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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원시(遠視)의 시대, 원시(原始)의 세계로 회귀를 꿈꾸는 원시(元詩)의 언어

by 너머의 새 2025. 10. 18.

원시(遠視)의 시대, 원시(原始)의 세계로 회귀를 꿈꾸는 원시(元詩)의 언어

 

염선옥(문학 평론가)

 

 

1.

시는 본질적으로 ‘나’의 욕망과 좌절의 기록이다. 그 점에서 시는 비극적 담론으로 귀결할 가능성을 크게 가진다. 물론 비극은 유구한 역사 속에서 폐기되지 않고 삶의 문학적 기표로 자리한다는 점에서 실존의 미학적 번역이기도 하다. 기원전 6세기부터 성행한 디오니소스 축제의 주제는 비극이었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22장까지 비극을 다루면서 비극은 매우 보편적인 양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만큼 비극은 인간이 예술과 어떻게 함께해왔는지를 확인하게 해주는 유력한 창(窓)이다. 근대에 이르러 비극 담론은 ‘디스토피아’, ‘상징주의’, ‘초현실주의’, ‘언캐니’, ‘소격효과’ 등으로 이름을 달리할 뿐 여전히 문학적 중심에서 삶의 방향을 환기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그중에서 시는 ‘나’의 비극에 헌신하는 만큼, 독자가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연민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희망을 불러오는 변증법적 작업이기도 하다. 그렇게 비극은 ‘정(καθαρισμός)’에 이르게 한다는 면에서 종교적·철학적·심리적 ·실존적 사건이 되어준다. 우리는 시적 정화를 통해 희망을 불러오고 그것은 비극적 절망 속에서 문학적 승화를 이루어 삶에 대한 강한 욕망을 일으켜준다.

오세영과 강영은의 신작시에는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실존과 원시(原始)로의 회귀 열망 등이 함축되어 있다. ‘나’는 “화실火室에서 석탄을 태우는/이 배의 일개 늙은 화부火夫”(오세영, 「북양항로」)이며 “삶은/흔들리는 오두막 한 채”처럼 불안한 노년의 삶을 이어가는 외로운 존재이지만 동시에 “눈뭉치”에서 “한 발의 총성”(강영은, 「나는 내게 가장 먼 상처」)을 읽어내며 새로움을 창조하려는 주체로 우뚝 서 있다. 두 시인의 고통과 고독과 죽음에 대한 사유는 외양 비극적이지만, 죽음과도 같은 비극을 통해 그것이 삶으로부터의 몸부림이라는 사실을 암시해준다. 나아가 그것은 삶에 충만한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변증법적 희망의 일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시의 한 원리가 ‘모순 혹은 대립이 되는 것들의 조화 혹은 통일’(오세영, 「현대시론에 끼친 불교의 영향」, 󰡔한국어문학연구󰡕 제43집, 동악어문학회, 2004.08, 7-34쪽)이라는 것은, 파도의 원리와 동일한 구조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잔잔한 물에 바람, 조석력 등 대립물의 힘이 가해지면 그때부터 물은 힘을 전달하는 매개체로 변형된다. 그렇게 미학적 언어에 구조, 진술, 상상력이 더해지면 시는 배를 뒤집는 힘을 지니게 된다. 그것은 대립과 충돌이라는 과정을 통과하여 조화롭게 세계가 완성됨을 함의하는 것이다. 파도는 “때로는/안갯속을 헤매”고 “때로는 폭풍우”와 “소용돌이에 휩쓸”리기도 하다가 “어디를 가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자신도 모른 채 달리고 또 달려가기만” 한다. 우리는 “때로/돌고래의 휘파람” 소리를 듣기도 하고 “수평선의 신기루”를 보기도 하며 “밤바다의 반짝거리는 별빛에 온몸”이 젖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부대끼면서 파도는 “해당화 곱게 핀 백사장에 실려 와/스스로 소멸”할 것이고 “어떤 것은 해안가 절벽에 부딪혀 파멸”하며 “또 어떤 것은 뻘밭의 진 구렁에 스러져/한낱 평형으로 돌아가는 그냥 물,/물거품”(오세영, 「파도」)이 될 것이다. 파도의 여정이 시나 인생의 행로와 다르지 않다면, 우리는 충돌과 소멸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때 파도가 완성될 것임을 알게 된다. 어차피 삶은 소멸을 향해 가지만 소멸은 역설적으로 생성을 꿈꾸게 한다는 철학적 메시지처럼 변증법적 현실의 검토는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의 가능성을 선사할 것이기 때문이다.

주체의 발화, 사유의 전도와 전복(홍용희, 「‘이상한 연못’의 언어와 중층적 상상력」, 󰡔상냥한 시론󰡕, 황금알, 116~127쪽) 과정은 강영은의 시에서도 확인된다. 시인은 무의식과 영감(靈感)에 자신을 내맡겨 자동 기술적 ‘시쓰기’를 이어나간다. 그것은 “미망(迷妄)으로 가득 찬” “비문(非文)”처럼 현실적 의지와는 다른 결과물일 수 있으며 “소리의 본기(本紀)와 열전(列傳)을” 가진 고라니에게서 나오는 소리로서 “어떤 소리가 고라니의 진짜 소리인지”(강영은, 「섬망(譫妄)의 숲」) 알 수 없는 목소리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시인의 영감과 상상력이 전달하는 “지키기 힘든” “당신의 결심”(강영은, 「당신의 결심」)을 기다리는 것이다. 시의 영감이 “책상 앞에 앉아 깜빡 조는 사이 잠깐, 다녀”가고 “그가 좋아하는 펜을 들고 기다려 보지만 온다는 기약”(강영은, 「방문」)도 없을 때 시인은 영감을 기다리는 일과도 같은 “침묵”(강영은, 「기린」)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 고통이 “형장으로 끌려가는 사형수처럼 벗은 몸 위에 돌멩이를 매달로 철삿줄로 사지를 꽁꽁 옭아맬지라도” 시인은 “생각의 뿌리만은 올곧게” 내리려 하는 것이다. “북풍한설에 매서워진 입들이 우수수, 낙엽을 쏟아낼 때도 생각의 몸뚱어리는 흔들리지”(강영은, 「분재(盆栽)」) 않는 시인의 올곧은 열정과 사유는 시가 바로 자신의 인생 그 자체이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오늘의 사회를 디스토피아로 바라보는 것은, 자본을 먹고 자란 과학기술이 삶과 죽음을 엄격하게 분리하려는 경직된 태도를 보여준다는 판단에 기초하고 있다. 우리를 지탱하게 하는 믿음의 세계 즉, “가버린 신들은 이제 없고, 와야 할 신들은 아직 없는”(마르틴 하이데거, 전양범 옮김, 󰡔존재와 시간󰡕, 동서문화사, 2018, 676쪽) 시대를 말하는 것일 터이다. 세계는 전보다 깊이가 없어져 신비를 머금은 유현함이 사라졌다. 심장 박동 수와 혈류 수치처럼 사랑과 희망, 행복마저 수치와 스펙으로 계량화하는 사회가 되었다. 오세영과 강영은은 문명화된 세계에 대한 안도감보다 현존재에게 주어진 삶의 풍경에서 비롯되는 협소함과 사라진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하고자 한다. 인간이 ‘돌’과 다른 것은 늘 다른 존재와 관계 맺으며 의식하며 몰입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무엇에 몰입하는가는 우리가 인간인가 아닌가를 증명하는 가늠쇠가 된다. 오세영과 강영은은 자신들만의 올곧은 시의 역사를 통해 ‘나’가 우주와 관계하며 시세계의 창조자임을 확신시킨다. 그 믿음은 수치의 세계가 아닌 영감(靈感)에 의해 탄생이 되는 세계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자연과의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얻어지는 보들레르 방식의 ‘만물조응’ 세계이다. 시인의 신전은 자연이기에 창조주와 같은 시인(오세영, 「클릭」)은 만물과의 소통으로 원시(遠視)에서 벗어나 원시(原始)의 관계에 이를 수 있다. 죽음을 기억하여 삶을 살라던 톨스토이, 죽음에 대한 태도로 자기 본연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던 야스퍼스(최문규, 「죽음, 자유인가 우연인가: 하이데거와 사르트르」, 󰡔뷔히너와 현대문학󰡕 38, 한국독일현대문학회, 2012, 119~152쪽), 죽음이라는 미제의 끝을 향해 기투함으로써 삶을 온전히 수용하고 바라보던 하이데거(조가경, 󰡔실존철학󰡕, 박영사, 1995, 142~143쪽), 이들 모두 죽음과 삶의 균형 있는 응시를 통해 비극에 제압됨 없이 고통을 냉철한 자의식으로 이해하려 하였다.

대다수 현대인은 삶이란 좋은 것이며 죽음은 나쁜 것이라는 경직된 태도에 갇혀 있다. 죽지 않기 위해 질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그 같은 원시안(遠視眼)은 정작 가까운 데 놓인 자신의 ‘몸’과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만든다. 원시안으로는 자신과 자신의 발아래도 읽지 못하고 단지 먼 곳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나’의 몸에 뿜어대는 진한 향을 맡지 못해 감각의 아양(峨洋)에 실패한다. 오세영과 강영은은 이러한 현대인과 젊은 시인들에게 메시지를 전한다. 원시안의 도시인에게 원시(元詩)의 회복을 위해 ‘나’를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고. ‘나’는 “지키기 힘든 마음자리에 놈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것이 “나의 전유물인지 당신의 자존심인지” 몰라도 “어떻든 어떻게든 지켜야 할 존재 같아”서이다. 우리 삶에 빼앗긴 “일인칭인지 이인칭인지” 하는 “마음을 뺏긴 적이 하도 많”아서 시인은 자신의 글조차 “미망(迷妄)으로 가득 찬” “비문(非文)”이 되는가 보다 생각한다. “그렇다고 당신 것만은 아닌,//밑 빠진 항아리 속을 빠져나가는 생쥐처럼 죽이기도 어렵고 살리기도 더욱 어려운 마음의 실세(實勢)!”(강영은, 「당신의 결심」)이기에 다시 한번 “마지막”을 외치며 ‘마음’을 다잡으려 한다. ‘나’는 잡히지 않는 마음을 지키려고 한다. 그러나 마음은 누구의 전유물인지 몰라도 쉽사리 잡히지 않는다. 시인은 포기하지 않으며 실존의 모습을 통해 분열된 존재의 세계를 보여줄 뿐이다. 그 점에서 두 시인의 세계가 유의미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2.

오세영은 오늘날 우리 시단의 두 가지 시적 경향을 설명한 바 있다. 하나는 체험이나 사실을 보고하려는 방식이고 나머지는 사건을 구성하여 서술하려는 경향이다. 그리하여 “짧은 수필을 축약한 것과 같은 시”(오세영, 「자서」, 󰡔봄은 전쟁처럼󰡕, 세계사, 2004, 4쪽)가 환영을 받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오세영은 시의 본질이 “상상력의 표현”에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늘 새롭고, 신선하고 아름다우며, 윤리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새로움은 이질적인 것의 충돌을 통해 생겨난다. 부재 속에 존재의 그리움이 피어나고 비어 있을 때 충만함이 깃든다. 결핍이 있어 “당신에게 대한 나의 절대적 성실성”(황현산, 「이름붙일 수 없는 것에 대해」, 󰡔눈물에 어리는 하늘 그림자󰡕, 현대문학, 1994, 118쪽)이 발현되며 감성은 이성과의 조화를 불러들인다. 배가 고파야 무언가를 먹고 맹추위 끝에 여름이 더욱 소중하게 다가오며, 고통이 주어져야 비로소 건강의 소중함을 깨닫고 죽음을 통해 삶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는 것처럼 이질적인 것의 충돌은 내면의 화해와 일치로 완성된다. 오세영과 강영은만큼 이질적인 것의 변증법적 성찰을 시도하는 시인도 흔하지 않을 것이다.

오세영은 물과 불을 뒤섞어 그릇을 창조했고 “회를 치던 손”에서 “푸른 꽃나무로 만들어준” “나비 한 마리”(오세영, 「적멸」)를 만난다. 유성호는 서정성과 철학성을 기준으로 오세영의 시세계를 3기로 구분하였다. 그의 초기시를 이미지 조형을 통한 내면 탐색과 철학적 통찰 시기로, 중기시를 서정성의 강화와 근원적 구경의 투시의 시기로, 마지막 후기시를 서정과 철학을 통합하는 ‘변증법적 도정’의 시기로 보았다(유성호, 「서정성과 철학성의 상호 통합을 통한 존재 탐구의 시 세계」, 오세영, 󰡔한국대표시인 101선집󰡕, 문학사상, 2006.5, 405~426쪽). 이상호는 강영은이 비논리적이고 이질적인 것의 나열과 대조를 통해 무의미한 세계를 파괴하고 진정성에 도달(이상호, 「그리움을 풀어내는 두 갈래 길」, 󰡔본질과 현상󰡕 2018. 12, 255-263쪽)했다고 갈파했으며, 오형엽은 강영은이 “형이상학적 탐구를 시도하는 자연 서정과 디스토피아적 냉소와 형이하학적 탐구를 시도하는 도시 풍자”를 대척점으로 위치시켜 “상호 교섭하고 침투하는 복합적인 관계망을 형성한다.”(오형엽, 「자연 서정과 도시 풍자, 시간성의 주제와 언어적 매개의 방법」, 강영은, 󰡔너머의 새󰡕, 한국문연, 2024, 141쪽)고 파악했다. 결국 두 시인은 “흰 백지와 검은 펜이 부딪쳐 만들어내는/그 불빛!”(오세영, 「시를 쓰면서」)처럼 이질적인 것의 충돌이 빚어내는 ‘새로움’을 끊임없이 추구해 나가고 있다 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는 이질적인 것을 배타적인 것으로 삼아 추방하는 시대이다. 이질적인 것을 용인하지 않는 사회에서 새로움이 과연 생겨날 수 있을까? 오세영은 “그제의 얼굴은 그 그제의 얼굴이 아니고/어제의 얼굴은/그제의 얼굴이 아”(오세영, 「민낯」)님을 깨달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매일이라는 삶은 이질적인 존재와의 만남 속에서 창출되는 다른 날의 복수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어진 매일 속에서 조금씩 다른 외양을 갖추어나간다. 비록 육신은 나약해져도 ‘새로움’을 향한 올곧은 사유는 나를 영원으로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강영은은 육신의 통증 속에서도 “온다는 기약 없”는 “떠나간 영감(靈感)”을 기다린다. “깜빡 조는 사이 잠깐, 다녀”간 영감이 언제 올지 몰라서 “할미꽃 필 때까지 시간을 던져보지만” “할미꽃 진 무덤처럼 감감무소식”(강영은, 「방문」)이기만 하다. 이렇듯 새로움에 대한 갈망은 시의 본질이기도 하다. 태초의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것처럼 화자는 이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고자 한다. “이 세상은 잠자는 문자판”이기에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져야 새싹이 나고/꽃샘바람이 찰싹 뺨을 때려야/꽃봉오리가 터지듯” “밤새 워드를 쳐 대지를 깨우”고 있다. “금 나오라 뚝딱,/은 나오라 뚝딱, 도깨비”가 “상 방망이를 두드리는 것처럼” “자판의 ‘ㅂ’과, ‘ㅗ’와, ‘ㅁ’을 치면 ‘봄’이,/‘ㄲ’과, ‘ㅗ’와, ‘ㅊ’을 치면 ‘꽃’이 나오는/당신의 그 쉼 없는 클릭”(오세영, 「클릭」)을 이어간다. 결국 오세영이 창조하는 세계는 인생론을 시로 압축한 ‘지적 서정성’(이수익, 표4 글, 󰡔봄은 전쟁처럼󰡕, 세계사, 2004)으로 정의해볼 수 있을 것이다. 아방가르드적 전위의 편에 섰던 시인은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사유의 방황을 거쳐 시의 토대를 불교철학에 두게 되었는데, 그 결과 오세영에게 훌륭한 시란 언어 자체가 발하는 빛에서 철학적 아우라를 가지는 차원으로 이월된다. 이 같은 인식은 이성, 오성과 같은 것에서 ‘깊이’를 찾으려 하지 않는 현대의 시인들에게 시의 타륜을 돌려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주게 된다. 결국 훌륭한 시란 새로운 상상력의 길로 이끌 수 있어야 하고 그때 인생은 “한 생, 무명 속 헤매는 나그네” 길이기에 “한밤중 불빛이 없으면 길은/있어도 없는 것”과 같아질 것이다. “한 줄의 시행은/물이 아니고 불”이라고 말하는 화자의 마음속에 “한순간 부시 깃이 부싯돌과 부딪혀/만들어내는 섬광처럼/암흑 속에서/흰 백지와 검은 펜이 부딪쳐 만들어내는/그 불빛!”(오세영, 「시를 쓰면서」)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인생을 이끌어 “서정적 인간 회복”(유성호, 「서정적 인간 회복을 위한 역설적 꿈」, 󰡔봄은 전쟁처럼󰡕, 세계사, 2004, 133쪽)을 꿈꾸는 ‘한 줄의 시행’은 그렇게 이질적인 것의 충돌 결과 나타난 지극한 새로움인 셈이다.

강영은에게 시는 고통이지만 “형장으로 끌려가는 사형수처럼 벗은 몸 위에 돌멩이를 매달고 철삿줄로 사지를 꽁꽁 옭아맬지라도 생각의 뿌리만은 올곧게”(강영은, 「분재」) 내리려고 한다. 이 같은 신념은 주어진 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제의 자세와도 같다. 유성호는 강영은에게 시란 ‘약’이자 ‘독’인 존재라고 말한 바 있다. “나는 생각 안에서도 생각 밖에서도 아픔밖에 모르는 지구인”(강영은, 「지구인」)이기 때문이다. 고통스러운 의식에 참여하듯 시를 완성하는 강영은의 시쓰기 과정은 천사와 밤새도록 씨름하던 야곱과도 같다. 이는 “그녀는 오로지 ‘시’를 통해 자신이 ‘시적인 것’을 발견하는 언어의 사제임을 확인하고, ‘몸’ 깊숙이 새겨져 있는 물질성의 흔적들을 탐색하고, 원형적 기억들을 섬세하게 재현”(유성호, 「‘몸’에 깊이 새겨진 기억과 감각」, 강영은, 󰡔녹색비단구렁이󰡕, 종려나무, 2008, 139쪽)하려 하기 때문이다.

두 시인은 시를 통해 영생에 이르려는 작업을 통해 ‘시’ 자체에 대한 메타적 인식을 가득 보여준다. 오세영은 한 좌담에서 영원히 살기 위해(오세영, 「권두좌담_오세영 시인에게 삶을 묻다」, 󰡔文학/史학/哲학󰡕 68(8), 한국불교사학회 한국불교사연구소, 2022.3, 20쪽) 시를 쓴다고 말한 바 있다. 오세영이 말하는 ‘영원’에 이르는 방법은 모든 시공간에 존재하는 것이다. 여행을 통해 공간을 확대하고 시를 통해 시간을 지속하는 방식이 ‘영원’에 가닿는 것이라는 그의 철학적 사유는 그가 올곧은 시적 세계를 고수하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오세영에게 “人生이란 한 줄의 시”(오세영, 「한 줄의 시」, 󰡔불타는 물󰡕, 문학사상사, 1988, 47쪽)이기에 그의 시가 남는다면 그것이야말로 그의 인생이 삶을 잇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3.

강영은에게 글쓰기는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과정이며, 몸속에 깃들여 있는 “기억과 감각을 선연하게 재현”(유성호, 「시 쓰기의 자의식과 근원 지향의 서정 – 강영은 시집 󰡔마고의 항아리󰡕」, 󰡔본질과 현상󰡕 42호, 2015.12, 248쪽)일 뿐 현대의 세계가 가늠하는 성과 중심의 세계가 아니다. 강영은의 시적 주체는 성과 주체로 자리하지 않는다. 과다한 생산, 명성, 주어지는 부상(副賞)에서 자유롭다. 그것은 복종하는 주체와 구별되는 것이다. 강영은의 세계는 “경기가 끝났을 때 승자도 패자도 눈물 흘”리는 공간일 뿐이다. 물론 “승자는 양팔을 높이 쳐들어 메달을 가져”가겠지만 그녀의 세계에선 “텅 빈 손을 내려다보는 패자에게도 메달은 있다.//시간이라는 메달!”이다. 강영은의 사유에 따르면 주어진 동일한 시간 속에서 우리 모두 승자가 되는 셈이다. “이겼다고 시간이 늘어나는” 것도 “졌다고 시간이 줄어드는 것도” 아닌 세계에 살면서 우리는 그저 “순간 속에” 모든 것을 녹여낼 뿐이다.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의 결과물로서 “눈물은 공평”(강영은, 「눈물은 공평하다」)하다.

오세영에게도 죽음이 밀어닥칠 삶이 꼭 비극은 아니다. 죽음이 도래할 삶에서 도피하거나 회피하려 하지 않는다. 죽음이 위협의 물질이 아니라는 그의 사유는 시에서도 넉넉하게 확인된다. “좀 오래 운전하는 길을 택할까./좀 빨리 가는 도로를 택할까./좀 통행료가 적게 드는 코스를 택할까./내비가 제시하는 길은 여러 개인데/출발전 핸들을 손에 쥐고 잠시/생각에 잠”기는 화자에게 “인생은 비즈니스”일 수도 “바캉스”나 “레이스” 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똑같은데,/어차피 목적지는 바로 거긴데/도달해 그분이 물어보면 보고할 이야기가 많은” 상황에 “이것저것,/보고 듣고, 웃고 울고, 만나고 헤어지고/굽이굽이 산 넘고, 물 건너 오래 산천초목 구경하며/느지막이 드라이브하는 길”을 택하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라고 말한다. ‘나’는 “빨리 가고 싶다면 당신, 하이웨이로 가라./나는 천천히/시골길을 가겠다.”고 선언한다. 이 모든 선택이 있던 날은 “하늘 하늘 봄비 내리는 날”(오세영, 「내비게이션」)이다. 비극적 죽음에 대해서마저 발랄하면서도 깊은 철학적 중저음의 목소리를 담아낸 그의 시는 울림 있는 메아리가 되어 우리 영혼을 흔든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죽음’은 미제의 사건일 뿐이며 도래하지 않은 사태로 자리한다. 죽음은 존재를 위협하고 있지 않으므로 우리는 죽음을 ‘무서운 사물’(하이데거, 앞의 책, 240쪽)로 파악할 필요가 없다. 죽음과 불안은 현존재의 어떤 특정한 존재 양식이나 가능성 때문에 빚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엇에 대한 불안이자 무엇으로 인한 불안일 뿐이다. 오세영은 선험 세계가 형성한 비극과 불안 요소 때문에 현존재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개인의 내면생활을 사회로부터 보호하고, 다른 한편으로 그 내면의 관조적 태도를 통하여 다시 사회에의 복귀를 준비”(김우창, 「시를 찾아서―오세영 씨의 새 시집 󰡔벼랑의 꿈󰡕」, 오세영, 󰡔벼랑의 꿈󰡕, 시와시학사, 1991, 104쪽)한다. 그는 “사물과 현상의 껍질을 벗기고 그 본질을 파악할 줄 아는 날카로운 눈을 예비”(김용직, 「생각의 깊이와 感性의 부피」, 오세영, 󰡔불타는 물󰡕, 문학사상사, 1988, 129쪽)하고 있어서 선험의 세계와 사회적 신념이라는 내면을 파멸시키는 폭력이자 피로의 요소로부터 멀어지기를 감행한다. 오세영은 이 모든 선험의 세계에서 벗어나 원시(原始)의 세계로 향하는 초월적 환원을 지향한다. 선입견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우리 자신의 태도를 바탕으로 진실이 드러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 교사였던 외할머니는 1909년생으로 1999년에 생을 마감하셨다. 외할머니는 은비녀에 한복을 입고 항상 목걸이 줄이 달린 돋보기[遠視眼鏡]를 쓰셨다. 또렷하게 무엇이든 보려는 할머니는 원거리에 있는 것도 근거리에 있는 것도 어느 것 하나 흐릿한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과연 제대로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선험의 세계가 가져다주는 것에 대해 불안과 공포 대신 사유의 선택에 따른 결과를 받아들일 용기가 그것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다. 삶이란 검은 비극임에도 불구하고 그럴수록 시의 꽃잎은 더욱 빨갛게 마음을 물들이는 것이 아닐까. 삶과 행위의 모방이 비극(아리스토텔레스, 박문재 옮김,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현대지성, 2021, 27쪽)이기에 ‘나’의 성격과 사상에 따라 시는 특정한 성질을 지닐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세영과 강영은의 시에 내재하는 고독과 실존의 고통은 미학적 변주를 통해 진한 향기를 풍긴다. 두 시인은 원시(遠視)의 시대, 원시(原始)로의 회귀를 통해 그렇게 원시(元詩)로 영원히 우뚝 서있다.

-『문학 청춘』 2024년 겨울호 -기획특집 현대 시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