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 착각과 깨달음의 변주곡/박남희
-<창작21> 계간시평,
인간은 착각의 동물이다. 착각을 한다는 것은 한자풀이대로 말하면 깨달음에 착오가 생긴다는 말이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가 단순명료하지 않은 복합적인 사회라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인간 자신을 들여다보아도 본래 인간의 감각은 그다지 정확하지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바라보는 외계는 객관적인 모습 그대로 우리 눈에 모사되지 않는다. 즉 카메라로 찍은 모습과 우리의 눈을 통해서 지각된 모습은 일치하지 않는다. 이렇듯 우리의 지각은 착각으로 가득 차 있어서 우리에게 변형된 모습을 전달해 줄 뿐이다.
나는 얼마 전 성석제의 단편집을 읽다가 웃음보를 터뜨린 적이 있다. 소설 속의 화자는 그가 즐겨 부르는 노래 「처녀 뱃사공」, “낙동강 강바람이 치마폭을 스치면/꿈인가 놀아보니 소식이 오네~”를 부르면서 특히 “꿈인가 놀아보니 소식이 오네”라는 가사는 유행가를 철학에까지 끌어올린 시적인 가사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본래의 가사는 “군인 간 오라버니 소식이 오네”가 아닌가? 이렇듯 착각은 평범한 가사를 시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오래 전 아내에게서도 들은 적이 있다. 아내는 얼마 전까지 방주연의 ‘자주색 가방’의 가사를 “여고시절 삼년 동안 정들은 자주 샐까봐~”로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어떻게 여고시절에 정들이 자주 새는지 무척 궁금했다고 한다. 이런 것들은 참으로 사오정 기가 다분한 웃기는 이야기들이지만 ‘자주색 가방’을 ‘자주 샐까봐’로 듣는 것은 어쩌면 상상력이 풍부한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특권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시를 쓸 때도 이러한 착각의 감각이 시적인 상상력을 불러오기도 한다. 즉,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는 데서 새로운 상상력은 출발한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만나게 되는 엉뚱한 생각들이 새롭고 참신한 시로 탄생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시인은 신선한 착각을 통해서 평범한 대상이나 언어를 새롭게 만드는 존재이다. 필자가 여기서 ‘신선한 착각’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그것이 부정적인 의미보다는 창조적인 측면에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착각’을 마냥 나무랄 일만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시를 쓸 때 하는 착각은 무의식적인 경우보다는 의도적으로 계산된 경우가 많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비유나 상상력이라는 이름으로 포용해서 시적인 기법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시적인 착각은 ‘의도된 착각’인 셈이다. 시인이 시를 통해서 드러내고 싶어 하는 의도는 그 뒤에 주제를 거느리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 시인은 의도된 착각을 통해서 독자로 하여금 그 착각에 동참하게 한다. 그런데 너무 의도된 착각은 독자에게 금방 들켜버리기 마련이다. 독자를 착각에 빠뜨리기 이전에 시인 자신이 진정한 착각의 세계로 들어가야 좋은 시가 나온다. 즉 시인은 남을 착각에 빠뜨리려는 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진정한 착각의 세계로 빠뜨려서 스스로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자인 것이다. 우리가 시를 읽을 때 의식보다는 무의식에 기대고 있는 시가 훨씬 자연스럽고 풍부하게 느껴지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런 것들은 과학적으로는 규명해 낼 수 없는 시적 자의성의 영역에 속하는 것들이다. 시에는 필연성뿐만 아니라 자의성이 존재한다. 필연성이 시적 논리와 진정성에 관계된다면 자의성은 비논리와 자유로운 상상력에 맥락이 닿아있다. 천양희 시인이 한 순간에 대한 깨달음을 자연현상의 자의적 인과관계에서 찾으려고 했던 것도 어쩌면 생이 단순하게 논리적으로 규명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2~3연에 오면 감자는 “노을을 들춘 마른 번개”, “자주빛 스카프를 두른 여자”, “무덤 속의 고요”등으로 변주되면서 시인이 사랑하는 대상인 ‘당신’을 붙들고 당신을 휘감고 끌어안고 귀에다 속살거리고, 나폴거리는 몸짓으로 당신의 능선을 파고드는, 솔라닌이라는 독을 가진 ‘치명적인 꽃’으로 정의된다. 이러한 감자의 모습은 일차적으로 중년 여인의 흔들리는 실존과 욕망을 드러내는 동시에, 당신, 즉 시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찬 시인 자신을 나타내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 시에서 감자가 “노을을 들춘 마른 번개”가 되어서 “단 한 줄의 문장으로 당신을 붙들고 싶”다고 말하는 것도 이 시의 메타시적인 가능성을 암시해주는 것이다. 감자가 “노을을 들춘 마른 번개”가 되는 일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시적인 비유(착각)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시인이 “노을을 들춘 마른 번개”라는 비유의 탈을 쓰고 만나고 싶어하는 것이 시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충분히 가능해진다. 이처럼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시야말로 참으로 위대한 착각이다.
그건 내가 어딘가로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사라진 나를 몸에 감고
사는 것처럼 살고 걷는 것처럼 걸어온 것이 나이다
우물 속에서 올려다보는 얼굴같이
가졌는데도 꺼낼 수 없는 것.
그것이 날 가지고 다닌다
잊을 수 없는 곳보다 더 확실한 곳에
잊은 것들이 있다
잊은 것들은 다 어디에서 浮上 중이다
괴롭혀야 만나는 것이 나라면
삶은 영원한 고문인가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살기 위해서 고통을 키운 건 아니다
너무도 오랫동안 그리워할 것이 없었으므로
그 때 나는 질척거리는 어둔 거리를
죽은 자의 얼굴을 하고 떠돌았으므로
내 눈은 아픈 자들을 단번에 알아본다
관 속에서 일어난 뼈처럼
아픈 몸을 포박해 끌고 다니는
사라진 자들을 본다
몸이 넝쿨처럼 뻗어 몸부림으로 변할 때
―이영광,「넝쿨」(『현대시학』, 7월호) 전문
이 땅에 사는 존재들은 때때로 자신의 존재를 망각한다. 넓게 보면 망각도 착각의 일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시인은 자신의 존재가 넝쿨처럼 뻗어나가 어디론가 사라진 망각의 존재임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의 시인 자신은 “우물 속에서 올려다보는 얼굴같이/가졌는데도 꺼낼 수 없는 것”이 되어있다. 즉 시인 자신은 넝쿨처럼 어디론가 무수히 뻗어나가 잊혀져 버린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잊혀진 자신의 존재를 다시 불러오기 위하여 자신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어 각성시키기를 원한다. 하지만 시인은 살기 위해서 고통을 키운 건 아니라고 말한다. 그가 고통을 키운 건 “너무도 오랫동안 그리워할 것이 없었으므로” 즉, 고독 때문이다. 그의 고독은 결국 그의 존재를 죽음의 상태에 이르게 한다. 이는 키에르케고르가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말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는 죽은 자가 되어 “아픈 몸을 포박해 끌고 다니는/ 사라진 자들을 본다”. 그들은 시인에게 있어서 타자들이지만, 단순한 타자가 아니라 시인자신이 투영된 타자들이다. 시인에게 있어서 자신의 존재가 넝쿨처럼 뻗어가는 것은 서서히 잊혀져서 죽어가는 일이며, 이를 회복하는 길은 스스로를 고통과 죽음의 상태로 몰아넣어 사라진 자들의 고통을 몸소 체득하는 것이다.
나는 얼마 전 성석제의 단편집을 읽다가 웃음보를 터뜨린 적이 있다. 소설 속의 화자는 그가 즐겨 부르는 노래 「처녀 뱃사공」, “낙동강 강바람이 치마폭을 스치면/꿈인가 놀아보니 소식이 오네~”를 부르면서 특히 “꿈인가 놀아보니 소식이 오네”라는 가사는 유행가를 철학에까지 끌어올린 시적인 가사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본래의 가사는 “군인 간 오라버니 소식이 오네”가 아닌가? 이렇듯 착각은 평범한 가사를 시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오래 전 아내에게서도 들은 적이 있다. 아내는 얼마 전까지 방주연의 ‘자주색 가방’의 가사를 “여고시절 삼년 동안 정들은 자주 샐까봐~”로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어떻게 여고시절에 정들이 자주 새는지 무척 궁금했다고 한다. 이런 것들은 참으로 사오정 기가 다분한 웃기는 이야기들이지만 ‘자주색 가방’을 ‘자주 샐까봐’로 듣는 것은 어쩌면 상상력이 풍부한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특권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시를 쓸 때도 이러한 착각의 감각이 시적인 상상력을 불러오기도 한다. 즉,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는 데서 새로운 상상력은 출발한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만나게 되는 엉뚱한 생각들이 새롭고 참신한 시로 탄생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시인은 신선한 착각을 통해서 평범한 대상이나 언어를 새롭게 만드는 존재이다. 필자가 여기서 ‘신선한 착각’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그것이 부정적인 의미보다는 창조적인 측면에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착각’을 마냥 나무랄 일만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시를 쓸 때 하는 착각은 무의식적인 경우보다는 의도적으로 계산된 경우가 많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비유나 상상력이라는 이름으로 포용해서 시적인 기법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시적인 착각은 ‘의도된 착각’인 셈이다. 시인이 시를 통해서 드러내고 싶어 하는 의도는 그 뒤에 주제를 거느리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 시인은 의도된 착각을 통해서 독자로 하여금 그 착각에 동참하게 한다. 그런데 너무 의도된 착각은 독자에게 금방 들켜버리기 마련이다. 독자를 착각에 빠뜨리기 이전에 시인 자신이 진정한 착각의 세계로 들어가야 좋은 시가 나온다. 즉 시인은 남을 착각에 빠뜨리려는 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진정한 착각의 세계로 빠뜨려서 스스로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자인 것이다. 우리가 시를 읽을 때 의식보다는 무의식에 기대고 있는 시가 훨씬 자연스럽고 풍부하게 느껴지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꿩의바람꽃이 고개를 든다
해가 나오려나 보다
개가 고개 숙이고 저녁밥을 먹는다
개밥바라기별이 뜨려나보다
달개비 마디가 땅에 닿는다
뿌리를 내리려나보다
떡갈나무가 누런 잎을 떨어뜨린다
새싹이 움트려나보다
두 살배기 아기가 처음 말을 한다
6천번을 들었나보다
마침내
세상이 움찔!
한 순간이 없다면 한 생도 없을 것이다
―천양희,「한 순간은 어디서 오나」(『시평』, 여름호) 전문
만물이 소생하고 소멸하는 일들을 길게 보면 일생이지만, ‘깨달음’이라는 각성의 단위로 쪼개어 보면 한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무수한 깨달음의 시간들이 모여서 일생이 되는 것이다. 천양희의 시는 세상만물의 이치를 인과관계로 보면서, 그것들의 만남과 헤어짐이 한 순간이고 그 한 순간이야말로 한 생의 바탕이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꿩의바람꽃이 고개를 드는 행위와 어둠속에서 해가 나오는 현상은 상호 필연적인 것이 아니다. 개가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는 것과 개밥바라기별이 뜨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시인의 ‘의도된 착각’에서 나온 상상력이지만 그 뿌리는 의식보다는 무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떡갈나무 누런 잎이 떨어지는 것이 새싹이 움트는 것과 무관하지 않고, 두 살배기 아기가 처음 말을 하는 것이 그 이전에 6천 번을 들은 것과 전혀 별개의 것은 아니지만, 시인이 6천 번이라는 숫자를 떠올린 것은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사실과는 다른 것이다. 6천 번이라는 숫자는 의식보다는 무의식에 닿아있는 숫자라고 보는 것이 온당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인에게 왜 하필이면 6천 번이냐고 따져 물을 수는 없다.
해가 나오려나 보다
개가 고개 숙이고 저녁밥을 먹는다
개밥바라기별이 뜨려나보다
달개비 마디가 땅에 닿는다
뿌리를 내리려나보다
떡갈나무가 누런 잎을 떨어뜨린다
새싹이 움트려나보다
두 살배기 아기가 처음 말을 한다
6천번을 들었나보다
마침내
세상이 움찔!
한 순간이 없다면 한 생도 없을 것이다
―천양희,「한 순간은 어디서 오나」(『시평』, 여름호) 전문
만물이 소생하고 소멸하는 일들을 길게 보면 일생이지만, ‘깨달음’이라는 각성의 단위로 쪼개어 보면 한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무수한 깨달음의 시간들이 모여서 일생이 되는 것이다. 천양희의 시는 세상만물의 이치를 인과관계로 보면서, 그것들의 만남과 헤어짐이 한 순간이고 그 한 순간이야말로 한 생의 바탕이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꿩의바람꽃이 고개를 드는 행위와 어둠속에서 해가 나오는 현상은 상호 필연적인 것이 아니다. 개가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는 것과 개밥바라기별이 뜨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시인의 ‘의도된 착각’에서 나온 상상력이지만 그 뿌리는 의식보다는 무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떡갈나무 누런 잎이 떨어지는 것이 새싹이 움트는 것과 무관하지 않고, 두 살배기 아기가 처음 말을 하는 것이 그 이전에 6천 번을 들은 것과 전혀 별개의 것은 아니지만, 시인이 6천 번이라는 숫자를 떠올린 것은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사실과는 다른 것이다. 6천 번이라는 숫자는 의식보다는 무의식에 닿아있는 숫자라고 보는 것이 온당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인에게 왜 하필이면 6천 번이냐고 따져 물을 수는 없다.
이런 것들은 과학적으로는 규명해 낼 수 없는 시적 자의성의 영역에 속하는 것들이다. 시에는 필연성뿐만 아니라 자의성이 존재한다. 필연성이 시적 논리와 진정성에 관계된다면 자의성은 비논리와 자유로운 상상력에 맥락이 닿아있다. 천양희 시인이 한 순간에 대한 깨달음을 자연현상의 자의적 인과관계에서 찾으려고 했던 것도 어쩌면 생이 단순하게 논리적으로 규명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놀란 흙 밖에 서 있는,
나는 노을을 들춘 마른 번개, 단 한 줄의 문장으로 당신을 붙들고 싶지
나는 자주 빛 스카프를 두른 여자, 당신의 목덜미를 휘감고 싶지
나는 무덤 속의 고요, 눈썹 아래 당신을 끌어안지
나는 어두운 숲 속의 은사시나무, 바람의 귓바퀴에 대고 속살거리지
나는 한낮의 어지러움, 촘촘히 볼우물에 고이지
나는 젖몸살 앓는 싹눈, 나풀거리는 몸짓으로 말하지
나는 독침, 말랑거리는 바닥에 착지하지
나는 높새바람, 당신의 쇄골, 부드러운 능선을 파고들지
나는 저장해둔 감자, 당신의 심장부에 핀 푸른 솔라닌,
치명적인 꽃이지.
―강영은,「감자의 9가지 변주」(『시안』, 여름호) 전문
시적 주체는 종종 객체가 되어 그것이 가지고 있는 새로운 모습에 자신을 동일화해 보고 싶어 한다. 강영은의 시 역시 감자라는 대상물에 시인 자신을 동일화해서 자신의 내면에 숨어있는 다양한 욕망을 9가지로 변주해내고 있다. 이 시는 전체적으로 은유구조를 지니고 있는 문장들이 환유적 연쇄를 이루면서 시인의 욕망을 섬세한 여성적 감수성으로 변주해내고 있다. 이 시에서 시인 자신의 심리적 대상물인 감자는 “놀란 흙 밖에 서있는”존재라는 점에서 벌거벗은 실존이 강조되고 있다. 감자에 있어서 흙은 생명을 자라나게 하고 꽃과 열매를 맺게 하는 집과 같은 존재이다. 그런데 시인으로 표상되는 감자는 흙, 즉 집 밖에 있다는 점에서 위험한 존재이다.
나는 노을을 들춘 마른 번개, 단 한 줄의 문장으로 당신을 붙들고 싶지
나는 자주 빛 스카프를 두른 여자, 당신의 목덜미를 휘감고 싶지
나는 무덤 속의 고요, 눈썹 아래 당신을 끌어안지
나는 어두운 숲 속의 은사시나무, 바람의 귓바퀴에 대고 속살거리지
나는 한낮의 어지러움, 촘촘히 볼우물에 고이지
나는 젖몸살 앓는 싹눈, 나풀거리는 몸짓으로 말하지
나는 독침, 말랑거리는 바닥에 착지하지
나는 높새바람, 당신의 쇄골, 부드러운 능선을 파고들지
나는 저장해둔 감자, 당신의 심장부에 핀 푸른 솔라닌,
치명적인 꽃이지.
―강영은,「감자의 9가지 변주」(『시안』, 여름호) 전문
시적 주체는 종종 객체가 되어 그것이 가지고 있는 새로운 모습에 자신을 동일화해 보고 싶어 한다. 강영은의 시 역시 감자라는 대상물에 시인 자신을 동일화해서 자신의 내면에 숨어있는 다양한 욕망을 9가지로 변주해내고 있다. 이 시는 전체적으로 은유구조를 지니고 있는 문장들이 환유적 연쇄를 이루면서 시인의 욕망을 섬세한 여성적 감수성으로 변주해내고 있다. 이 시에서 시인 자신의 심리적 대상물인 감자는 “놀란 흙 밖에 서있는”존재라는 점에서 벌거벗은 실존이 강조되고 있다. 감자에 있어서 흙은 생명을 자라나게 하고 꽃과 열매를 맺게 하는 집과 같은 존재이다. 그런데 시인으로 표상되는 감자는 흙, 즉 집 밖에 있다는 점에서 위험한 존재이다.
2~3연에 오면 감자는 “노을을 들춘 마른 번개”, “자주빛 스카프를 두른 여자”, “무덤 속의 고요”등으로 변주되면서 시인이 사랑하는 대상인 ‘당신’을 붙들고 당신을 휘감고 끌어안고 귀에다 속살거리고, 나폴거리는 몸짓으로 당신의 능선을 파고드는, 솔라닌이라는 독을 가진 ‘치명적인 꽃’으로 정의된다. 이러한 감자의 모습은 일차적으로 중년 여인의 흔들리는 실존과 욕망을 드러내는 동시에, 당신, 즉 시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찬 시인 자신을 나타내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 시에서 감자가 “노을을 들춘 마른 번개”가 되어서 “단 한 줄의 문장으로 당신을 붙들고 싶”다고 말하는 것도 이 시의 메타시적인 가능성을 암시해주는 것이다. 감자가 “노을을 들춘 마른 번개”가 되는 일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시적인 비유(착각)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시인이 “노을을 들춘 마른 번개”라는 비유의 탈을 쓰고 만나고 싶어하는 것이 시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충분히 가능해진다. 이처럼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시야말로 참으로 위대한 착각이다.
어느 순간 나는 나를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건 내가 어딘가로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사라진 나를 몸에 감고
사는 것처럼 살고 걷는 것처럼 걸어온 것이 나이다
우물 속에서 올려다보는 얼굴같이
가졌는데도 꺼낼 수 없는 것.
그것이 날 가지고 다닌다
잊을 수 없는 곳보다 더 확실한 곳에
잊은 것들이 있다
잊은 것들은 다 어디에서 浮上 중이다
괴롭혀야 만나는 것이 나라면
삶은 영원한 고문인가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살기 위해서 고통을 키운 건 아니다
너무도 오랫동안 그리워할 것이 없었으므로
그 때 나는 질척거리는 어둔 거리를
죽은 자의 얼굴을 하고 떠돌았으므로
내 눈은 아픈 자들을 단번에 알아본다
관 속에서 일어난 뼈처럼
아픈 몸을 포박해 끌고 다니는
사라진 자들을 본다
몸이 넝쿨처럼 뻗어 몸부림으로 변할 때
―이영광,「넝쿨」(『현대시학』, 7월호) 전문
이 땅에 사는 존재들은 때때로 자신의 존재를 망각한다. 넓게 보면 망각도 착각의 일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시인은 자신의 존재가 넝쿨처럼 뻗어나가 어디론가 사라진 망각의 존재임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의 시인 자신은 “우물 속에서 올려다보는 얼굴같이/가졌는데도 꺼낼 수 없는 것”이 되어있다. 즉 시인 자신은 넝쿨처럼 어디론가 무수히 뻗어나가 잊혀져 버린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잊혀진 자신의 존재를 다시 불러오기 위하여 자신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어 각성시키기를 원한다. 하지만 시인은 살기 위해서 고통을 키운 건 아니라고 말한다. 그가 고통을 키운 건 “너무도 오랫동안 그리워할 것이 없었으므로” 즉, 고독 때문이다. 그의 고독은 결국 그의 존재를 죽음의 상태에 이르게 한다. 이는 키에르케고르가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말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는 죽은 자가 되어 “아픈 몸을 포박해 끌고 다니는/ 사라진 자들을 본다”. 그들은 시인에게 있어서 타자들이지만, 단순한 타자가 아니라 시인자신이 투영된 타자들이다. 시인에게 있어서 자신의 존재가 넝쿨처럼 뻗어가는 것은 서서히 잊혀져서 죽어가는 일이며, 이를 회복하는 길은 스스로를 고통과 죽음의 상태로 몰아넣어 사라진 자들의 고통을 몸소 체득하는 것이다.
이렇듯 시인은 무감각해지는 세상에 대한 감각을 깨우기 위해 스스로를 고통에 몰아넣어 죽음에 이르는 자들이다. 진정한 죽음에 이르지 않고는 삶의 심연에 있는 고통의 본질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통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죽음의 심연에서 삶의 본질을 깨닫게 해준다.
2005년 7월 27일, 19시 43분, 접시의 고용주
시간을 붙들고 있던 손을 놓치는 찰나, 못내 아꼈던 유리 접시를 떨어트렸다. 가장 예리한 불안이 오른쪽 발등의 정수리를 정확히 겨냥해서 목을 비트는 순간, 마침내 기다렸다는 듯 피톨들이 일제히 터져 오르며 핏방울이 후두둑 얼굴을 후려쳤다.
같은 날 같은 시각, 고용된 유리 접시
몸무게를 늘리지 않으려 안간힘 쓰며 안전한 크기에서 꿈을 부풀리던 약속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지글거리는 참조기의 싱싱한 금비늘로 도색해 뿜어내던 구릿빛 도금 피부, 군침 나게 바라보던 그들의 시선이 지금도 느껴진다. 하얀 생크림을 꽃화관으로 올린 잘 구어진 데코레이션케익으로 온 몸 치장하던 생일파티도 있었다. 타액보다 진하고 부드럽게 감겨오던 복숭아 화채의 감촉이란. 미끄러질듯 풍금소리로 퉁겨주던 8월의 소나기, 잘 씻긴 포도알들이 분방하게 뒹구는 여름날의 변주는 어떠했던가. 옥수수 섬모가 간지럼을 태울 때마다 자지러지던 가을 오후와의 유희, 겨우내 장식장에서 애저린 동면의 일기를 넘기던 날들도 물론 있었다. 누구를 저미게 기다리며 누구의 절실히 원하는 잠시의 누가 되며 그 때마다 다르게 불리워지는 단 몇 줄의 이름이라도 내 한 몸이 꽉 차는 욕망으로 채워지던 시절은 생애의 가장 긴 행복이었다.
같은 날 다른 시각, 다시, 접시의 고용주
눌러도 눌러도 피가 멈추지 않는다. 너를 깨트린 나에게 너는 이제 흉기가 되어있다. 깨지지 않을 때까지만 나는 너에게 누구였다. 깨지지 않을 때까지만 가끔의 나의 누구가 될 수 있는 순서였다. 깨지는 관계의 순간부터 우린 파기된 운명의 잔해가 된다. 신들린 손끝으로 산산 조각난 사체를 꼼꼼히 수습한다. 증거를 인멸한다. 우리의 시대가 방금 지나갔다.
―김명원,「접시를 깨트리다」(『창작21』, 여름호) 전문
현대는 인간뿐만 아니라 사물들도 관계성 속에서 그 존재가치를 인정받는 시대이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 사물과 사물 간의 관계는 그들만의 특수한 환경에 의해서 지배를 받게 된다. 그것이 평등한 관계인지 주종관계인지 하는 것도 이런 상황들과 무관하지 않다. 김명원의 시는 접시의 고용주와 접시와의 관계를 통해 남녀관계의 성립과 파괴의 과정을 매우 리얼하게 보여준다. 접시 고용주에게 있어서 접시는 효용성의 측면에서만이 가치가 있다. 접시가 깨어지면 그 효용성은 깨끗이 사라지게 된다. 아니 가치가 사라지는 차원을 떠나서 오히려 해가 되기도 한다. 이 시의 1연과 3연의 주체는 고용주이지만, 이 시의 중심은 접시가 주체가 된 2연에 있다고 생각된다. 여기서 접시는 시인 자신을 포함한 ‘깨어지기 쉬운 여성’모두를 상징한다.
시간을 붙들고 있던 손을 놓치는 찰나, 못내 아꼈던 유리 접시를 떨어트렸다. 가장 예리한 불안이 오른쪽 발등의 정수리를 정확히 겨냥해서 목을 비트는 순간, 마침내 기다렸다는 듯 피톨들이 일제히 터져 오르며 핏방울이 후두둑 얼굴을 후려쳤다.
같은 날 같은 시각, 고용된 유리 접시
몸무게를 늘리지 않으려 안간힘 쓰며 안전한 크기에서 꿈을 부풀리던 약속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지글거리는 참조기의 싱싱한 금비늘로 도색해 뿜어내던 구릿빛 도금 피부, 군침 나게 바라보던 그들의 시선이 지금도 느껴진다. 하얀 생크림을 꽃화관으로 올린 잘 구어진 데코레이션케익으로 온 몸 치장하던 생일파티도 있었다. 타액보다 진하고 부드럽게 감겨오던 복숭아 화채의 감촉이란. 미끄러질듯 풍금소리로 퉁겨주던 8월의 소나기, 잘 씻긴 포도알들이 분방하게 뒹구는 여름날의 변주는 어떠했던가. 옥수수 섬모가 간지럼을 태울 때마다 자지러지던 가을 오후와의 유희, 겨우내 장식장에서 애저린 동면의 일기를 넘기던 날들도 물론 있었다. 누구를 저미게 기다리며 누구의 절실히 원하는 잠시의 누가 되며 그 때마다 다르게 불리워지는 단 몇 줄의 이름이라도 내 한 몸이 꽉 차는 욕망으로 채워지던 시절은 생애의 가장 긴 행복이었다.
같은 날 다른 시각, 다시, 접시의 고용주
눌러도 눌러도 피가 멈추지 않는다. 너를 깨트린 나에게 너는 이제 흉기가 되어있다. 깨지지 않을 때까지만 나는 너에게 누구였다. 깨지지 않을 때까지만 가끔의 나의 누구가 될 수 있는 순서였다. 깨지는 관계의 순간부터 우린 파기된 운명의 잔해가 된다. 신들린 손끝으로 산산 조각난 사체를 꼼꼼히 수습한다. 증거를 인멸한다. 우리의 시대가 방금 지나갔다.
―김명원,「접시를 깨트리다」(『창작21』, 여름호) 전문
현대는 인간뿐만 아니라 사물들도 관계성 속에서 그 존재가치를 인정받는 시대이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 사물과 사물 간의 관계는 그들만의 특수한 환경에 의해서 지배를 받게 된다. 그것이 평등한 관계인지 주종관계인지 하는 것도 이런 상황들과 무관하지 않다. 김명원의 시는 접시의 고용주와 접시와의 관계를 통해 남녀관계의 성립과 파괴의 과정을 매우 리얼하게 보여준다. 접시 고용주에게 있어서 접시는 효용성의 측면에서만이 가치가 있다. 접시가 깨어지면 그 효용성은 깨끗이 사라지게 된다. 아니 가치가 사라지는 차원을 떠나서 오히려 해가 되기도 한다. 이 시의 1연과 3연의 주체는 고용주이지만, 이 시의 중심은 접시가 주체가 된 2연에 있다고 생각된다. 여기서 접시는 시인 자신을 포함한 ‘깨어지기 쉬운 여성’모두를 상징한다.
“몸무게를 늘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안전한 크기에서 꿈을 부풀리던 약속의 시대”는 여성이 남성적 눈높이에 맞추어서 다이어트를 하며 자신의 꿈의 용량을 제한해야만 하는 현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이러한 시대는 필연적으로 남녀 권력의 불균형의 시대이며 결국은 접시로 상징되는 여성이 파괴될 수밖에 없는 시대인 것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시인이 고용주로 상징되는 남성에 대한 증오나 피해의식보다는, 접시로 상징되는 여성적 삶에 대한 추억과 욕망을 긍정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본질적으로 시인이 기존의 남성중심적 가치관을 극복하고 성적 욕망을 포함한 여성의 욕망을 매우 건강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옥수수 섬모가 간지럼을 태울 때마다 자지러지던 가을 오후와의 유희”라든가, “누구를 저미게 기다리며 누구의 절실히 원하는 잠시의 누가 되며 그 때마다 다르게 불리워지는 단 몇 줄의 이름이라도 내 한 몸이 꽉 차는 욕망으로 채워지던 시절은 생애의 가장 긴 행복이었다.”는 진술은 시인자신의 욕망을 억압하지 않고 건강하게 표출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러나 이 시는 이러한 행복했던 관계가 성립되던 시대는 접시가 깨어짐으로서 끝이 났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시인은 접시가 단지 깨어지는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고용주에게 흉기가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시인의 태도는 여성이 단지 수동적인 피해자의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가 될 수도 있음을 암시해 주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그리하여 시인의 관점에서 보면 남성중심의 착각의 시대는 막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인에 의하면 남녀가 사랑하는 것은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욕망을 일정한 관계성 속으로 귀속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서로간의 약속 안에서 이루어지게 되지만 그러한 약속의 이면에는 착각이 존재하기 때문에 어느 순간 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순간적인 욕망의 산물일 뿐이다.
달이 나를 따라오고 있다는 생각,
오래전에 아주 내다 버린 줄 알았는데
산성 길 걷다가 마주친 열나흘 좋은 달
자꾸 나를 따라오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거듭 생각되며 나는 또 부푸는 것이었으니
이 허공에 나를 드리워주시는 이 손길은
나를 얕잡아 헛생각 또 넣어주시는 것이리
얕잡아 보는 눈길, 한두 번 받은 것 아니니
울먹이다 그치고 하늘 한 번 우러르면 되지만
이렇게 자꾸 따라오는 좋은 달을 어찌하나
이 흥 깨고 나면 구만리 밤길을 어이 갈까
이 길 다 가도록 헛생각 오래 탱탱했으면
이 길 다 가도록 헛생각 오래 밝았으면.
―한영옥,「헛생각, 오래 밝았으면」(『시와 세계』, 여름호) 전문
시와 사랑뿐만 아니라 인생의 모든 것들이 헛생각의 산물이다. 이 시에서 헛생각은 현실 너머에 존재하는 꿈이나 욕망을 상징한다. 이러한 헛생각 역시 착각의 산물이다. 시인은 헛생각으로 표상되는 달이 자신을 자꾸만 따라오고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다. 여기서의 달은 구체적으로 여성적 욕망을 가리키고 있다. ‘열나흘 좋은 달’은 인생으로 말하면 보름달이 뜨는 창창한 시절이다. 그런데 시인은 이러한 헛생각이 “허공에 나를 드리워 주시는 그 손길”이 “나를 얕잡아 헛생각을 넣어주시는 것”과 다른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어찌 보면 신앙적 절대자를 향한 반항으로 읽힐 수도 있는 이러한 표현은, 두 번째 연의 “이렇게 자꾸 따라오는 좋은 달을 어찌하나/ 이 흥 깨고 나면 구만리 밤길을 어이 갈까”라는 구절로 인해서 반전을 이루고 있다. 절대자가 자신을 얕잡아 본다는 생각과 ‘좋은 달’을 그냥 흘려보낼 수 없다는 시인의 생각이 상충되는 지점에 이 시의 묘미가 있다.
오래전에 아주 내다 버린 줄 알았는데
산성 길 걷다가 마주친 열나흘 좋은 달
자꾸 나를 따라오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거듭 생각되며 나는 또 부푸는 것이었으니
이 허공에 나를 드리워주시는 이 손길은
나를 얕잡아 헛생각 또 넣어주시는 것이리
얕잡아 보는 눈길, 한두 번 받은 것 아니니
울먹이다 그치고 하늘 한 번 우러르면 되지만
이렇게 자꾸 따라오는 좋은 달을 어찌하나
이 흥 깨고 나면 구만리 밤길을 어이 갈까
이 길 다 가도록 헛생각 오래 탱탱했으면
이 길 다 가도록 헛생각 오래 밝았으면.
―한영옥,「헛생각, 오래 밝았으면」(『시와 세계』, 여름호) 전문
시와 사랑뿐만 아니라 인생의 모든 것들이 헛생각의 산물이다. 이 시에서 헛생각은 현실 너머에 존재하는 꿈이나 욕망을 상징한다. 이러한 헛생각 역시 착각의 산물이다. 시인은 헛생각으로 표상되는 달이 자신을 자꾸만 따라오고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다. 여기서의 달은 구체적으로 여성적 욕망을 가리키고 있다. ‘열나흘 좋은 달’은 인생으로 말하면 보름달이 뜨는 창창한 시절이다. 그런데 시인은 이러한 헛생각이 “허공에 나를 드리워 주시는 그 손길”이 “나를 얕잡아 헛생각을 넣어주시는 것”과 다른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어찌 보면 신앙적 절대자를 향한 반항으로 읽힐 수도 있는 이러한 표현은, 두 번째 연의 “이렇게 자꾸 따라오는 좋은 달을 어찌하나/ 이 흥 깨고 나면 구만리 밤길을 어이 갈까”라는 구절로 인해서 반전을 이루고 있다. 절대자가 자신을 얕잡아 본다는 생각과 ‘좋은 달’을 그냥 흘려보낼 수 없다는 시인의 생각이 상충되는 지점에 이 시의 묘미가 있다.
어찌 보면 이 두 가지 생각은 모두 시인의 착각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시인의 착각은 건강하고 생산적이라는 점에서 위대한 착각이다. 시인의 이러한 착각이 시를 쓰게 한다. 헛생각이 끝나는 날 시인의 생명도 끝나게 된다. 현실이 어둠이 드리운 밤길이라면 헛생각처럼 떠있는 달이야말로 밤길을 무사히 가게 하는 길잡이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쌀을 씻다가 달이 우는 소리를 듣습니다
시커멓게 탄 밤을 밥으로 잘못 읽은 모양입니다 달은, 아무래도 몰락해버린 공산주의자들을 위한
밥상머리 같습니다
쌀을 씻다가 살이 운다는 말을 떠올렸습니다 사내는 녹슨 수도꼭지처럼 입을 잠급니다
아내가 없다는 게 다행인 줄 모르겠습니다 쌀보다 살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밥보다 물이라고 받아쓰다
지우고,
사내에게 고독이란 밥으로 더럽힐 수 없는 쌀의 언어입니다 사락사락 함께 밤을 지새울 여자가 있다면
처녀가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밥이 똥의 화장발이라는 걸 이미 눈치챈 사내입니다
쌀과 밥의 관계를 불륜이라며 거품 무는 물의 잠자리가 끓어오릅니다
오늘도 변함없이 부족한 물속에서 살이 만져지는 밤입니다
달이 생쌀 씹는 소리를 듣습니다
―김륭,「쌀 씻는 남자」(『유심』, 여름호) 전문
여자가 없이 혼자 사는 사내는 밤에 쌀을 씻다가 달이 우는 소리를 듣게 된다. 그런데 이 시에 나오는 달이 우는 것은 “시커멓게 탄 밤을 밥으로 잘못 읽은 모양”이라고 하여, 달이 지금은 없는 아내와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 시의 “몰락해버린 공산주의자”는 홀애비로 전락해버린 시적 화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이것은 쌀을 씻는 시적 화자의 모습과 연결되어서 가부장적 남성 권위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2연에서 사내가 “쌀을 씻다가 살이 운다는 말을 떠올”리는 것이나 “쌀보다는 살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밥보다는 물이라고 받아쓰다” 지우는 행위는 그에게 있어서 밥에 대한 필요성보다는 ‘살’이나 ‘달’로 상징되는 여자에 대한 그리움이 훨씬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내에게 고독이란 밥으로 더럽힐 수 없는 쌀의 언어”이며 “밥이 똥의 화장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시인이 ‘밥’과 ‘쌀’을 구분해서 ‘쌀’의 가치를 우위에 두는 것은 ‘쌀’이 ‘살’과 같은 의미로 전이되어서 그가 그리워하는 여인의 제유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연에서 “쌀과 밥의 관계를 불륜”이라고 보는 것은 미혼과 기혼의 관계를 불륜으로 보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밥이 결혼을 통한 완전히 익은 사랑이라면 쌀은 아직 익기 전인, 사랑의 초기단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내가 쌀을 씻는 행위는 다시 사랑을 시작하는 행위의 은유적 표현으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증거는 이 시의 중간에 “사락사락 함께 밤을 지새울 여자가 있다면”이라는 표현속의 ‘사락사락’이라는 의성어가 쌀을 씻는 소리라는 것에서도 발견된다.
시커멓게 탄 밤을 밥으로 잘못 읽은 모양입니다 달은, 아무래도 몰락해버린 공산주의자들을 위한
밥상머리 같습니다
쌀을 씻다가 살이 운다는 말을 떠올렸습니다 사내는 녹슨 수도꼭지처럼 입을 잠급니다
아내가 없다는 게 다행인 줄 모르겠습니다 쌀보다 살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밥보다 물이라고 받아쓰다
지우고,
사내에게 고독이란 밥으로 더럽힐 수 없는 쌀의 언어입니다 사락사락 함께 밤을 지새울 여자가 있다면
처녀가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밥이 똥의 화장발이라는 걸 이미 눈치챈 사내입니다
쌀과 밥의 관계를 불륜이라며 거품 무는 물의 잠자리가 끓어오릅니다
오늘도 변함없이 부족한 물속에서 살이 만져지는 밤입니다
달이 생쌀 씹는 소리를 듣습니다
―김륭,「쌀 씻는 남자」(『유심』, 여름호) 전문
여자가 없이 혼자 사는 사내는 밤에 쌀을 씻다가 달이 우는 소리를 듣게 된다. 그런데 이 시에 나오는 달이 우는 것은 “시커멓게 탄 밤을 밥으로 잘못 읽은 모양”이라고 하여, 달이 지금은 없는 아내와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 시의 “몰락해버린 공산주의자”는 홀애비로 전락해버린 시적 화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이것은 쌀을 씻는 시적 화자의 모습과 연결되어서 가부장적 남성 권위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2연에서 사내가 “쌀을 씻다가 살이 운다는 말을 떠올”리는 것이나 “쌀보다는 살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밥보다는 물이라고 받아쓰다” 지우는 행위는 그에게 있어서 밥에 대한 필요성보다는 ‘살’이나 ‘달’로 상징되는 여자에 대한 그리움이 훨씬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내에게 고독이란 밥으로 더럽힐 수 없는 쌀의 언어”이며 “밥이 똥의 화장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시인이 ‘밥’과 ‘쌀’을 구분해서 ‘쌀’의 가치를 우위에 두는 것은 ‘쌀’이 ‘살’과 같은 의미로 전이되어서 그가 그리워하는 여인의 제유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연에서 “쌀과 밥의 관계를 불륜”이라고 보는 것은 미혼과 기혼의 관계를 불륜으로 보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밥이 결혼을 통한 완전히 익은 사랑이라면 쌀은 아직 익기 전인, 사랑의 초기단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내가 쌀을 씻는 행위는 다시 사랑을 시작하는 행위의 은유적 표현으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증거는 이 시의 중간에 “사락사락 함께 밤을 지새울 여자가 있다면”이라는 표현속의 ‘사락사락’이라는 의성어가 쌀을 씻는 소리라는 것에서도 발견된다.
이 시를 전체적으로 음미해보면 “밥이 똥의 화장발”이라는 것을 모르고 착각한 데서부터 사랑의 비극이 시작되었음이 드러난다. 하지만 사내가 또 다시 쌀을 씻는 것은 착각 속에도 사랑의 본질이 숨어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사내의 이러한 용기는 “밥이 똥의 화장발”이라는 사랑의 환상에 대한 깨달음과 무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사랑은 착각을 불러오고 착각은 환상을 낳는다. 하지만 이러한 착각이나 환상이 사랑의 본질은 아니다. 이러한 것들은 다만 인간을 사랑으로 인도하는 도구일 뿐이다. 만약 인간에게 착각과 환상이 없다면 인간은 매우 이성적이 되어서 쉽게 사랑을 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시를 쓸 때도 창조적인 착각은 매우 유용한 도구가 된다. 착각이 시를 낳고 사랑을 낳는다. 우리가 생의 기로에서 문득문득 마주치는 깨달음은 환상과 착각의 불완전성을 온전하게 해준다. 착각과 깨달음의 끊임없는 변주야말로 창조성의 근본이며, 위대한 생의 바이오리듬이다. 나도 오늘 밤 사각사각 쌀을 씻고 싶다.
*<창작 21> 2008년 겨울호
*박남희: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1996)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1997) 고려대. 숭실대 강사 일산문학학교 시창작반 강사 시집 <폐차장 근처> <이불 속의 쥐> 2005년 문학과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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