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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머의 산문

밥 한 그릇을 앞에 놓고

by 너머의 새 2015. 9. 10.

밥 한 그릇을 앞에 놓고





잠언 15:8에 보면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는 구절이 있다.



제사와 기도라는 현상보다,악인과 정직한 자라는 본질이 중요하다는 구절이다. 악인의 제사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다는 것이 무서운 본질임을 잊어서는 안될 듯 하다. 인간은 현상의 수준을 넘어서기 힘들지만 하나님은 본질로 판단하시는 분이시기에, 우리의 현상은 본질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하며 그 본질 또한 정직한 것이어야 한다.



대개 남의 말을 즐겨 하는 사람들은 본질이 무엇이든 현상적으로 벌어진 일에 대해 더 관심이 많다. 현상이야말로 도마에 올리기에 가장 풍부한 질료이기 때문이다. 도마 위에 올린 생선을 난도질 하듯, 그들은 자신의 상처나 열등감, 혹은 가학적인 본성을 거기에서 위로 받는다. 근거를 확인하지 않은 사실들에 대해 피 튀기는 게임을 즐기며 뭉게구름 일듯 확산되는 현상에 대해 승리감에 도취된다. " 발없는 말이 천리를 달리는" 것 또한 그런 이치다.



본질과 현상은 언어학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기초적인 논제 가운데 하나이다. 본질이란 어떤 사물이 다른 사물과는 구별되는 사물로서 성립하고 있는 그 고유의 존재를 일컫는 말이며 라틴어 번역인 'essentia'는 '존재한다'에서 온 말이며 '참으로 그것인 것'이라는 뜻이다. 본질은 유(類)와 종(種)의 차이에 따라 정의된다. 예를 들어 인간의 본질은 '인간성'이며 그것은 '이성적 동물'이다.



사람은 이성적 동물임에도 불구한고 이성적 판단을 유보한 채 지각되거나 관찰되는 어떤 대상·사실·사건 등을 확대 재생산하는 것을 즐겨한다. 인간성의 결여 문제로 발전하기도 한다. 현상은 대개 감각의 대상을 말하며, 이런 의미에서 지성으로 알 수 있는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그리스어 동사 'phainesthai'('보이다', '나타나다'라는 뜻)는 지각되는 사물의 실제 모습이 겉모습과 다른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는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서 '선(善)으로 보이는 것'은 그것이 정말로 선이든 아니든 사람에게 선으로 보이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악(惡)으로 보이는 것'은 그것이 정말로 악이든 아니든 악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사물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현상에 집착하는 일은 슬프다. 자신이 보지 못한 사실을 부풀리거나 귀와 귀를 열고 입과 입으로 소근거리며 희생양의 제사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것 은 더욱 슬픈 일이다. 이러한 자들 중에서 용기있게 현상을 파악하고 그 속에 숨겨진 진실이 무엇인지 당사자에게 묻는 자는 극소수다.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진정한 사람이라면 현상에 대해 재고할 여유를 갖고 있을 것이다.



시를 쓰는 행위는 자신의 양심에 반할 수 없다. 정당한 사실은 앞에서나 뒤에서도 정당할 것이다. 소문만 믿고 소문을 퍼트린다는 행위는 의도적인 저의를 갖지 않는 한 자신도 모르는 새에 당사자를 죽이는 결과에 불과한 무책임한 일이다. .피 흘리는 먹잇감을 발견했을 때의 쾌감과 열락에 들뜨고 싶은 유혹과 충동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진실이 어디에 있던 본질을 간과하는 시대, 서로 헐뜯고 으르렁대는 야수의 시대, 이웃과 친구와 동료에게 도움을 주거나 지하철안에서 동전 바구니에 동전을 넣는 일조차 가식적이며 위선으로 보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서글프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일까?



친구, 혹은 동료를 뜻하는 영어, /bob/이라는 '소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밥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밥 한 그릇을 앞에 놓고 누군가의 밥알로 씹히고 있을지도 모를 사람들을 떠 올려본다. 당신도 나도 예외가 아닐지 모른다. 친구라는 누군가에게 밥알로 씹히고 있는 건 아닌지, 밥상머리에 앉기가 무 섭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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