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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머의 리뷰

퍼소나의 심리학 , 퍼소나의 미학/강순(시인)

by 너머의 새 2021. 9. 27.

퍼소나의 심리학 , 퍼소나의 미학/강순(시인)

 

 

시가 누구의 어떤 목소리인가에 대해 생각해 볼 때 , 옥타비오 파스 (Octavio Paz) 활과 리라 에서, “시는 다수의 목소리이면서 소수의 목소리이고, 집단적이면서 개인적이고, 벌거벗고 치장하고 , 말하여지고 , 색칠되고 , 씌어져서, 천의 얼굴로 나타나지만 결국 시편은 빔 -인간의 모든 작위의 헛된 위대함에 대한 아름다운 증거 !-을 숨기고 있는 가면일 뿐이다라고 한 말에 공감하게 된다.

 

시 안에서 목소리를 내는 시적 화자, 즉 퍼소나 (persona)에 주목할 때, 우리는 이미 그가 연출하고 연기하는 무대와 언어에 빠져들 준비가 되어 있다. 시인의 가면( )인 퍼소나를 바라보는 일은 그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며, 동시에 그의 시선을 따라가는 일이고, 그의 영혼을 공유하는 일이다. 시 속에서 독특한 목소리로 우리를 이끄는 누군가 (무엇인가 )가 그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그의 손을 잡는 일이다 . 이는 무한한 시적 목소리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일이고, 그 목소리를 따라 우리가 체험해 보지 않은 세계로 우리를 자발적으로 밀어 넣는 일이다.

 

우리는 시인의 가면( )이 시인 자신, 친구나 연인, 집시나 어릿광대, 노동자나 실업자, 난민이나 아나키스트, 악마나 천사, 환자나 걸인, 동식물들, 사물들의 형태로 변주되며 여러 얼굴과 표정들을 독특하게 보여주고 있음을 알게 된다 . 시인 안에 자생하는 퍼소나는 언어를 퍼 올리는 두레박을 손에 쥐고 수많은 머리카락 같은 단어나 문장들을 나부끼며 시 속을 휘돌아다니는 시인의 그림자이다. 시인 자신이지만 동시에 시인 자신이 아닌 그 무엇인가 (혹은 누군가 )가 시인에게 말을 걸며 자신의 문장을 끊임없이 발설한다. 그러므로 좋은 시를 만나고자 하는 이는 시인 안의 퍼소나의 유혹에 빠져드는 연습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시는 시인의 것만이 아니라 시인 안의 퍼소나의 것임을 비로소 인정할 때 다층적인 목소리와 구조를 가지고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다양하고 복잡한 인간 내면을 창조적으로 탐색하는 좋은 시를 발견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 고독의 등과 고독을 벗어나고 싶은 등

 

폴 리콰르 (Paul Ricoeur)에 따르면, 인간은 스스로를 무대로 이끌고 더 나아가서 스스로를 무대라고 생각한다. 이 말을 시인에게 적용해 본다면, 시인은 시적 퍼소나를 무대로 이끌고 더 나아가서 스스로를 퍼소나라고 생각한다, 혹은 퍼소나는 시인을 무대로 이끌고 더 나아가서 스스로를 시인이라고 생각한다, 는 말도 가능하지 않을까.

 

꽃들은 그의 손길을 반기지 않았다

스쳐가는 고독한 등을 사랑했을 뿐 그는

여행에서 돌아올 때마다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애인을 바꾸고 묵은 식성과 가구들을 모두 버리는 등

어느 해 겨울에는 자작나무와 보드카를 실어 나르던

해변 철로의 흔적을 찾으려 북해를 떠돌다가

한동안 군산 경암동의 철길마을에 둥지를 틀었다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 속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인물

몇 십 년 동안 수많은 남의 사진 속에 배경으로만 남은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 해변의 사내를 선망했다

그는 섬나라의 외딴 포구로 귀항하는 밤배들 사이로

왁자지껄한 송년 파티를 듣고 있다

현의 애절한 떨림과 함께 간간이 환성이 터져 나오는

12 월의 연찬에 초대받지 않았으니 누구도

그의 노래로부터 마이크를 거두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어서 행복하다

아침이면 마을의 노파들이 오징어를 구워 파는

가판대에 앉아 그는 좌중의 어느 누군가

몸속으로 흘리는 눈물의 명암과 가슴을 가로지르는

혈액의 점도를 가늠하여 꽤 오랫동안 드나들던

남의 잔치에서 한 줌의 목소리를 남기려 했음을

몹시 저어하며 이제는 작별의 인사도 없이

표표히 그 음습한 장을 떠날 결심에 발목을 데우며

강물 위로 옛집이 둥둥 떠내려가는 꿈과

봄날의 빗방울들을 불 지르는 백일몽

지하철 탑승구의 노란 선 밖에 서 있는 여자와

돌연 사랑에 빠지는 긴 몽상에 다시 설레며

 

-이성렬, 매혹 전문 (계간 시산맥 , 2020 년 봄호 )

 

이 시에서 스쳐가는 고독한 등을 사랑하는 퍼소나는 시인이지만 동시에 시인 자신이 아닌 시인 안의 또 다른 어떤 존재인 이다. 시인이 창조한 무대에서 혼신의 연기를 보여주는 는 시인이 버리고 싶은 일 수도, 시인이 그리워하는 일 수도 있다. 그는 스쳐가는 고독한 등을 사랑할 뿐 한 사람을 오래 진득하게 사랑하며 한 곳에 머무는 유형의 인간이 아니라서, “애인을 바꾸고 묵은 식성과 가구들을 모두 버리, “북해를 떠돌다가” “군산 경암동의 철길마을에 둥지를 튼 사람이다. “소설 속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인물처럼 몇십 년 동안 수많은 남의 사진 속에 배경으로만 남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 해변의 사내를 선망하며 자신의 생을 소극적으로 사는 사람이다. 그는 타인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며 살기보다는 스스로를 가두며 타인에게서 멀어지는 고독하고 외로운 삶을 산다. 그것은 어떤 환경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 자신의 기질이나 성향 탓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자발적 고독을 지향하기에, 그는 “12월의 연찬에 초대받지 않았으니 누구도 그의 노래로부터 마이크를 거두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어서 행복하다 는 역설과 반어의 감정을 소유할 수 있다 . 하지만 그가 세상에 무관심한 채 자신만 생각하며 사는 건 아니어서 , “아침이면 마을의 노파들이 오징어를 구워 파는 가판대에 앉아 좌중의 어느 누군가 몸속으로 흘리는 눈물의 명암과 가슴을 가로지르는 혈액의 점도를 가늠 하기도 한다. 그러다가도 인생의 마지막을 정리하는 사람처럼 문득 ,“꽤 오랫동안 드나들던 남의 잔치에서 한 줌의 목소리를 남기려 했음을 몹시 저어하기도 하고, “이제는 작별의 인사도 없이 표표히 그 음습한 장을 떠날 결심에 발목을 데우기도 한다. 결국 인생이란 강물 위로 옛집이 둥둥 떠내려가는 꿈 이거나 혹은 봄날의 빗방울들을 불 지르는 백일몽처럼 덧없는 것이라는 관조에 이른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도 반전이 있다. “지하철 탑승구의 노란 선 밖에 서 있는 여자와 돌연 사랑에 빠지는 긴 몽상에 다시 설레며 생기 있는 삶에 대한 꿈과 희망을 가지는 것, 바로 그것이다. 건조하고 고독하게 스쳐 지나가는 인연으로 외지를 겉돌고 살며 사람들과의 거리를 두는 게 편한 그이지만, 그의 가슴 한켠에는 여자와 사랑에 빠지며 남들처럼 살아보고 싶은 바람이 있는 것이다. 자신의 스타일대로 나름 열심히 살아도 삶의 끝에 남는 것은 후회와 덧없음을 깨달은 자의 또 다른 희망, 그 속에서 우리는 다면적 인간 유형의 진면목을 만난다. ‘ 는 이런 스타일이다라고 단정 짓기 힘든, 더러 복잡다단한 우리 자신과 닮아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내면을 반영하는 퍼소나는 종종 역설과 반전을 동반한다. 인간은 실수에 실수를 거듭하면서 완전한 진실을 발견한다는 지그문트 프로이트 (Sigmund Freud)의 말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 죽은 것 다시 죽여 살아나는 활개

 

죽음의 의식 앞에서 처참한 죽음의 절차를 담담히 받아들이고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종교적 세계관 혹은 명상과 사유 혹은 수행과 지혜의 힘을 통해 그 경지에 이른 것이라 볼 수 있다. 그것이 천 (天葬 )이라는 낯설고 참혹한 장례 풍습이라면 더욱 그렇다.

 

나는 야크 똥을 주우러 다니는 아이

설수로 목을 축이던 처녀

놋주발을 돌리던 라마승이네

 

죽은 것 다시 죽여 살아나는 활개

냄새가 다른 피, 코와 팔다리들 삭혀 부유하는

천년의 짐승이네

 

나는 높은 곳 연모하던 살점들이

빛으로 짓고 빛으로 글자를 써 빛의 헝겊을 날리는

하늘사원의 전서구

 

모든 길은 허공으로 통해

부풀어오른 설풍마저 질긴 구애를 하네

 

신조 神鳥 도 설산에 푸른 그림자를 매달고

까마득한 공복에서 출발하네

 

긴 겨울과 희미한 볕뉘의 제물

누군가의 전 생애가 불이 되고 물이 되어가는 곳에

발톱과 초점이 나의 전부일 뿐

 

땀에 젖은 모자가 세 번 원을 그릴 때

튕기듯, 붉은 언덕으로

 

-강신애, 천장 天葬 전문 (계간문학의 오늘, 2020년 여름호 )

 

 

이 시에서는 윤회를 믿는 라마교의 장례 풍습과 그 현장을 바라보는 퍼소나가 등장한다. 천장(天葬 )은 조장(鳥葬 )이라고도 하는데 티벳 불교의 고유한 장례 풍습이다. 그들은 인간의 신체를 영혼을 담는 그릇에 불과하다고 보고, 죽은 후에는 더 이상 쓸모없어졌다고 여겨 독수리의 먹이로 내준다. 그들은 자신들이 신성시하는 독수리의 먹이로 신체를 내주는 마지막 자비 보시를 함으로써 죽은 영혼의 승천을 믿는 것이다.

 

이 시의 퍼소나는 나는 야크 똥을 주우러 다니던 아이”, “설수로 목을 축이던 처녀”, “놋주발을 돌리던 라마승이고, “코와 팔다리들 삭혀 부유하는 천년의 짐승 (독수리임을 암시)”이고, “높은 곳 연모하던 살점들이 빛으로 짓고 빛으로 글자를 써 빛의 헝겊을 날리는 하늘사원의 전서구 (비둘기)”라고 자신의 존재를 직접 밝히고 있 . 이렇게 티벳 고원지대에서 벌어지는 천장 (조장 )이라는 장례풍습을 이미지화하면서 여러 모습으로 변주되는 퍼소나들이 하나의 시에 동시에 등장하는 점이 독특하다 .

 

그러나 곧 다섯 퍼소나는 신조 (神鳥 )” , “설산에 푸른 그림자를 매달고 까마득한 공복에서 출발하는 독수리의 시선으로 초점화된다. “신조는 자신에게 바쳐진 제물을 위해 누군가의 전 생애가 불이 되고 물이 되어가는 곳으로 날아간다. 그런 후 누군가의 전 생애가 불이 되고 물이 되어가는 곳에” “발톱과 초점이 나의 전부라서 , “제물을 받아 튕기듯 붉은 언덕으로 날아오른다.

 

이 시에서는 한낱 새에 불과한 독수리가 인간의 사체를 제물로 받는 신의 위치에 등극해 있다. 그렇다면 왜 이 신조(神鳥 )’라는 퍼소나가 인간인 아이, 처녀, 라마승과 비둘기 들보다 더 고차원적으로 신격화되는 것일까? 왜냐하면 그는 죽은 것을 다시 죽여 살려내는 활개를 가지고 있고 천년의 짐승으로 존재하는 영혼을 가진 고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는 라마교를 믿는 티벳인들이 아니고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문화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런 낯선 장례 문화에 대해 묘하게도 공감하게 된다. 신체의 죽음 이후 그 죽음 너머에서 영혼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것, 그것은 라마교라는 종교의식을 떠나 우리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려는 인간 본성의 발로이며, 자연에서 와서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생태적인 소망의식, 혹은 사체를 배고픈 새에게 내어주는 행위를 통해 마지막으로 세상에 무엇인가 도움이 되고자 하는 인간 의지의 현현일지도 모른다. 사망 이후 의학적인 용도로 신체를 해부할 수 있도록 기부하거나 장기를 내어주는 고귀한 행위를 통해 타인들을 살리며 죽어 가는 이들의 희생을 상기해 볼 때, 형태만 다를 뿐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 꿈이 한 줌이어도 결코 멈추지 않는 꿈

 

시인은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 존재이다. 더욱이 시인이 창조한 시적 퍼소나가 꾸는 꿈이 시인 자신의 것과 혹은 현실의 평범성과 비교될 때 그것은 독특한 이미지와 반향으로 남는다. 특히, 비현실적이고 비이성 ·탈이성적인 퍼소나의 꿈은 우리를 환상과 환몽으로 안내한다 실존 혹은 현실의 문제에서 벗어나 상상력의 옷으로 갈아입고 시공간을 초월하여 현실 저 너머의 세계로 가 보자고 유혹한다.

 

번개가 친다. 연기의 나라에 떨어졌다는 걸 알았다 벌레가 요란스럽게 날개를 터는 밤 은하

밖으로 눈을 밀어내는 꿈을 꾼다

 

가장 멀리 가는 비행기 표를 끊을까

 

인큐베이터를 주문하고 다음 시간을 기다릴까

 

에너지만 소비하고 되돌아오는 빛에 대해

몸을 한껏 말았으므로 꿈이 한 줌이라고 누가 말한다

 

빽빽하게 지는 꽃과 무한 번식하는 도시의 눈빛

울음소리 가득한 파라의 방

반쯤은 물이 차 있고

반은 비어있는

 

서로를 오래 보면 슬퍼지는 문을 가져

 

종소리에 마음을 서성이며

포기하지 않기 위해 작은 노래를 이어 부른다

 

누군가의 얼굴을 붉어지도록 불러보고

 

세상을 무단횡단한 사람의 이야기가 왜 궁금하여

숲으로 걷는다

별안간 빛이 간지러워

레몬 소리를 내면서 인사를 건네면서

 

수많은 괄호는 정말 간단할까

 

창백하고 입이 마른 세기를 건너가는 아이가 있어

모든 태어나는 날을 모아모아 이름을 짓는다

 

밑그림을 못 그린 난민의 일기는

어디서 쉴까 잠자리가 철썩거린다

 

참 아름다운 행성을 기원한다

 

-이효림, 어느 알의 최선 전문 (계간 애지 , 2020 년 겨울호 )

 

이 시는 자연스럽게 해석되기를 거부하는 현대시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문장들 사이의 연관 관계, 해석의 고리들을 떨어뜨려 놓고 소통과 상관없이 직관적인 발성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겠다는 퍼소나의 의도가 드러난다. 그러므로 모든 문장들은 비의도적으로 보이며 인과적 맥락이 없는 문장들은 각기 낱개로 부유하며 정착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들은 이생에 부유하며 정착하지 못하는, 소외되고 불안한 퍼소나를 드러내는 의도적인 표현론적 방법일 수도 있다. , 그것들은 꿈이 한 줌 이 되고 마는 세상에서, “몸을 한껏 말며 자기 정체성을 찾아내려고 몸부림치는 알 이라는 특이한 퍼소나를 드러낼 수 있는 전략적인 장치로써 채택되었는지도 모른다

 

이 시의 퍼소나는 인간이 아닌 의 형상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경험한다. 그러므로 그가 보내오는 문장들은 특이하다 못해 독해하기 힘들 정도로 난해하다. 하지만, ‘ 은 아직 성체가 되지 않은 미완성의 단계에 있으므로 미래에 대한 꿈꾸기가 더 자유로운 존재일지 모른다. 그는 은하 밖으로 눈을 밀어내거나, “가장 멀리 가는 비행기표를 끊거나, “인큐베이터를 주문하는 꿈을 꾼다. 한편 그는 현실적으로 울음소리 가득한 파라의 방에 있어서 답답함과 불안함을 느끼는 실존적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는 종소리에 마음을 서성이며 포기하지 않기 위해 작은 노래를 이어 부르 거나 레몬 소리를 내면서 인사를 건네면서 점점 꿈꾸기의 강도를 높이기 시작한다. 그런데도 그는 현실적으로 모습을 정확히 드러내는 존재가 아니다. 환상 속의 어느 숲에 버려진 이거나, 이스라엘 유적지인 파라 ’(BC 17세기 후반에서 BC 15 세기 초까지 이집트의 중요한 요새라는 설이 있다)에 숨겨진 어떤 특이한 생명체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들도록 할 뿐이다.

 

또한, 그는 입체적이고 다층적인 내면을 가지고 있어 수많은 괄호는 정말 간단할까라는 철학적인 (혹은 존재론적인) 질문을 갖기도 하고, “창백하고 입이 마른 세기를 건너가는 아이처럼 모든 태어나는 날을 모아모아 이름을 짓는 특이한 행위를 통해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꿈꾸고 있음을 드러낼 뿐이다. 그는 끝까지 그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겠다는 듯 얼굴과 표정을 쉬 보여주지 않는다. 단지 우리로 하여금 그가 밑그림을 못 그린 난민을 걱정하고, 그가 태어날 이 세상이 참 아름다운 행성이기를 기원하는 가슴 따뜻한 생명체라는 느낌만 남게 할 뿐이다.

 

이 시에서 퍼소나가 어떤 얼굴과 표정으로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는지 정확하지는 않다 . 하지만 이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 부단한 꿈꾸기를 수행하고 있음은 느껴진다. 난민을 걱정하며 이 세계가 아름다운 행성이기를 기원하는 최선의 꿈꾸기를 통해, 언젠가 껍질을 깨고 세상으로 나올 날을 기다리는 어떤 희망의 생명체가 눈앞에 그려진다. 그는 우리의 환상과 파라의 유적지를 오가며 시공간을 초월해 미완성의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알리는 미성숙하고 낯선 어떤 생명체이다. 그러므로 이 시의 독특한 퍼소나는 우리가 이제껏 만나보지 못한 신선하고 난해한 문장으로 인과적 맥락 없이 슬픔과 불안, 그리움과 희망의 정서를 다층적으로 선보이며, 그의 최선을 우리에게 타진해 오고 있는 어떤 새로운 모르소 부호인 셈이다.

 

# 우는 법을 배우는 시간

 

어떤 시의 퍼소나는 시인에게 생명을 부여받은 무생물이 된다. 이 경우, 시인은 투사와 동화라는 기법으로 자신의 사유를 무생물에게 반영시킨다. 그런 기법들이 성공을 거두려면 이미지화를 통해 상상력을 확대시킬 수밖에 없다.

 

어제는 구름을, 오늘은 비를 읽었습니다 하귤이 놓인 실내에 빗방울 같은 선율을 틀어놓고 마음껏 비의比擬를 읽었습니다 당신을 사랑한 것도, 사랑이 떠난 것도, 나만 아는 어느 언덕에 묻은 것처럼 오늘은 마음껏 비밀을 품었습니다 사람들은 언덕에서 풀꽃을 읽고 갈 뿐, 흔들리는 꽃들이 나에게 탄생한 비사祕史 라는 걸 알지 못합니다

 

하늘이 새침하여 비 내리는 창가에서 책을 읽었습니다 지금 여기까지 단숨에 흘러온 냇물을 읽었습니다 흙탕물을 벗어던지는 저, 냇물은 몇백 년을 견뎌 온 책입니까, 어떤 책이 저토록 정직하겠습니까, 당신을 안을 뿐인 내 팔은 습기를 건널 수 없어 저 책을 안을 수도 없습니다 한라산 옆구리를 휘돌며 천둥보다 큰 소리로 내달리는 덩어리, 밝은 날의 곤충들과 흐린 날의 개구리 울음들과, 웅덩이에 떠 있는 비닐조각까지 한꺼번에 밀고 오는 저, 책을 탓할 수 없습니다

 

계곡으로 내려온 비구름이 몇백 년 묵은 나무에게 눈짓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키가 큰 제밤나무는 숨을 죽이고 길가에 돋아나 있는 풀잎들만 철없이 까붑니다. 가벼운 슬픔만 울기 좋은 날입니까, 아닙니다 장막처럼 드리워진 슬픔이 커다란 눈망울을 뜨는 날이어서 고요가 폭우暴雨로 벽을 세웁니다

벽을 뚫고 이무기가 몰려옵니다 승천할 줄도 모르면서 바다 어디쯤에서 달아나려고, 바다로 닿기 전인데도 허연 배때기를 드러냅니다 당신이 괜찮냐고 물어 올 때 마구 떼쓰며 뒹굴고 우는 저런 배짱을 나도 가져 보고 싶습니다

 

햇빛을 마다하는 오늘 우는 법을 배웠습니다

 

-강영은, 마른 내乾川 전문 (계간 문예바다 2020년 겨울호 )

 

이 시의 퍼소나는 마른 천 (건천 )”이 비를 만나 빗물을 받아들이는 독특한 목소리를 들려주는 시적 주체이다. “오늘은 비를 읽게 되니 비의比擬를 읽게 되고 비밀에 대해 생각하며 나아가 언덕의 풀꽃이 자신의 비사祕史라고 말한다. 그렇게 라는 음성을 통해 발단되는 언어유희적 연상 ( ->비의 ->비밀 ->비의 )에만 빠져있는 게 아니라, “단숨에 흘러온 냇물 몇백 년을 견뎌 온 책이라고 이미지를 은유한 후 곧 확장시킬 줄 안다.

 

그러나 오늘은” “계곡으로 내려온 비구름이 몇백 년 묵은 나무에게 눈짓하면서 장막처럼 드리워진 슬픔이 커다란 눈망울을 뜨는 날 이어서 고요가 폭우暴雨 로 벽을 세우 벽을 뚫고 이무기가 몰려오는 날이어서, 건천은 흘러넘치면서 울 수밖에 없는 날이 된다 승천할 줄도 모르면서 바다 어디쯤에서 달아나려고 바다로 닿기 전인데도 허연 배때기를 드러내는 이무기처럼 마구 떼쓰며 뒹굴고 우는 저런 배짱을 나도 가져 보고 싶다고 고백한다.

 

건천이 오늘 배운 우는 법 마구 떼쓰며 뒹굴고 우는 저런 배짱이다. 졸졸졸 흐르며 조용히 울지 않고 배짱 부리며 마구 떼쓰며 뒹굴며 우는 자세는 자신을 억압하며 참는 자세에서 벗어나, 하고 싶은 말 내지르는, 다소 무모할지라도 용감무쌍한 태도이다. , 상징계의 질서 안에서 억압받는 자신의 의식과 무의식을 해방시키려는 자유에의 갈망이다. 그러한 그의 우는 태도는 오늘 내리는 비와 언덕의 풀꽃과 비구름, 제밤나무 천둥 들과 함께 생동하는 자연으로 이미지화되고 있으며, 그 이미지화는 깊은 사유를 다시 생산해 내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처 , 시의 퍼소나는 그 역할과 기능의 중요성 면에서 시의 중심이고 시의 자전축이 된다고 볼 수 있다 누구의 어떤 목소리냐에 따라 세상을 읽는 시각이 달라지고, 표현 기법과 방식이 달라지며 선택하는 단어와 문장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신선하고 낯선 퍼소나를 만났을 때의 흥분과 놀라움은 그 감정과 정서에만 머물지 않고, 그 감정과 정서 너머에서 다른 무엇인가를 재생산하게 된다. 그것이 말의 유희, 상징, 은유, 역설과 반어, 알레고리, 이미지와 뒤섞여 낯설거나 독특한 혹은 공감 가는 깊은 사유를 만들어낼 때 우리는 충분히 감동한다.

 

한편, 시인이 선택하고 집중한 퍼소나들이 모든 시 작품에서 성공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것들이 우리 자신의 내면을 확장시키는 상상적 출발점 혹은 발로가 되는 것은 확실한 일이지만, 시인이 퍼소나를 초점화시키지 못 할 경우 그 한계는 분명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시인들의 작품 속에서 탄생하는 낯설고 신선한 퍼소나의 표정들이 우리의 해독과 감동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벌써 가슴이 설레며 흥분되어 오는 까닭은 무엇일까,

 

- 『웹진 시인광장』 2021년 1월호 l 통호 제141호(Vol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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