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와 실존
- 강영은, 『최초의 그늘』(시안, 2011)
고봉준
1.
밤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면 이따금씩 책장에 꽂혀 있는 시집들 가운데 하나를 무심코 펼쳐들고 잠을 청한다. ‘무심코’라고 말했지만, 수많은 시집들 중 내가 펼쳐드는 시집들의 수는 지극히 제한적이다. 그 시집들 가운데 하나인『기형도 전집』을 꺼내어 「엄마 걱정」이라는 시를 읽는다. 기형도 시의 특징 중 하나는 젊은 나이에 이미 세상을 다 산 것 같은 조로(早老)의 언어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나는 그런 조로의 언어들보다는 불 꺼진 캄캄한 빈방에서 열무를 팔러 시장에 간 엄마를 기다리며 혼자 엎드려 훌쩍이는, 공포에 포박당한 아이의 내면을 표현한「엄마 걱정」을 좋아한다. 실상 이 시에서 ‘아이’가 걱정해야 할 대상은 ‘엄마’가 아니라 홀로 남겨진 자신인데, 시인은 유년이라는 “아주 먼 옛날”을 떠올리면서 걱정의 대상을 ‘엄마’로 바꿔놓았다. 사실 이 시를 반복해서 읽는 이유는 시를 다 읽고 난 후, 그러니까 책을 덮어 책꽂이에 꽂고 난 뒤에도 설명하기 어려운 여운이 길게 남기 때문이다. 이 시에 등장하는 언어들이 세련되었다거나 시의 이미지 자체가 파격적이거나 실험적이어서 흥미로운 것이 아니라, 오직 그 알 수 없는 느낌 때문이다. 이 시는 지극히 평범한 단어들을 이용해서 별달리 인상적이지도 않은 상황의 느낌을 표현하고 있지만, 그것들의 잔상은 꽤 오래 지속된다.
시는 언어의 예술이다. 시가 언어의 예술이라는 이 일반적인 규정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을 듯 하다. 그렇지만 여기서 말하는 ‘언어’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은 어떠한 것인지를 끈질기게 추적하려는 사람들은 의외로 드물다. 이를테면 그것은 근대 이후의 미학이 예술을 정의하기 위해 끌어들인 물질성, 즉 회화는 색채의 예술이고, 음악은 소리의 예술이며, 문학은 언어의 예술이라고 정의할 때의 그 ‘언어’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 또한 ‘문학’ 일반에서 ‘언어’가 강조되는 맥락과 시가 ‘언어’ 예술이라고 말할 때의 그것 역시 같지 않다. 시어의 성격은 산문의 언어와 본질적으로 다르며, 그것은 습작단계의 아마추어들이 종종 현혹되듯이 언어에 인위적인 음악성을 부여한다거나 산문적인 진술에서 문법적인 요소들을 제거함으로써 얻어지는 특유의 생략적 어법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시적 언어는 산문의 언어에 무엇인가가 더해지거나, 반대로 어떤 요소가 제거된다고 해서 탄생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것은 전후의 일부 모더니스트들이 그러했듯이 ‘뜨락’, ‘테라스’ 같은 생경한 외래어를 사용하거나, 90년대 이후 몇몇 시인들이 보여준 것처럼 순 우리말이나 고어(古語)를 되살려 쓴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시적 언어와 산문적 언어는 어떻게 다른가? 일반적으로 산문적 언어가 상징 질서의 세계에 포함되는, 하여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의미’를 표현․ 전달하는 수단에서 자유롭지 못한 반면, 시적 언어는 사물과의 관계, 즉 지시적 기능은 물론 상징 질서의 일부인 ‘의미’와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언어 아닌 언어의 성격을 띤다. 이것은 시의 언어가 지시적․ 재현적 기능의 너머에서 발화되는 것임을 의미한다.
또 하나, 장르로서의 시에 관한 이해에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시의 발생이 최소 두 가지의 상이한 기원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시는 내적인 에너지가 바깥으로 표현되는 자아적 세계로서의 발화이거나, 반대로 외부적인 것에 의해 촉발되는 비자아적․ 비의지적인 타자적 세계로서의 응답 가운데 하나일 수밖에 없다. 둘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문학적으로 뛰어난 것인가를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시의 두 가지 기원, 즉 자아적 언어와 타자적 언어는 세계의 차원에서 분명하게 구분된다. 전자의 경우, 시는 감정과 고백의 스타일에 가깝고, 후자의 경우, 시는 타자의 말 건넴에 대한 반응이거나, 다소 극단적으로 말하면 비자발적이고 비의지적인 발화의 일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시(詩)가 자기 체험의 언어화 과정이라고 정의하는 것, 나아가 진정성에 근거한 시인 자신의 감정의 순정한 고백적 표현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타자적 언어의 가능성을 봉쇄해버리는 절반의 진실에 불과하다.
2.
강영은은 ‘언어’의 시인이다. ‘언어’에 대한 자의식, 개성적인 언어의 발견을 위해 고심한 흔적들이 그녀의 시편들 도처에 흩뿌려져 있다. 물론, 언어에 관한 이러한 강조는 어떤 희생의 대가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시인이 ‘언어’를 얻기 위해 희생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세계’이다.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시인들은 대개 일정한 시기 동안 특정한 문제의식에 이끌리면서 창작을 한다. 한 권의 시집은 그러한 문제의식의 강렬함이 응 집된 결과물로 생산된다. 하여, 전문독자인 비평가들은 시인들의 문제의식이 어떠한 방향으로 변화를 거듭해왔는지, 또한 어느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는가를 염두에 두고 읽으려는 경향을 본능적으로 소유하고 있다. 이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시인의 세계인식과 사유의 궤적으로 고스란히 드러내는 문제의식이 ‘언어’에 관한 사유와 평행을 이루는 행복한 경우보다는 그것들의 불균형에서 오는 조화의 부재가 빈번하게 발견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균형은 특히 주제적인 ‘문제의식’과 ‘언어(표현)’에 대한 자의식 가운데 하나에 더 많은 에너지를 투여했을 때 도드라진다. ‘언어’가 뒷받침되지 않는 ‘세계’의 앙상함과, ‘세계’가 없는 공허한 ‘언어’의 남발은, 모든 시인들이 궁극적으로 피하고 싶은 딜레마이지만, 뒤집어 말하자면 이러한 딜레마에서 자 유로운 시인들의 수는 그다지 많지 않다. 이러한 문제는 흔히 ‘무엇을 쓸 것인가’와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간단하게 요약되지만, 시(詩)의 궁극적인 운명은 둘 가운데 어떤 것을 선택할 수 없다는, 둘 가운데 어떤 것을 포기할 수 없다는 곤혹스러움 속에서 발화되는 것에 있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벚나무들만 병사처럼 도열해 있네 철길 위로 흩날리는 벚꽃들, 애인의 눈썹같이 달라붙어 좋지, 정말 좋지, 속삭이는 풍경은 미간 따라 달리네
흰 나비 떼를 날려 보내는 기 다림은 꽃으로 피네 날아가 앉을 곳 없는 붉은 지붕은 굳어진 어깨를 펴고 개찰구를 나서는 사람들의 파안(破顔)은 벚꽃으로 터지네
두 줄기 평행선을 굴려온 바퀴는 여전히 나란한데 오래 발목 디딘 간이역이 아닌 듯 낡아가는 역사(驛舍)의 한 모퉁이가 활짝 피네
장목터널 지나 벚꽃터널 어디쯤 스무 살 적 당신이 서 있을지 몰라, 더듬어 찾아간 터널이 한 순간 환해지네 나는 그때 아주 어린 소녀였고 당신을 스쳐지 나 갔을 뿐
웅크린 잠 속에서 만개한 내가 벚꽃인지, 벚꽃이 나인지, 아침부터 밤까지 바퀴 굴리는 벚나무의 고독한 영혼도 청춘의 날개 접은 사랑도 꽃꿈을 꾸는 여기는 진해역
만(灣)으로 이어질 듯 뻗은 선로와 플랫폼, 임시매표소가 반갑게 맞아주는 종착역을 향해 벚꽃열차는 달리네 이 세상이 아닌 듯, 아닌 듯, 눈부신 봄 속으로 진입하네
- 「벚꽃열차」 전문
강영은이 ‘언어’의 시인이라고 말할 때, 것은 정확하게 ‘언어’에 대한 관심이 ‘세계’에 대한 관심을 대체하거나 압도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시인이 ‘세계’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현재적 상황에 최대한 충실함으로써 상황 자체에 시인의 실존적 가치를 투여하는 방식으로 시가 씌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가령 인용시를 보자. 이 시의 공간적 배경은 ‘진해역’이다. 화자는 지금 벚꽃열차를 타고 진해역에 도착했다. 물론 6연의 내용을 근거로 판단해보면 이 열차의 종착역은 ‘진해역’이 아니며, 따라서 시인이 진해역에 도착했다는 것은 ‘종착역’을 향해 달리는 기차가 잠시 진해역에 정차했다는 의미로 읽어야 할 것이다. 이 시는 진해역에 도착한 화자의 시선에 포착된 풍경들을 ‘언어’로 포획하는 일련의 과정을, 나아가 풍경 자체에 시인의 주관적 감정을 색칠하는 방식으로 발화되고 있다. 역에 도착한 시인이 처음 목격한 것은 사람들 대신 “병사처럼 도열”해 있는 벚나무들이다. 그리고 “철길 위로 흩날리는 벚꽃들”이 시인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런데 다음 순간 시인은 “철길 위로 흩날리는 벚꽃들”이라는 객관적인 진술을 “애인의 눈썹같이 달라붙어 좋지”라고 다시 쓴다. 여기에서 전자가 객관적인 풍경의 세계를 가리킨다면, 후자는 그 풍경을 시적인 방식으로 전유하는 비유적 과정에 속한다. 다시 말해서 시인은 객관적인 풍경 자체를 비유적 표현으로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비유적 대체의 과정이 대상으로서의 풍경에 시인의 실존적 가치를 투사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도 있으며, 동시에 객관적 대상의 세계를 주관화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시인이 시적인 것의 성취를 이러한 비유적 과정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 다시 말해 객관적인 것이 먼저 존재하고 그것을 주관적인 비유의 방식으로 전유하는 것이 시의 핵심이라는 무의식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 순간, 이러한 비유적 방식은 한층 적극적인 모습을 띤다. 시인은 철길 위로 흩날리는 벚꽃들의 움직임에서 “흰 나비 떼”를 연상하고, “개찰구를 나서는 사람들의 파안(破顔)”이 벚꽃처럼 활짝 피는 모습을 본다. 이 역시 객관적인 대상들을 비유적인 방식으로 재해석하는 과정이다. 벚나무에서 개 찰구를 나서는 사람들로 이어진 시인의 시선은 이윽고 “두 줄기 평행선을 굴려온 바퀴”로 향한다. 이러한 시선의 이동은 마치 봄날의 역사(驛舍) 풍경을 담기 위해 화폭 위에서 열심히 손을 움직이는 화가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원경(遠景)과 근경(近景)의 구분에 의지해 구도를 잡고, 그 구도 위에 풍경의 세부를 하나씩 그려나가는 방식을. 1~3연이 공간의 이동에 따른 시선의 변화에 근거한다면, 4연은 풍경을 매개로 한 현재와 과거의 연속이라는 시간의식을 드러낸다. 어떤 풍경들은 우리를 과거의 한 순간으로 되돌려 보내는 힘을 지녔다. 그것은 인간의 실존에 있어서 과거라는 시간의 가치를 무시할 수 없다는, 우리의 현재가 과거와의 지속적인 대화 과정임을 환기한다. 시인은 그렇게 ‘ 장목터널’을 지나면서 불현듯 경험한 강렬한 ‘빛’과의 마주침을 과거와 현재의 연속이라는 실존적 시간의식으로 이끌어간다. 그 실존적 시간 속에서 ‘나’와 ‘벚꽃’의 경계는 흐려지고, “아침부터 밤까지 바퀴 둘리는 벚나무의 고독한 영혼도 청춘의 날개 접은 사랑도 꽃꿈을 꾸는 여기는 진해역”이라는 표현처럼 사물의 세계가 뒤섞임으로써 ‘진해역’이 객관적 공간이 아닌 실존적 가치를 획득한다. 그리고 열차는 “만(灣)으로 이어질 듯 뻗은 선로와 플랫폼, 임시매표소가 반갑게 맞아주는 종착역”을 향해 달리는데, 시인은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는 열차를 “이 세상이 아닌 듯, 아닌 듯, 눈부신 봄 속으로 진입”하는 다소 환상적인 풍경으로 바꿔놓는다. 이처럼 강영은의 시는 대상으로서의 풍경과 그것에 실존적 가치를 투여하려는 언어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며, 이 과정은 대상 세계를 비유적 언어로 재구축하는 전유의 방식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러한 시적 태도를 ‘경험의 시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시인이 어떤 세계를 구축하려는 의지보다는 자신을 향해 무시로 다가오는 현재적인 경험의 시 ․공간을 향해 자신을 개방하려는 태도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 개방이 그때그때 이루어지는 일상성의 질서에 기초하는 것이라면 그 풍경의 언어적 전유는 어느 순간에 특유의 생명력을 잃어버릴 위험에 직면할 수도 있다. ‘세계’가 없는 풍경이란 단순한 소품 이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태양의 연금술이 금빛 백양나무 잎사귀를 펼치고 있네 황금빛 모자는 그대의 이마에 그늘을 드리우고 눈썹이 어둑한 그대의 눈가에선 쓸쓸, 쓰르라미가 울지만
마르는 법을 터득한 나는 얼룩진 흔적을 훔쳐 그대의 이름 속에 태양을 들인 유래를 찾네
무성한 숲의 일렬횡대 혹은 종대, 정렬해 있는 그늘의 배열 방식과 그늘의 권력에 대해 눈이 멎었을 뿐, 물이 결핍된 계절을 탓하진 않았네
시퍼런 작두를 휘두르는 저, 그늘들이 자라는 동안 무수한 모가지가 베어졌거나 심어졌을 것이네 내 몸까지 그 그늘이 잠식했을 것이네
키만 자란 그늘은 독립을 열망하고 비만한 그늘은 평화적인 죽음을 염원했지만 누구의 등 뒤로도 피하거나 머무를 수 없는 폭 염, 어느 그늘도 헛된 건 없었네
다람쥐 한 마리, 햇살이 만든 징검다리를 건너 가네
그늘을 이끌고 사라진 줄무늬는 그대의 등줄기, 그대가 세운 망명정부(亡命政府)가 망명정부(亡命情夫)로 들리는 건 그늘을 넘은 몸이 그대의 궁전이자 나의 궁전이기 때문
그대와 나 사이에 놓인 그늘이 북회귀선에 걸릴 때 티벳, 하고 부르면 다가오는 이름, 녹색 피 흐르는 정원이 거기 있었네
그대가 망명한 나의 슬픔은 일 년 내내 여름 궁전, 사라지지 않는 계절이 거기 머물러 있 네
- 「여름 궁전」 전문
‘궁전’은 ‘풍경’에 붙여진 실존적 명명이다. 우리는 이 시의 시작 지점에서 태양이 “금빛 백양나무 잎사귀” 위에서 연금술을 펼치고 있는 눈부신 장면을 목격하는 시인의 시선을 본다. 시인은 여름 풍경에서 ‘황금빛 모자’와 ‘그늘’이라는 상반된 이미지를 읽어내고, 그늘의 쓸쓸함과 쓰르라미의 울음을 상 상한다. 그리고 그 실존적인 상상 속에서 “그대의 이름 속에 태양을 들인 유래”를 더듬어 찾는다. 1연이 객관적 풍경을 비유적인 언어로 전유한 것이라면, 2연은 그러한 시적 전유의 실존적 의미를 성찰하는 메타적 진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3연에서 시인은 객관적 풍경을 언어적 비유체계를 통해 전 유한다. 이를테면 나무들이 “무성한 숲”을 이루어 “일렬횡대 혹은 종대”로 도열한 모습과, 그 모습을 따라 가지런하게 “정열해 있는 그늘의 배열 방식과 그늘의 권력”이 그것이다. 그런데 연(聯)을 거듭해 읽을수록 우리는 시인이 ‘여름’이라는 시간 속에서 ‘빛’과 ‘그늘’이라는 상반된 이미지를 발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늘’의 존재에 한층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알게 된다. 말하자면 시인은 ‘빛’의 대기 속에 위치하고 있지만, “시퍼런 작두를 휘두르는 저, 그늘들이 자라는 동안 무수한 모가지가 베어졌거나 심어졌을 것이네 내 몸까지 그 그늘이 잠식했을 것이네” 처럼 그의 실존은 ‘그늘’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여름’ 속에서 ‘빛’을 보는 것이 표면적인 것이라면, ‘그늘’을 보는 것은 다분히 실존적이다. 물론, 이 시에서 그늘의 존재는 “키만 자란 그늘”, “비만한 그늘”, “평화적인 죽음”처럼 하강적인 이미지의 연쇄 속에서 의미화되고 있다. 추측컨대 시인은 “누구의 등 뒤로도 피하거나 머무를 수 없는 폭염”의 순간에 ‘그늘’이라는 이질적인 존재를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6연에서 시인은 이러한 실존적 내면 풍경과는 전혀 무관한 것처럼 느껴지는 외적 현실의 일단 (“다람쥐 한 마리, 햇살이 만든 징검다리를 건너가네”)을 배치하고 있다. 외적 풍경에 대한 묘사와 실존적 가치의 되새김이 지그재그 형식으로 배치된 이러한 형식이 어느 정도의 의도성을 포함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러한 병치적인 배열이 ‘여름’이라는 익숙한 대상에서 발생할 수 있는 선입견을 상당한 정도까지 없애는 장치로 기능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이 시에서 ‘그늘’은 ‘빛’과 대비되는 단절의 형상으로 묘 사된다. 4연에서 ‘그늘’이 “시퍼런 작두”나 함부로 베어지는 “무수한 모가지” 같은 비유적 표현들을 통해서 제시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런데 8연에 이르면 ‘빛’과 단절되는 ‘그늘’의 이미지는 “그대와 나 사이에 놓인 그늘”처럼 ‘나’와 ‘그대’의 단절을 불러오는 경계로 재규정된다. 그래서 ‘궁전’은 ‘풍경’에 붙여진 실존적 명명이라면, ‘그늘’은 ‘나’와 ‘그대’의 격절을 의미하는 자연적 비유체계의 일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8연에서 ‘나의 슬픔’은 그대와의 단절, 즉 그대의 ‘망명’에서 비롯되는 감정으로 진술된다. 시인은 ‘빛’과 ‘그늘’이라는 여름의 대립적 이미지를 ‘나’와 ‘그대’의 단절로 인식하고, ‘그대’에게 ‘그늘’이라는 성질을 부여한다. 그 결과 ‘그대’의 망명으로 인해 ‘나’에게는 오직 “일 년 내내 여름 궁전”과 “사라지지 않는 계절”만이 머무르게 된다.
3.
비유를 통한 세계 인식, 세계와 사물에 비유라는 언어의 후광을 부여함으로써 대상 자체에 시적 생명을 불어넣는 창작 방법은 세계와 사물의 자연적 성격에 시적인 의미를 부가하여 그것들을 재창조하는 행위에 해당한다. 이런 의미에서 시에서 ‘언어’와 ‘표현’의 위상은 결코 간과될 수 없다. 흔히 세계와 사물을 다른 배치 속으로 끌어들임으로써 특유의 시적 효과를 유발하는 언어의 시학은 이처럼 대상을 다른 시선으로 포착함으로써 그것들을 구원하는 창조적 계기로 이해된다. 이러한 창작과정은 대상에 대한 자아의 투사를 통해서 성취되는 것이지만, 지나친 자의성으로 인해서 시인의 내면, 즉 세계가 상실될 위험에 직면하기 쉽다. 강영은의 언어의 미학 또한 일정 정도는 이러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다. 강영은의 시집 『최초의 그늘』의 전반부와 후반부 사이에서 느껴지는 인식의 단절 또한 이러한 위험과 무관하지 않다. 이를테면 강영은의 이 시집은 ‘언어’가 강조되는 전반부와 ‘세계’가 강조되는 후반부로 구분되는데, 「방의 연대기」로 대표되는 ‘세계’의 시편들이 위에서 인용한 ‘언어’와 ‘풍경’의 시편들보다 울림과 여운이 크다. 그것은 “마트로쉬카 인형”의 이미지에 근거하여 “엄마와 밖은 할머니의 방, 엄마의 안은 내 무덤”(「방의 연대기」)이라는 진술이 환기하는 시간의 격절과 연속성이 시인의 내면, 즉 ‘세계’를 이해함에 있어 한층 선명한 느낌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물론, ‘언어’의 시학과 ‘세계’의 시학 가운데 어느 쪽이 ‘시적인 것’에 접근하는 올바른 방향인지는 결정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언어’가 한낱 비 유체계 이상의 의미를 확보하지 못할 때, ‘세계’를 구 성함에까지 도달하지 못 할 때, 그것은 다분히 감정적이고 과잉된 자의식의 발산 이상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언어’를 통해서 사물에 실존적 가치를 부여하려는 시인의 노력이 ‘언어’의 수준에 머무를 때, 우리가 한 편의 시, 한 권의 시집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역시, 쉽지 않은 질문이다.
- 『시와 미학』 2012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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