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성의 거울에 비쳐진 세계/강영은
-신작 소시집 시작노트
원고를 청탁 받고 작품을 보낼 때마다 부끄러움이 앞선다. 왜 부끄러운 것일까, 자문자답의 시간을 가져보지만 그것은 수시 때때로 그럴듯한 변명만을 둘러대곤 한다. 시작노트라는 지면을 빌려 그 부끄러움을 추궁해본다. “시는 그저 취미로 쓸 때가 좋았어, 아니 모르고 쓸 때가 좋더라” 시인 아닌 지인들에게 가끔 변명하곤 한다. 이 말을 역으로 하면 이제 ‘시를 좀 아는 때’가 되었다는 말이고 ‘취미가 아닌 업’으로 쓴다는 말이겠지만 궁색지변일 뿐이다. 그럴듯한 정의와 다양한 개념에도 불구하고 시가 무엇인지, 막연할 때가 많다. 마치, 자신이 섬기는 대상이 누군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자신이 창조해낸 신을 믿는 신자처럼 말이다. 이 모호함은 대단히 자기중심적이고 자기편의적으로 시에 대한 신앙심을 고취시킨다.
시의 종교성은 이처럼 ‘천상천하 유아독존’적이어서 자신의 시와 동질성을 갖지 않은 시들은 마치 사이비종교의 신자정도로 여기기도 한다. 시의 텍스트가 쓰는 사람보다 독자 중심으로 개진되어나가는 현상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와 반대로 시류에 맞춰 유행하거나, 종횡무진 언어적 광휘만을 뽐내기도 한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같은 모호성이 매력이라는 시들도 있다 보니, 진정한 시의 향기가 어디에서 발하는지, 나의 시작업은 본류를 잃고 오락가락하기도 했을 터였다. 시는 시의 접근 방식에 따라 시대환경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몸체를 지닌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시를 정의해온 많은 문학가들의 구절을 빌리지 않더라도 작금에 이르러 여러 문예사조가 공존하는 방식을 생성시킴으로 시의 정체성에 대한 ‘초록은 동색’ 이라는 편견과 아집을 방류했다고 할 수 있다.
이 혼잡한 물결 속에서 더욱 세포 분화한 시는 때문에, ‘시가 무엇이며, 좋은 시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복잡다단한 양상을 보일 수밖에 없다. 단순히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나 시가 지니는 예술적, 미학적 관점과 시를 '이루는 구성성분으로서의 시어문제, 시의 구조문제, 사람의 심리 속에 내재된 있는 무의식 세계와 정치상황과의 연계 등의 소재 적 문제, 표현하는 방식문제, 타 예술과의 교류 문제, 등 방대하기 이를 데 없는 구축물로서의 존재감을 생각하다보면,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무지와 결핍의 문제인가, 자문해본다.
이에 대한 답은 단순히 말해 ‘무엇을 쓸 것인가와 어떻게 쓸 것인가’ 라는 질문으로 귀결 지어진다. 간단한 질문 같지만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필연적이며 함축적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무엇’과 ‘어떻게’ 사이에서 번민해온 詩作이 하나로 연계되는 선상에서 나의 부끄러움이 시작된다는 말은 이제 겨우 시에 대해 무릎걸음을 시작했다는 말과 다름이 아니다. 내 눈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나를 부르는 시, 더듬거리며 나아가는 길은 쉽지 많은 않다. 그 성산을 오르기 위해 ‘무엇’과 ‘어떻게’ 사이를 헤매다보면, 어렴풋이 보일 듯 말듯 존재하는 시를 道 닦듯이 써왔다면, 무지와 결핍이 나를 용서해줄까,
자신이 가장 절실한 것을 쓰라는 文友의 말을 지침서인양, 근황의 심층을 더듬어 본다. 온전한 칩거만이 마음을 위무해주는 요즘, 마음 안에 숨겨져 있던 미지의 대륙, ‘무의식’이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내 속에 잠재되어 있는 기억들이 고통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개개의 기억들은 각각의 저장고에 서로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지만, 그것들이 서로 결합될 때 ‘은폐 기억’이라 부르는 병인(病因)을 완성시킨다. 보다 첨예하게, 그 고통과 대면하는 날들이 늘어났다. 젖은 봉투처럼 쉽게 찢어지는 날 속에 죽음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시를 쓰는 일만이 유일한 위무인 나날들, 진정한 삶이란 “죽음을 향한 역동”인지 모른다. 죽음을 인지하는 순간, 정말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감동은 삶이라는 유한성의 거울에 비쳐진 세계를 발견할 때이다.
춘장대 해수욕장에서 쏙이라는 이름을 가진 갯가재를 보았을 때, 안으로 깊이 들어가거나 밖으로 볼록하게 내미는 모양. 쉽게 밀어 넣거나 뽑아내는 모양. 대번에 빠지거나 터지는 모양이라는 뜻을 가진 부사어, 쏙이 떠올랐다. “창조의 유일한 법칙은 혼자 힘으로 버텨내는 것이며,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들뢰즈의 말을 기억해낸 건 그 때였다. 작품을 독자적으로 만드는 것은 큰 어려움이지만 ‘유기체적인 신체’로 한정되지 않는 보다 폭넓은 변용역량을 가진 언어의 신체로 읽어주기 바라면서.............
시적 언어를 중심으로 시를 써나갈 때, 시어나 시행 단위의 이미지들은 같은 시편의 다른 이미지들과 문면 맥락적인 연계성이 적어진다. "살별에 대한 함의서"나, "피아노"는 필수불가결한 문면 혹은 상황 맥락 적 의미 구조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미지에 대한 가시적 객체들의 표면적 형상을 중심으로 ‘관계’와 관계에 관한 나의 ‘내면’ 상태를 그려낸 시라 할 수 있다.
시적 자아가 중시되는 시에서 이미지들은 최종적인 당일 이미지로 진행해가기 위해 조절된다. ‘젖은 봉투’와 ‘몇 겹의 눈’은 시적 대상이 이미 현상적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내면적 결속 논리에 따라 하나의 상징적 혹은 원형적 이미지를 향해 결합해 본 셈이다. 들뢰즈는 “감정도 주체도 내부성에서 벗어나 순수한 외부성의 환경에 격렬하게 투사되며 이 외부성의 환경에 의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속도와 발진력을 부여받는다.
또한 사랑이건 증오건 그건 이미 감정이 아니라 변용태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 변용태를 시적 언어로 바꾼다면 시인의 줌 렌즈에 의해 확대되거나 축소되는 혹은 변형되는 세계, 시인이 새롭게 발견한 세계의 가시화한 양태라는 생각이 든다.
시 작업은 이러한 노마드적 기질에 의존하여 해독 될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진 상상력에 언어의 옷을 입히는 행위라고 본다. ‘시인은 간접 체험이든 직접 체험이든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상상력과의 연합 속에서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호모 노마드다’ 라고 말하고 싶다. 불, 바퀴, 언어, 문자, 목축 도구, 예술, 항해, 시장, 민주주의, 길, 등등, 틀을 갖지 않은 모든 것은 유목이 생산해낸 것들이 아닌가, 그 자유로움이야말로 시가 지니는 원형적 속성이라고 생각한다. 그 자유로움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찾아 고통의 방랑을 계속할 것이다.
-미네르바 2011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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