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너머의 리뷰

묵식심융으로 사라진 말의 경계/지현아(시인)

by 너머의 새 2017. 1. 10.

묵식심융으로 사라진 말의 경계/지현아(시인)

 

 

 

  남자가 건넨 최초의 말은 눈웃음, 고삐를 쥐어준 최후의 말은 손짓과 발짓

 

  당근 대신 붉은 장갑을 끼고 채찍 대신 잔뜩 겁먹은 눈으로 말을 따라간다 다른 부족에게 납치당한 몽골 처녀처럼 말똥 냄새 땀 냄새로 범벅진 말을 다소곳이 따라간다 속도가 다른 말의 층위에 온몸의 리듬과 느낌을 실어 나른다 말문을 처음 열 때처럼 말을 껴안은 등줄기가 곤두서고 말을 감싼 허벅지가 팽팽해진다 그의 말은 바람에 날리는 갈기와 근육질의 엉덩이로 세계를 질주한 속도의 후예, 매끈하게 다듬어진 등외엔 수식이 없다 사막과 초원을 가로지른 엉덩이 외엔 안장이 없다 마음보다 먼저 몸을 낚아챈 말의 거리는 지구를 한바퀴 돌아온 것처럼 멀지만 말타기의 기초는 마음을 여는 것, 눈 속에 들어있는 초원만 읽기로 한다 한 줄금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푸른 단어가 일렁인다 말의 경계가 사라진다 말의 국경이 사라진다 말과 말 사이, 초원만 남았다

 

 사막과 초원, 습합의 땅에서 피어난 그리움은 이국어도 모국어도 필요 없는 말의 후손, 최초의 그리움은 손과 발에서 태어났다

 

강영은, [말의 후손] 강영은 시집 최초의 그늘』/시안에서

 

 

논어에 나오는 유명한 말 중 묵식심융(默識心融)’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묵묵히 이해하여 마음에 녹여둔다는 의미로, 그 모습을 햇빛에 드러난 눈이 땅에 스미는 것으로 인유하는 말이었다. 강영은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최초의 그늘을 읽으면서 언어와 이미지를 결합시키는 시인의 능력이 마치 햇빛에 드러난 눈이 땅으로 스미듯 자연스럽고 흔적 없는 융합에 이른다고 생각되었다.

예컨대 바람의 금지구역이란 작품에서 시인은, 높은 고도에서 바람에 맞서는 새들에게 허공은 날개가 넘어야 할 겹겹의 벼랑이라 일러주었고, 우는 화살에서는 고대 중국에서 개전 신호로 쓰이던 효시를 화살통에서 꺼내 쏘는 모습을 두고 사내의 배를 갈라 울음을 꺼내는 것으로 묘사하였는데 그 선명한 이미지와 언어의 결합이, 들을 수 없는 바람의 목소리와 들은 적 없는 효시의 울음소리까지도 보고듣게 해주었다.

말의 후손은 동음이의어인 ()과 말() 사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그 흔적이 드러나지 않게 온몸의 리듬으로 오가는 작품이었다. 남자의 마지막 말은 말을 탄 채 보여준 손짓과 발짓이었다. 남겨진 화자가 그의 등 뒤에 말을 쏟아내면 바람에 날리는 갈기가 보이고, 거기에 올라 말타기를 하려 하면 푸른 단어가 일렁였다. 그리하여 말의 경계가 사라지고 그리움이 태어난다.

화자의 그리움은 그의 마지막 말 뒤에 생겨났기에 말의 후손이다. 그 후손의 전생과 현세를 잇는 2연은 그 양적 분량이 상당하지만, 마지막이란 말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그리움의 속도를 짐작해 볼 때, 그것은 분명 찰나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 짧은 시간에서 이토록 큰 이미지를 읽어낸 시인의 큰 눈이 놀라웠다. 또한 그 이미지에 언어가, 혹은 언어에 이미지가 순서나 방향도, 그런 과정이 있었는지마저도 알아채기가 힘들만큼 자연스럽고도 감각적으로 융합되어 있었다.

 

-『문학과 창작』 2011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