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마고의 항아리

청견淸見

by 너머의 새 2015. 9. 23.

청견淸見/강영은




바람이 북풍을 몰고 계절의 끝자락으로 사라진 어제는 귤나무 잔가지를 쳤다 어린 목숨만 골라 벤 망나니가 되었다 가을에 돋은 가지라야 꽃을 피운다는 걸, 꽃피지 못 할 목숨만 남긴 허실을 접하고 나서 베이비박스에 어린 것들을 내다버린 미증유의 봄이 밥 때를 놓아버렸다

​ 어느 눈(目)의 굴욕일까, 귤도 사람도 되지 못한 패착을 찾느라 오늘은 한권의 책도 읽지 않았다 건피증 앓는 살갗에 손을 얹고 오렌지와 교배한 귤나무만 착실히 읽었다 몇 번의 계절을 넘기다보면 슬픔도 맑아져 윤기 나는 이마를 남긴다고, 귤나무는 이마에 새겨진 푸른빛을 모조리 지웠더구나

그 빈자리를 헤아리는 눈이 상등품과 하등품을 고른다는데 까마귀처럼 흐린 내 눈은 낯짝이 두터운 오렌지와 말랑말랑한 귤이 서로의 본색에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을 보며 利와 害가 서로를 돕는 일이 무공해라는 걸 배우는 중이다

청견 한 박스 보내니 가렵다고 너무 긁지 마라, 저토록 노랗게 익기까지 얼마나 많은 푸른색을 버렸겠니, 상처가 꽃이 되고 부스럼딱지가 열매로 자라는 일이 쉬운 일일까 마는 虛와 失마저 푸르게 보는 이 봄에는 딱지 떨어진 귤나무에도 죽은 내 안목에도 새 살이 돋지 않겠니






* 청견, 약간 납작한 오렌지 모양이며 과실 표면이 보통 귤보다 매끈하고 오렌지보다 껍질이 얇다.

'마고의 항아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리박물관  (0) 2015.10.22
초적草笛   (0) 2015.09.23
무공적無孔笛의 봄  (0) 2015.09.23
제주 한란  (0) 2015.09.23
해거름 전망대  (0) 2015.0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