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두 날개/ 강영은
욕망은 늘 다른 어떤 것을 추구하는 환유적 운동을 보여준다. 욕망이라는 의미의 연쇄가 한 순간 멈추게 되는 지점에서 그 율동은 왜곡된 집착을 낳는다. 이 집착은 결코 만족될 수 없으며 태양을 향해 날아가는 이카루스의 날개처럼 극한을 향해 치닫는 파토스의 세계를 보여준다. 파토스는 각성적 의식보다도 의식하의 근원충동에 더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인간 존재의 근원 성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체의 행동을 야기 시키는 개체의 동인이 되는 점에서 볼 때, 욕망 역시 인간 존재의 근원성에 자리한 존재표현임에 틀림이 없다.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욕망은 소멸되지 않는 본성을 지닌다. 결코 만족될 수 없으며 단순히 소멸되지도 않는 욕구가 없다면 욕망도 가능하지 않겠지만, 욕망이 없는 상태는 유기체 자체의 파멸을 의미할 뿐이다. 이러한 욕망에 두 날개가 있다면 그것은 몸 밖으로 탈출하는 내면의식이 정체성을 드러낼 때일 것이다.
순결하고 때 묻지 않은 소녀가 백조의 몸에 갇혀 다시 인간으로 돌아가기를 꿈꾸듯 각기 다른 자아를 지닌 검고 흰 날개는 긍정적이면서 부정적인 욕망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은유와 환유로 이루어진 것, 그것은 기표요 무의식'이라고 한 라캉의 말처럼 무의식 속에 자리한 희고 검은 욕망의 두 날개를 영화<블랙 스완>을 통해서 읽어내 본다. 이 영화는 라캉의 말을 다양하게 변주해낸다. 욕망과 접점을 이룬 코드가 은유의 옷을 입고 그 속에 숨은 기의를 다양하게 펼쳐 보여준다.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를 접목시킨 영화를 <블랙 스완>이라고 이름 붙인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다. 백조하면 우선 먼저 흰 깃털을 가진 우아한 새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1697년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서 검은색 백조(흑고니)를 처음 발견하기까지는 사람들은 모든 백조는 흰색이라고 인식하였다. 그때까지 발견된 백조는 모두 흰색이었기 때문이다. <블랙 스완>이 가리키는 원래의 뜻은 이처럼 일어날 수 없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었지만, 호주에서 검은 백조가 실제 발견된 이후로 관찰과 경험에 의존한 예측을 벗어나 예기치 못한 극단적 상황이 일어나는 일을 뜻하는 용어로 의미가 변경되어 사용되고 있다. 영화 <블랙 스완>속에도 예기치 못한 극단적 상황이 숨 가쁠 정도로 흘러넘친다. 과잉의 리듬이어서 더욱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네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유일한 사람은 너야. 이제 보내야 할 때야. 너를 편안하게 해줘봐” 욕망의 갈림길에서 날개를 파닥이는 백조와 흑조, 영화의 줄거리를 더듬어 가보자.
뉴욕 발레단에 소속된 니나(나탈리 포트만)는 인생의 모든 것을 발레에 바치고 있는 소녀이다. 전직 발레리나 출신인 엄마 에리카(바바라 허쉬)는 지나칠 정도로 그녀를 알뜰히 보살피는 한편,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 자신의 품에 가둔 채 끊임없이 그녀를 채근한다. 분홍빛 침실 속에서 인형과 더불어 살아가는 그녀는 자신의 내면에 숨 쉬고 있는 욕망을 인지하지 못한 채 그저 엄마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간다. 영화의 프롤로그는 니나의 꿈에서 출발한다. 백조에서 흑조로 전환해나갈 니나의 앞날을 예견하듯, 꿈속의 그녀는 백조이지만 흑조의 역할을 한다. 프로이트가 꿈을 가능케 하는 일반적 전제조건으로 왜곡과 변환을 말했듯이 영화 속에서 그녀는 오데드의 모습, 즉 백조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마법사의 딸인 오딜을 춤추고 있는 것이다. 꿈의 판독을 가능하게 하는 이러한 기표는 꿈의 수수께끼 구조가 제시하는 비유들을 설명해 준다. 암시성이 해독되는 순간이랄까, 무의식적 동기유발은 무의식적 효과뿐만 아니라 의식적인 효과도 만들어 내기 때문에 그녀의 무의식이 꿈이라는 육체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엄마 에리카(바바라 허쉬)는 과거에 발레리나였지만 뜻하지 않게 니나를 임신함으로 발레를 그만 둔 경력이 있다.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투영시켜 딸인 니나를 발레리나로 만들고 그것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낀다. 과거의 일을 항상 후회하는 그녀는 딸이 욕망의 포로가 되지 않도록 늘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항상 “예쁜 소녀”라고 부르며 니나의 마음 속에 잠재해있는 욕망을 억압할 뿐 아니라 자신을 의지하는 마마 걸로 키운다. 니나는 철저히 엄마가 만든 욕망의 거울인 셈이다. 그녀 또한 언제나 엄마의 기대에 부흥하고자 하며 발레에 지나치게 열정적이다. 거울에 비친 자기 영상을 보고 매우 즐거워하는 어린 아이처럼 이러한 상상적 오인은 자신이 본 총체적인 모습이 거울을 통해 본 허구의 모습이라는 걸 니나가 알지 못하고 있음을 뜻한다. 즉, 그녀는 성장한 여성이지만 자신을 동일시하는 어머니 때문에 진정한 자아를 찾지 못한 어린 아이에 불과할 뿐이다. 이러한 니나는 필연적으로 존재 내 결핍을 갖게 되는데 이러한 성향은 그녀가 흑조가 되는데 혼란을 겪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녀가 이후 '자아' 라는 개념을 갖게 되면서 자아가 분열되는 양상을 지니게 된다. 영화 전편을 통하여 거울이 오브제로 자주 등장하는데 거울의 의미는 <자끄 라캉>의 욕망 이론을 뒷받침하는 하나의 장치로 여겨진다. 라캉은 인간의 정신적 삶을 기호학적으로 풀어내는데 제1단계인 상상계는 어린아이가 거울을 갖고 노는 거울단계를 의미하며 니나가 아직 현실 세계로 진입하지 못했음을 나타낸다. 영화 속의 거울들은 니나의 변화 과정을 고스란히 투영시킨다.
한편 예술 감독 토마스 리로이(뱅상 카셀)는 프리마돈나 베스(위노나 라이더)를 새로운 시즌의 오프닝 작품 <백조의 호수>에서 강판시키기로 결정, 니나를 제1후보로 올린다. 그리고 마침내, 백조와 흑조라는 상반된 성격의 1인 2역을 연기해야 하는 ‘백조의 여왕’으로 발탁한다. 하지만, 순수하고 나약한 백조연기는 완벽하게 소화해내지만 관능적이고 도발적인흑조를 연기하는 데에는 불안한 니나, 그녀에게서 내면의 열정, 분노, 사랑 심지어 관능적인 섹슈얼리티까지 끄집어내려는 토마스는 “거미줄을 치는 거미처럼 세상을 유혹해!”라고 다그친다. 작품에 몰입 또 몰입하느라 심한 압박감을 느낀 니나는 자신의 몸을 긁고 물어뜯는 등, 자기에 대한 폭력을 수시로 표출한다. 특히 오른쪽 어깨 뒤를 긁어서 상처가 나는데 이 상처는 욕망이라는 영화 속 기표이다. 집에 가서 자기를 만져보라는 토마스의 말에 귀가 후 자신의 몸을 만지다 자신도 모르는 새에 자위행위를 하게 된 니나, 그녀의 몸에 숨겨진 성적 욕망은 영화 도처에서 욕망의 한 단면을 표출시킨다. 예를 들어, 무대를 압도하는 카리스마와 관능미로 은근히 니나를 압박하는 릴리(밀라 쿠니스)와 환각제를 마시고 동성애를 하는 장면을 환상 속에서 보게 되는데 이 모두는 <리비도>라는 성적 욕망의 코드이기도 하다.
리비도[Libido]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갖추고 있는 본능에너지. 원래는 라틴어로 욕망을 뜻하는 단어이다. 성적인 욕구가 내부로 향하든 외부의 객체에게로 향하든 어떤 경우이든 간에 욕망이 만족을 향해 움직일 때 동원되는 에너지 전체를 지칭한다. 순수한 백조와 사악한 흑조의 양면을 연기해야하는 니나는 이러한 리비도를 점차 경험하면서 차츰 흑조로서의 모습을 축적해나가게 된다. 하지만 작품에 대한 지나친 욕망은 강박과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하여 환상과 환청을 듣는 등, 자아분열 양상까지 보인다. 또 자신에게 자리를 빼앗겨버린 베쓰(위노나 라이더)에 대한 부담감, 신체를 활용해야 하는 직업을 갖는 이로서 노쇠화에 대한 고민과 두려움을 보여주면서 그녀는 진정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잠재되어 있던 니나의 욕망이 서서히 존재감을 드러내는데 반대되는 두 가지 감정, 욕망, 집착 사이를 왕래하는 감정의 양향성은 엄마를 향한 순종과 반항, 안일과 개척, 낙심과 희망, 사이를 동시에 왕래한다. 흑조 역으로 인하며 점점 파괴되어가는 그녀를 염려한 에리카는 공연을 만류하지만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욕망의 포로가 된 그녀는 어머니에게마저 폭력을 행사하는 잔인함을 보인다. 공연이 시작되고 백조 역에 실수 한 그녀는 환상과 현실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환상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흑조 역을 대신하려는 릴리로 알고 거울을 깨어 릴리를 (자신의 복부를) 찌른다. 무대 위로 나선 그녀는 충천하는 에너지로 완벽한 흑조를 재현해낸다. 백조로 변신하기 위해 대기실로 돌아온 그녀는 자신이 헤친 릴리가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임을 알게 된다. 복부의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닦을 새도 없이 피날레를 추는 그녀, “완벽함이란 통제하는 것만이 아니야, 흘러가게 두는 것이기도 해” 라는 토마스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는 듯 니나는 “나는 완벽 했어요”라고 말하며 흐믓한 미소로 자신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홉스>는 근본적인 심리적 동인이 쾌락에 대한 욕망이라고 주장했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자연적 욕망을 굴레로 보았다. <칸트>는 욕망에서 비롯되는 행동은 자유로울 수 없으며 자유는 단지 이성적 행동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욕망에 기반을 둔 모든 행동을 가언적 명령이라고 명명했다. 이처럼 욕망의 본성은 모든 경우에서 안개와 같이 모호성을 지닌다. 때문에 만족의 원천이 되는 대상에 대한 탐구임에도 불구하고 욕망은 자기만족을 거부하는 듯 보인다. 그래서 욕망은 대상에 대해 만족되기를 원하기도 하고 원하지 않기도 하는 양가감정을 지닌다. 한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 이전하면서 욕망은 뼈를 갉는 밑 빠진 독이나 멍석에 널어놓은 씨앗이 되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욕망이란 근본적인 불만족에 불과할지 모른다. 이러한 욕망의 정체성을 영화는 토마스의 입을 통해 말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욕망은 어두운 충동에서 비롯되는 것, 위험하게 만들고 가끔은 완벽하게 만들기도 하지 하지만 지랄 맞게 파괴적이야" 가끔 완벽하지만 지랄 맞게 파괴적인 욕망이 욕망 자체로의 한계를 가질 때 우리는 그것을 극복이라고 부른다. 성경 야고보서 1장 15절에 나오는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는 성구 역시, 극복하지 못한 인간의 욕망을 이야기한 것이고 보면, 사랑이든 돈이든 명예든, 욕망의 한계점은 죽음이라는 정점에 도달하는 공통성을 보인다.
<블랙 스완>은 욕망에 대한 심리적 갈등과 도착점을 정교하게 교직하면서 파토스의 끝이 죽음이라는 강렬한 메시지를 남긴다. 욕망이란 비가시적 존재가 나를 무너뜨릴 때, 아름답고 두렵고 연약한 백조의 날개로 자신의 본성을 통제하며 순리의 계단을 오를 것인지, 통제할 수 없는 검은 날개, 흑조의 사악한 기운을 끌어당겨 자신을 파멸시켜서라도 당당하게 빛나는 찰나를 얻을 것인지, 당신이라면 어느 날개를 선택할지 묻고 싶어진다.
- <시와 미학> 2011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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