르고” 싶다는 소망은, “내가 건너야 할 몸 밖의 세상”을 견디게끔 하는 심미적 환상을 화자에게 부여한다. 그렇게 “몸에 똬리 튼 슬픔”을 건너 화자는 “몸의 비단 옷을” 벗고 “깊이 모를 슬픔으로 꿈틀대는 한 줄기 물길”로 거듭나고자 한다. ‘녹색비단구렁이’는 이처럼 ‘미(美)’와 ‘추(醜)’의 속성을 한몸으로 결속하면서, 시인이 꿈꾸는 새로운 존재론적 욕망의 모습을 보여준다. ‘생각’과 ‘죽음’과 ‘슬픔’과 ‘덧칠된 희망’을 건너서 “깊이 모를 슬픔”을 지닌 생생한 ‘몸’으로 거듭나고자 하는 것이 그 욕망의 내용이다.

 이처럼 강영은 시인은 ‘몸’에 새겨진 감각을 통해, 주체(인간)와 대상(우주) 사이에 상호 연관성을 부여하면서, 시인으로 하여금 삶의 비극성과 우주적 심미성 사이를 진자 운동하도록 돕고 있다. 그 사이에는 사실적인 인과 관계나 유추 관계가 없고, 따라서 합리성의 육체를 부여하는 이른바 ‘산문적 해명(paraphrasing)’의 여지 또한 매우 적은 것이 사실이다. 다만 그 안에는, “몇 겹의 비밀로 이루어진 몸”(「양파론」)이 역동적 심미성을 지닌 채 도사리고 있을 뿐이다.


4.

 서정시가 가지는 가장 본래적인 권역은, 말할 것도 없이, 시인의 절실하고도 남다른 자기 확인의 욕망에 있다. 그것이 나르시시즘 차원의 자기 몰입이든 고통스런 반성을 동반하는 자기 성찰이든, 서정시의 초점이 시인의 자기 검색과 확인에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물론 시인과 대상 사이의 날카로운 균열이나 갈등 양상을 포착하고 드러내는 이른바 ‘아이러니’ 혹은 ‘반(反)동일성’의 미학까지 포괄하는 것이 근대적 서정의 원리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서정’의 근원적 자기 회귀성은 그 비중이 줄어들지 않는다. 그런데 이 같은 서정시의 자기 회귀성은 사물에 대한 의미 부여와 함께 그것을 자신의 삶의 국면과 등가적 원리로 결합하는 속성을 곧잘 구현한다. 그만큼 시인이 사물의 고유성을 발견하고 그 응시의 힘으로 자신의 삶의 태도와 자세를 다시금 성찰하는 시적 원리는 결코 포기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 응시의 힘으로 다시 사물에게 활력과 생명을 불어넣는 시적 상상의 과정 또한 위축되지 않을 것이다. 그 응시의 힘을 안팎으로 돕는 핵심적 원리가, 강영은 시인에게는 바로 ‘기억’이 아닐까 한다.


 뒤꼍이 없었다면, 돌담을 뛰어넘는 사춘기가 없었으리라 콩당콩당 뛰는 가슴을 쓸어안은 채 쪼그리고 앉아 우는 어린 내가 없었으리라 맵찬 종아리로 서성이는 그 소리를 붙들어 맬 뒷담이 없었으리라 어린 시누대, 싸락싸락 눈발 듣는 소리를 듣지 못했으리라 눈꽃 피어내는 대나무처럼 소리 없이 눈 뜨는 푸른 밤이 없었으리라 아마도 나는 그늘을 갖지 못했으리라 한 남자의 뒤꼍이 되는 서늘하고 깊은 그늘까지 사랑하지 못했으리라 제 몸의 어둠을 미는 저녁의 뒷모습을 알지 못했으리라 봄이 와도 녹지 않는 첫사랑처럼 오래 남는 눈을 알지 못했으리라 내 마음 속 뒤꼍은 더욱 알지 못했으리라.
― 「오래 남는 눈」 전문


  시의 화자는 “뒤꼍이 없었다면”이라는 가정형을 통해, 자신의 생애가 ‘뒤꼍’이라는 상징적 공간에서 발원하여 전개되어왔음을 고백한다. 화자는 뒤꼍에서 “돌담을 뛰어넘는 사춘기”와 “콩당콩당 뛰는 가슴을 쓸어안은 채 쪼그리고 앉아 우는 어린” 시절이 있었음을 일종의 성장 서사를 통해 들려준다. 거기에는 뒷담과 어린 시누대의 싸락싸락 눈발 듣는 소리가 있었고, 눈꽃 피어내는 대나무처럼 소리 없이 눈 뜨는 푸른 밤도 존재했었다. 무엇보다도 화자는 그 뒤꼍을 통해 “그늘”을 가질 수 있었음을 고백하고 노래한다. 그것이 없었다면 “한 남자의 뒤꼍이 되는 서늘하고 깊은 그늘”을 사랑할 리 없었고, “제 몸의 어둠을 미는 저녁의 뒷모습”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봄이 와도 녹지 않는 첫사랑처럼 오래 남는 눈”도 몰랐을 것이다. 이처럼 궁극적으로 “내 마음 속 뒤꼍”을 고백하는 이 아름다운 ‘기억’의 시편은, “내 마음의 뒤꼍”이야말로 자신의 기억이 가 닿은 가장 근원적인 원형임을 남김없이 보여준다. 그리고 그 기억의 원형이 자신의 현재적 욕망과 몸을 구성하는 원리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원래 하나의 시편 안에 구현된 시간은 경험적 시간과 그것이 재구성된 작품 내적 시간이다. 우리가 ‘기억’이라고 부르는 것도 지층에 남아 있는 화석처럼 마음이라는 지층에 보존된 하나의 흔적이며 표지(標識)이며 기록일 것이다. 강영은 시인의 기억은 곳곳에서 자신의 존재론적 표지를 그리고 있다. “아버지 한 분이 쓸쓸한 관 하나로/오래오래 남아”(「모자(帽子)」) 있는 풍경을 발견한다든가 “까마득히 잊었던 태(胎)의 길로/직행하는 기억들”(「호박」)을 구성하면서, 그녀는 “크게 뜨는 별빛을 보면/모두가 그렁그렁한 아버지의 눈빛”(「아버지 별」)으로 보이는 섬세한 기억의 작용을 시편마다 들여놓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강영은 시편의 구체적 육체 가운데는 ‘기억’을 재현하고 초월하려는 욕망이 생동감 있게 담겨 있다. 그 기억을 항구화하면서 그녀 시편들은 지금도 자신의 ‘몸’ 속 깊이 잦아들고 있는 것이다.


5.

  신이나 자연 같은 외재적 삶의 질서에 예속되어 있던 인간이 스스로 삶의 주체임을 선언한 것이 근대적 논리의 기초라면, 서정시는 확실히 ‘근대의 저편’을 응시하는 어떤 양식이다. 그래서 서정시는 현실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이 다른 현실이 아니라, 꿈과 상상력으로 구성되는 시적 현실이라고 믿는 편이다. 물론 이는 ‘현실/꿈’의 접점에서 형성되는 긴장과 균형 속에서 자신의 미학과 윤리학을 완성한다. 또한 서정시의 가장 중요한 원천은 결핍과 부재를 견디는 힘에서 생겨난다.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의 결핍, 한때 분명히 실재했던 것들의 부재, 이러한 생의 결여 형식에 대한 가장 원형적인 반응이 바로 기억과 감각의 운동일 것이다.
강영은 시인은 이러한 기억과 감각의 운동을 아름답게 보여주는 언어의 사제이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깊이 새겨진 기억과 감각을 통해 “구름의 발가락인 빗방울들”(「장자 연못」)을 표현하기도 하고, “나무가 제 몸을 밀어내도/사바세계 얼어붙은 손을 놓지 못하는/한 알의 밥그릇 사원”(「한 알의 사원」)이라고 ‘까치밥’을 명명하기도 한다. 이러한 매우 균질적인 그녀 시편의 심미성 앞에서, 우리는 그녀의 기억과 감각이 “물결마다 황홀하게 스러지는 꽃무덤 저, 화염 바다”(「왜목마을을 지나며」)에 가 닿는 아름다운 풍경을 접하게 되는 것이다. “바닥에 닿으려는/마음”(「닻」)을 같이 가지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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