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가 선장한 이달의 시인/ 작품론]
본질로 뻗어나가는 가지 /김진석
1.
누군가의 등을 보며 망설여 본 사람이라면 이해할 것이다. 명치쯤에 뭉쳐있던 한 사람의 이름이 목을 타고 올라오다 턱에서 막혀버리는 듯한 느낌을. 뱉을 수도 삼킬 수도 없는 단어가 입 안에서 난기류처럼 맴돌 듯 느껴지는 감각을. 부유하던 기의가 단단한 음절로 정제되는 순간, 가볍게 휘발되어 흩날리는 뒤편의 의도들에 대해서 말이다.
고작 이름 하나를 부를 뿐인데 양 갈래로 갈라지는 마음을 앞에 두고 주춤거리다 호명이 숙명인 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물에 어떤 비의(秘義)가, 하이데거식으로 존재가 스치는 찰나 이를 향해 손을 뻗어서, 마침내 형형한 빛을 내는 의도를 손아귀에 쥐었다고 확신하고는, 무형의 신비를 온전히 담아내고자 나머지 한 손으로 언어들을 뒤적거리는 시인들의 모습이 말이다. 이때 움켜쥔, 언어라는 틀은 언제나 모자라거나 남는 상자와 같아서, 시는 잘 읽히지 않는 번역서처럼 진언(眞言)의 일부만을 틈새로 비추거나, 광막한 공간 속에 그것을 은폐하고는 단어의 숲에서 우리를 떠돌게 하곤 한다. 그러니까 데리다가 지적했듯, 기의는 기표 속에서 자신을 현전하지 않고 끊임없이 지연되고 미끄러지고야 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네게 꼭 맞는 이름을 붙이고 또 불러보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2.
부를 수 있으나 내 것이 될 수 없는 말들의 테두리를 어루만지는 일, 호명하는 순간 이름 밖으로 넘쳐버리는 언어를 유실물처럼 여기고서는, 햇빛을 향해 방향을 트는 식물의 굴광성 같이 의도를 향해 느릿하게 뻗어가다가, 의도의 테두리를 타고 번져가는 말들의 움직임을 바라보는 일. 읽고 쓰는 사람이라면 수긍해야 할, 혹은 수긍하고야 마는 자세일 것이다. 그러나 강영은 시인은 이러한 포즈를 취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한 뼘 더 손을 뻗길 원한다. 시인의 시작(詩作)은 “존재가 가지고 있는 외연”을 더듬는 데서 나아가 “그 본질까지도 인식하는 언어”에 가담할 수 있기를 희구하며, 그로 말미암아 “나는 나를 넘”을 수 있기를 간구한다. 그렇다면 고작 이름 하나를 부를 뿐인데 양 갈래로, 이윽고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마음을 다독이며, 단단한 언어의 외연을 타진하면서 그 본질을 투사하고자 하는 시작의 모습은 시인의 시에서 어떠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돌 위에 돌을 얹고 그 위에 또 돌을 얹어
궁극으로 치닫는 마음
마음 위에 마음을 얹고 그 위에 또 마음을 얹어
허공으로 치솟는 몸
돌탑은 알고 있었다
한 발 두 발 디딜 때마다 무너질 걸 알고 있었다
무너질까 두근거리는 나를 알고 있었다
그건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므로
조그만 돌멩이를 주워
마음의 맨 꼭대기에 올려놓았다
태어나기 전의 돌탑을
태어난 이후에도 기다렸다
한곳에 머물러 오래, 기다렸다
돌멩이가 자랄 때까지
돌탑이 될 때까지
-「시간의 연대(連帶)」 전문
‘결국 무너지고 말 것이다.’는 결론이 현재의 행위를 그치는 데 이유가 되지 못하는 순간들이 더러 있다. 머지않아 낭떠러지가 있음을 예감하고 잔해를 수습하는 지난한 시간을 선험적으로 인지했을지언정 움직이는 발을, 끄적거리는 손을, 기울어지는 몸을 어찌할 수 없는, 아니 어찌하지 않는 삶이 종종 있다. 겪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 겪었던 것 같기도 한, 시작과 끝을 헤아릴 수 있을 것만 같은 ‘오래된 미래’의 틈바구니로 걸어 들어가, 기꺼이 실패를 성취해내고야 마는 사람들이 있다.
시에서 드러난 화자의 발언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시인의 시작 역시 이와 크게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 잡을수록 미끄러지고 인식할수록 이해에서 멀어지는 ‘존재의 본질’, 혹은 기표 밖의 기의를 언어라는 한정 속에 담아내고자 하는 시 쓰기의 과정은 “돌 위에 돌을 얹고 그 위에 또 돌을 얹어”야 하는 느리고도 고된 과정이다. 시작의 원동인 영감, 즉 에피파니(epiphany)의 현전이 찰나일지언정, 포착한 그 순간을 언어로 재단해내는 과정은 그와 비교할 수 없는 정제(精製)의 단계를 요구한다. 그러나 언급했듯이 존재와 ‘나’ 사이의 신비적인 형상은 언어로 정제할수록, 설명할수록, 담아내려고 할수록 고고하고 형형한 신비의 빛을 잃어가며 점차 퇴색하고야 만다. 그리고 강영은은 “시를 쓰는 나의 덧없음과 부질없음”을 인식하고 있으며 이것이 “헛된 완성”으로의 여정임을 인지하고 있는 시인이다. 하지만 이 역시 앞서 밝혔듯, 부질없음이 하지 않음의 이유가 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시인은 “돌 위에 돌을 얹”듯 “마음 위에 마음을 얹고 그 위에 또 마음을 얹어”나간다. 돌을 쌓을수록 마음은 “궁극으로 치닫”고 마음을 쌓을수록 몸은 “허공으로 치솟는”다. 물리적 행위의 반복이 심적인 영역의 성찰을 끌어내고, 심적 수행의 반복이 육체의 비상을 현현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언어가 한사코 뻗어나가 세계의 전부를 설명해낼 수 없듯이, 그리고 차지한 부피와 밀도를 언제까지나 존속하지 못하고 사어(死語)로 전락하고야 말 듯이, 돌탑이라는 대상이 비록 영속성의 상징인 돌을 매개로 했을지라도 중력의 작용과 기상의 변화, 그리고 무엇보다 제 높이를 키울 때마다 균형의 상실을 담보해야만 하는 동전 던지기의 굴레 속에서, 돌탑의 가능성은 어디까지나 ‘무너지리라는 예감’ 속에서만 현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러한 선험 속에서도, 실패를 예감하는 ‘오래된 미래’로 걸어가는 사람의 모습처럼,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었던 “조그만 돌멩이”를 쌓는 일을 “태어난 이후”에도 소원하며 “돌멩이가 자랄 때까지/돌탑이 될 때까지” “한곳에 머물러 오래, 기다렸”고 또 기다리는 것이다.
3.
이처럼 시인의 시에서 ‘외연을 뛰어넘는 본질을 마주하는 과정’은 생의 이전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무너질 수밖에 없는 ‘돌탑 쌓기’의 양상으로 나타난다. 언뜻 굴러떨어질 수밖에 없는 바위를 산꼭대기에 올려놓아야만 하는 시시포스의 형벌이 연상되는 시작의 양상은, 주지하다시피 그 끝에, 그러니까 ‘궁극’이라는 종결 속에 어떤 결과를, ‘시적 완성’이라고 부를 만한 성취를 약속하지 않는다. 본질에 맞닿는 듯한 체험적 순간은 바위를 굴려 올리는 인고의 시간을 요구하면서도, 마침내 바위가 꼭대기에 다다랐다고 생각되는 찰나 속에서만 손 틈새를 스치듯 지나가 버리고는, 쌓아왔던 마음과 포개 놓았던 허공을 한숨처럼 내려놓는 돌탑처럼, 굴러떨어지는 바위의 굉음 속에서 자취를 감추고야 만다. 그렇다면 그러한 고난을 기꺼이 삼킬 만큼 값진 ‘본질에 맞닿는 체험’은 무엇이란 말인가? 다음 시를 살펴보자.
거기 누구 없소? 소리칠 때
누구도 들을 수 없는 나밖에 들을 수 없는
목소리를 만들어 냈다
내 귀의 바깥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내가 섬일 때
날다가 지친 갈매기들이 섬에 집중할 때
갈참나무 잎사귀처럼 침몰하는 귀가
저절로 닿는 심연, 그 아득한 깊이에서 들려오는
존재의 목소리
그것이 설령
내 몸의 줄기에서 뻗어 나온 것일지라도
놀란 흙 밖으로 튀어나온 그것을
나는 지슬이라 불렀다
그럴 때 나는
불타오르는 산이고 쏟아지는 빗줄기고 숲을 뒤덮는 바람이고 계곡에 넘쳐흐르는 물
-「지슬」 부분
신비적 체험의 순간은 타인의 이해와 동의로부터 저만치 떨어져 있곤 한다. 가방을 뒤집어 물건을 헤집는 사람처럼,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꼭 맞는 어휘를 해찰해야만 하는 과정이 필요하고, 그렇게 전달한 순간은 어쩐지 그다지 신비롭게 느껴지지 않은 채 남루해 보이기까지 하다. 그것은 세계가 손을 모아 입을 가린 채 다소 어눌한 발음으로 ‘나’에게만 전달한 귓속말이며, 동시에 굴을 파고 얼굴을 집어넣고 싶을 만큼 어떻게든 발설하고 싶은 비밀이다. 누군가는 이를 예언이라 불렀고, 누군가는 이를 불운이라 받아들였으며, 누군가는 이를 시라고 여기기로 했다.
강영은에게 이러한 신비적 체험의 순간, 즉 ‘본질에 맞닿는 체험’은 “누구도 들을 수 없는 나밖에 들을 수 없는/목소리”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는 피부 바깥으로 감지할 수 없는 ‘가장 깊은’ 내부, “그 아득한 깊이” 아래에서만 들을 수 있다. 그 순간은 내가 보고, 듣고, 만졌음에도 내 것이 아닌 듯한 이형적 체험임과 동시에 세계로부터 ‘나’를 유지하던 단단한 외피를 벗겨 내어 ‘나’를 흐릿하게 만들고는, ‘나’의 내부에 외피를 지닌 또 하나의 세계가 심어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씨앗처럼 뿌리내린 순간은 언급했듯이 지난한 인고의 시간을 양식으로 제 부피를 키운 뒤, “내 몸의 줄기에서 뻗어”나와 바깥의 외부로 다시 환원된다. 그리고 이때 무너지기 직전이 가장 완성에 가까운 돌탑의 높이처럼, 바위가 낙하하기 전 얼굴 위로 잠깐 스쳤을 시시포스의 안도처럼 예언인지, 불운인지, 시인지 혹은 “지슬”인지 모를 귓속말이 처음 ‘나’에게 들려왔던 결정적 순간, 존재가 존재자를 통해 계시되었던 순간이 다시금 복기된다. 그리고 그때 시인은 “불타오르는 산”과 “쏟아지는 빗줄기”와 “숲을 뒤덮는 바람”과 “계곡에 넘쳐흐르는 물”이 된다. ‘나’의 내부에 자리 잡았던 ‘본질에 맞닿는 체험’적 순간이 ‘나’의 언어와 경험을 매개로 세상에 환원됨과 동시에, “흙 밖으로 튀어”나올 때 열리는 피부의 안쪽과 세계가 다시금 연결되어(「지슬」), “구분되지 않는 우리” 즉 “무리”로 한데 어우러지는 것이다(「동물성」).
4.
지금까지 살펴본 강영은의 시적 발견의 과정은 넓은 반경을 탐지하는 동물적인 탐색과 사냥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돌탑의 수직적인 상승성과 지슬, 즉 감자의 뿌리가 지닌 하향적인 운동성을 통해 미루어보건대 시인이 시를 쓰는 원동력은 “식물적인 상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동물성」). 시인은 정적으로 보이는, 그러나 지구상의 어떤 생물체보다 높고 깊게 자리하는 나무처럼 커다란 언어의 몸피와 세밀한 가지들을 통해 “누구도 들을 수 없는 나밖에 들을 수 없는”(「지슬」) 목소리들을 발견해낸다. 그리고서는 감자가 땅속에서 땅을 받아들이고 제 부피와 밀도를 키우듯, 자신에게 심어진 시적 발견의 순간을 돌탑을 쌓듯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키워나간다. ‘이 정도면 되었다.’고 여길 만큼의 높이에서 만족하지 않고 무너트리기 위해 돌탑을 쌓는 사람처럼, 가지가 중력을 반하고 하늘을 향해 손을 뻗듯, 미약하고 일시적이고 불완전한 언어의 한계를 모르는 사람처럼 시인은 돌탑이 무너지는 순간, 지슬이 튀어나오는 순간 돌탑 너머의 하늘과 지슬 주위의 줄기에 비치는 현현의 취광, 즉 본질의 색깔을 발견해낸다. 영원에 기대는 이들이 본다면 이해되지 않는 풍경일 수도 있겠다. 시시포스의 바위는 굴러떨어지고 돌탑은 무너질 것이며, 하늘과 줄기의 푸른색은 이내 식어 버리기 때문이다. 시를 쓰는 한 그 모든 완성이라 믿었던 성취들은 ‘덧없음’과 ‘부질없음’으로 이룩한 ‘헛된 완성’이니 말이다. 그러나 열매 맺음의 유무가 나무를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듯이, 아니 때로는 열매가 그 나무를 결정짓고 이름을 붙이기도 하듯이, 본질에 맞닿아 본 언어와 그렇지 않은 언어로 맺은 열매의 밀도와 당도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시인의 가지와 뿌리는 뻗어나간다. “고층빌딩 창문에 매달린 사람”이 “죽음을 바라보진 않았을거”라고, “공중보다 바닥이 먼저 다가왔을 뿐”이라고 말하며, “사후 세계”따윈 진작 “보고 있었다”는 듯(「간격」), 시듦을 알지만 시듦 따윈 모르는 사람처럼, 그렇게 천천히, 본질을 향해서.
뻗쳐 오르는 여름 한낮,
꽃과 가시를 한 몸에 처박은 들장미처럼
한 줄기 문장을 쓴다
여기까지 온 시간의 바닥에 붉게 핀 얼굴을
흩뿌리면서, -「돌침대의 노래」 부분
김진석/문학평론가 202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등단
『현대시』 2022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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