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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머의 리뷰

좋은 시집 좋은 시

by 너머의 새 2020. 1. 16.

좋은 시집 좋은 시

 

좋은 시는 당나귀귀/ 지현아(시인)

               -강영은 시집 『상냥한 시론詩論』 황금알

귀는 하늘과 연결된 구멍이다 구멍이 막히면 죽은 귀다 죽은 귀에는 고통의 감각이 남아 있다

억울한 귀는 사람이 되는 성질을 갖는다 상대의 귀를 종처럼 부려서 자기 신변을 시중들게 한다

 

다 자란 귀는 유혹하고 길을 막고 겁을 준다 능력이 통하지 않으면 사라진다 

 

귀에게도 식욕이 있다 먹지 않으면 비쩍 마른 귀가 된다 무너진 입가에 귀가 출몰하면 귀가 먹먹해진다

 

귀가 종소리처럼 울릴 때가 있다 좋아하는 말과 싫어하는 말을 엿듣는 모자장수의 목격담이 길어진다

 

벌레가 나오지 않을 때에는 참대 대롱을 귀 안에 넣고 힘껏 빨아내면 좋다고 한다 말문이 트이는 이치가 그와 같다

 

귀가 길어진 대나무 이파리에선 벌레소리가 난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왕은 이것을 싫어하여 대를 베어 버리고 산수유를 심게 하였으나 산수유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당나귀가 튀어나왔다

 

대나무가 씹어 삼킨 귀는 지금도 존재 한다

 

*삼국유사2, 경문왕편 여이설화 중에서

 

                                                              -『여이驢耳』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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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의 귀가 사람의 것이 아닌 모습을 보았다는 이야기들은 삼국유사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비디우스에 나오는 미다스왕의 귀도 당나귀 귀이며, 유럽 지역 신화들에서도 말이나 양의 귀를 가진 왕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몽골에도 여이한이란 이름의 왕도 그러했다. 그들의 눈이나 코가 아닌, 귀가 변이, 혹은 진화된 까닭은 뭘까 

 

  강영은 시인의 신작 시집 상냥한 시론에 수록된 작품 여이에 그 대답이 있다. “귀는 하늘과 연결된 구멍이어서 상대의 귀를 종처럼 부리거나 유혹하고 길을 막고 겁을 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국가의 최고통치자란 하늘이 내려주는 것이고, 상대를 부리거나 유혹하기도 하며, 다른 이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것이니, 이것은 맞아 떨어지는 가설로 보인다. 하지만 경문왕과 미더스왕은 다소 폭군으로 묘사된다. 왕이라는 국가최고 통치자의 속성에 걸맞은 귀를 가진 두 사람이 오히려 무능한 왕의 아이콘이라는 점이 역설적이다.

  시집의 표제작인 상냥한 시론에 다섯 살배기 준이의 말들이 시인이 읽은 가장 좋은 시라는 구절이 있다. 좋은 왕에게 필요한 건 성능 좋은 귀가 아닌 잘 듣는 것에 있는 것처럼, 좋은 시 역시 그러할 것이다. 문학평론가 홍용희의 말처럼, 재현되는 이미지가 아닌 그려지는 이미지에 충실한 시, 상냥한 시론에 귀를 크게 열어본다.

『문학과 창작』 2018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