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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머의 리뷰

[이 詩를 읽는다] 기술 비판 — 존재의 탈은폐/조영환(시인)

by 너머의 새 2016. 4. 4.

복제양 시대/강영은 (계간「시와정신」2010년 여름호



소녀 인형은 일주일 만에 요절했다.

사인(死人)에 대해서, 생명체의 수명을 관할하는 기쁨의 길이가 짧아졌다는 말이 돌았다. 다 자란 어미의 슬픔만 복제했다는 미확인 이야기도 있었다. 어떤 의사가 그녀의 아버지라는 말이 떠돌았지만 맞춤형 유전자만 삼키는 그녀의 편식에 대해 천국이 가까워졌다고, 불임의 지구가 들썩거렸다.


늦은 밤, 동대문 시장을 지나다보면 아이들이 가두무대에 올라 루미나리에의 불빛을 훔친다. 밤의 자궁 속에서 소녀시대를 복제하고 거꾸로 가는 춤을 복제하는 동안 혈통을 잃어버린 불빛을 마약처럼 흡입한다. 어둠이 난자(卵子)처럼 분열하는 공원 벤치.

잔소리 많은 엄마와 무관심한 아빠의 배아를 바꾸고 싶어 그들은 팔다리만 생산하는 대리모의 방으로 돌아갈지 모른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인형들이 공원 빈터나 운동장에서 어미젖을 차고 노는 동안, 당신은 나는 상한 젖을 보관할 냉장고를 닦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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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기술 비판 — 존재의 탈은폐



조 영 환




이 詩를 읽고 저도 모르게 '경악'이란 말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 단어야말로 이 詩의 분위기를 뭉뚱그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낱말이 아닐는지요. 현대의 기술문명 사회의 상징인 이 詩의 시적 공간은 지옥을 연상시킬 만큼 너무도 암울하고 공허합니다. "소녀 인형이 일주일 만에 요절"하지만 사인(死因)조차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더욱 암울한 까닭은 인간을 오직 기능성 인형으로 취급하는 생명의 존엄성 경시, 그리고 죽음마저도 조롱하는 사회의 분위기 때문이지요. 모든 생명체의 어머니인 지구, 그러나 맞춤형 유전자 복제 시대에 불임의 존재로 전락해 버린 지구는 이제 '이류의 종말이 곧 천국의 도래(到來)'라고 냉소합니다.
아이들은 "밤의 자궁" 속에서 "혈통이 없는 불빛을 마약처럼 흡입"하고 "소녀시대"와 "거꾸로 가는 춤"을 "복제"할 뿐입니다. 가족이나 가족의 사랑 따위는 전혀 필요하지도 않은 아이들. "어미젖"으로 표상되는 인류의 절대가치인 모성조차도 미래의 아이들에게는 공원 빈터나 운동장에서 "차고 놀" 유희의 대상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사랑 대신 루미나리에의 불빛을 먹고 오직 기술문명의 껍데기 복제와 흉내 내기에 열중합니다. 그것이 그들의 중요한 삶의 방식이요, 존재 의의인 것이지요. 그러나 자연과 생명, 그리고 가족의 사랑으로부터 절연된 아이들은 루미나리에처럼 텅 빈 화려한 존재입니다.
시인은 절망적인 시대가 된 이유에 사유의 초점을 맞추는 대신 다만 경악합니다. 그리고 기술문명의 지배 아래 존재자 전체가 그 본질을 상실한 것을 냉소합니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경악'과 '니힐리즘의 경험'이야말로 존재의 탈은폐의 길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발전시킨 기술문명에 의해 스스로가 도구화 내지 대상화함으로써 결국 인간존재의 본질이 은폐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존재자가 존재를 떠난 상태, 즉 '존재이탈'이 일어난 것이지요. 그러나 은폐된 본질의 드러남, 즉 존재의 탈은폐는 인간이 기술문명의 폐해를 인식하는 바로 그 순간 시작됩니다. 기술문명의 지배 아래에 있을 때는 경악과 니힐리즘의 경험조차 발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詩의 "아이들"이 자신이 텅 빈 존재라는 것, 즉 존재자가 존재를 이탈했음을 경험한다면 바로 이 "존재 망각의 경험"이 스스로의 존재 위기 인식으로 이어져 존재의 진리를 깨닫는 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존재의 탈은폐가 이루어졌을 때, 다시 말해서 존재를 떠났던 존재자가 다시 존재에 깃들일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그렇게 되면 "현존재의 경악이 경이와 기쁨으로 전환"됩니다. '불안의 밝은 밤'에 현존재가 '존재자가 있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되는 현상, 그것을 하이데거는 한마디로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 조영환

• 동국대 국문학과 졸업.
• 2009년《다시올문학》으로 등단.
• 흰뫼문학회 동인.
• 현재 서울 숭실고등학교 재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