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잎에서 발화된 타자안의 나/ 강영은
왜 詩를 쓰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自問自答의 막연한 기회 외에는 구체적으로 생각한 적이 별로 없다. 막연함 속에 이루어지는 작업은 때문에 불투명함이 오히려 고통으로 다가서곤 했다. 이 불투명함에 대해 나는 두 번 째 시집 서문에서 '내가 흘린 피의 자국들, 그 상처에서 피워낸 꽃의 말들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처럼 치기어린 정의에 대해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그의 시론집에서 멋지게 감싸주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시의 꽃잎을 뜯어낸다는 그의 냉정한 시법이 연약하고 제멋대로 피어난 꽃과 같은 내 시의 구성물로부터 단어들과 이미지들을 분리해내어 그 행위의 결과물로 손상되어질 내 자격지심에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바늘이나 칼로 꽃을 찌른다고 해도 꽃은 결코 시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시는 강한 생명력을 갖고 있으며 비판적인 개입도 잘 견뎌 낼 능력을 갖고 있다. 따라서 어떤 시행 하나가 좋지 않다고 해서 시 전체가 망가지는 것도 아니며, 또 시행 하나가 잘 되었다고 해서 시 전체가 구제를 받는 것도 아니다”라고 한 그의 말은 내게 커다란 힘이 되어 주었다. 잘못된 시행을 찾아내는 것과 훌륭한 시행을 찾아내는 능력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것이어서 이러한 능력 없이는 시를 참되게 즐길 수 없다는 이 위무적인 시론이 막 발화하기 시작한 시의 접면에 붉은 피를 흘릴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 준 것이다. 시 쓰기의 유효한 지침서인양 발화하는 그의 언표들은 꽃잎 하나의 힘을 넘어서 조형미 있는 언어의 조각품을 만들라고 나를 유혹한다. ‘장미의 잎을 모두 뜯어내 보아라, 그 꽃잎 하나하나는 아름다울 것이라고’, 내 시 쓰기의 시발점은 이처럼 언어의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행복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詩의 특수한 아름다움은 언어 안에서, 언어에 의해서, 언어를 위해서 있다는 믿음이 내 시작업의 근간을 이룬다. 다시 서두로 돌아가 왜 시를 쓰느냐? 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본다. 내게 있어 시를 쓰는 일은 언어의 새로운 가치를 모색하기 위한 심미적 관점에서 자아와 세계를 바라보는 일이며 촌철살인의 직관력과 화룡점정의 노력 끝에 절차탁마의 보석을 캐내는 일이라고 자답해 본다.
쓴다와 쓰다 사이,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밤 골 아저씨의
낫 같은 ㄴ이 있다
그 낫은
길이 잘 든 손을 갖고 있어서
아저씨가 까놓은 알밤들은
울퉁불퉁
반발이 심했지만
맛이 좋았다
잠 안 오는 밤
쓰다와 쓴다 사이,
낫 놓고 니은 자는 더 더욱 모르는 아저씨의
낫,
종결형 어미가 시퍼렇게 달려든다
날카로운 날에 손을 베인다
잘 벼려진 낫날이
붉은 혀가 삼킨 밤 껍데기를 헤집어
꿀꿀이 바구미를 토해낸다
밤새도록 밤을 파먹은
벌레 시인이다
-<벌레시인>전문-
시의 이미지는 언어를 아름답게 하고 새롭게 한다. 단어의 해체 역시 적응의 범주 안에서 탄력성을 갖는다. 위 시를 예로 든 것은 이러한 생각과 무관하지 않다. 썼던 시기를 생각해본다. 시가 아닌 다른 일에 몰두할 때였다. 시에 대한 집착증은 여전하였지만 일은 바쁘고 몸은 피곤하여 마음과는 달리 시가 쓰이지 않는 나날이었다. 도대체 시를 '쓴다'와 '쓰다' 사이에 무엇이 있길 래 詩가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지 시와의 접신을 기다리기를 몇 달, 어느 날 문득 그 행간에 종결형 어미인 'ㄴ'이 버티고 있음을 깨달았다. 종결형 어미만도 못한 내가 벌레시인임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시는 결국 손끝에서 나오는 결과물이다, 라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그때 이후 나는 무조건 손가락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손가락에 무의식의 나를 기탁한 채 하루도 빠짐없이 책상에 앉는 버릇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일까, 누에고치에서 실이 풀려나오듯 내 안의 내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 글쓰기의 행복을 알 때는 거기에 몸과 마음과 손과 작품을 바쳐야 한다는 말이 체험 속에 저장되었다.
시가 가지고 있는, 또는 시가 보여주는 매력이 시가 본질적으로 내장하고 측면이라면, 시를 읽는 매력은 독자의 몫에 속한 것이고 시를 쓰는 매력은 시인의 몫일 것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시인의 눈에 비친 우주나 사물이나 내면의 세계를 시라고 하는 언어형식으로 표현하는 미적행위를 말한다. 시란 시어를 통하여 세계와의 합일이나 갈등을 미적으로 구축한 결과물인 것이다. 이 미적 구축물이 놓이는 공간을 시적 공간이라 한다면, 이 시적 공간의 다양성, 혹은 광활함이 시를 쓰게 하는 매력중의 하나일 것이다. 시인들은 다양한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자신이 경험했던 것들을 미적 구축물로 재현해낸다. 그 재현의 힘이야말로 시인들을 또 하나의 창조자라 부르는 근간일 것이다. 나 역시 물리적 시 공간을 뛰어넘은 시적 공간 속에서 감꽃 목걸이를 만들어 목에 거는 열세 살의 나를 불러오기도 하고 활짝 피고 싶은 어느 시간대에 나를 정지시켜 놓기도 한다.
엄마가 내 푸른 담요를 걷었을 때
나는 꽃이 될 거라는 예감을 가졌어요.
꽃이 나에게 노크를 했거든요.
엄마가 내 몸 속에
얼마나 많은 꽃씨를 숨겨 놓으셨는지
보세요, 저리도 많은 발가락과 손가락들을
마구 뻗어난 길들을
늙은 소나무의 축 늘어진 그것이든
버드나무 휘어진 허리춤이든
낭창낭창 휘감는 붉은 뱀들이
절정으로, 꼭대기로 치닫고 있잖아요?
폭염에 술 취한 딸처럼
주홍빛 얼굴을
울컥울컥 게우고 있잖아요?
그게 나라구요, 나였다구요
그러니 엄마, 습한 문 열고 나 장마 지게
꽃다운 나답게, 꽃답게,
툭, 툭, 모가지를 떨굴 때까지
그냥 피어나게 내버려 두세요
-<능소화>전문-
시의 화자는 연령계층으로 볼 때 '엄마'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는 연령에 속해 있다고 볼 수 있다. 연령계층에 따라 언어의 변이가 이루어지는 점을 감안해보면 사춘기를 지나 성적인 에너지, 혹은 본능에 눈 뜨는 20대 전후의 나이랄까, 이처럼 십 수 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 시적 공간에서 젊은 나를 만나는 것도 시 쓰기의 재미 중 하나다. 이 시의 모티프가 되는 능소화는 한 여름 오랫동안 감상할 수 있는 아름다운 꽃이지만 꽃이 지닌 전설에서 보듯 사랑과 기다림이라는 트라우마를 간직한 슬픈 꽃이기도 하다. 담장에 핀 능소화를 보는 순간, 加減없는 그대로 시가 쓰여진 것은 내가 지닌 심정적 공간 (섬과 여성과 젊음이라는) 속에서 무한대로 뻗어나가고 싶은 욕망이 능소화 줄기처럼 나를 감고 있었던 까닭인지 모른다. 그 이면에는 내 안의 트라우마, 사랑과 기다림에 상처 입은 젊은 날의 기억이 붉은 피를 뿜었던 것인지 모른다. “누가 말하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는 경지가 바로 미적 체험이요 세계의 융합”이라고 바슐라르가 말한 것처럼 능소화 시편은 이처럼 자아와 세계의 만남이 동일성으로 이루어져 생긴 미적체험이라 할 것이다. 시를 쓰는 재미, 다시 말해서 시를 쓰는 매력은 이처럼 무의식의 문을 열어 딱딱하게 굳어 있는 사유의 빵들을 말랑말랑하게 만드는 것, 가식적이고 허위적인 그림자를 내 몸에서 벗겨내는 데에 있다. 때문에 나는 마음껏 확장되거나 축소시킬 수 있는 시 속의 공간과 시간들을 사랑한다.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경험과 사유가 짜깁기 되어 하나의 새로운 시공간으로 탄생될 때,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재현성에 자유를 느끼기 때문이다. 자연 현상, 우주 만물에 이르기 까지 가공된 현실을 맛보는 것은 유한한 삶 속의 탈출구며 바라던 낙원이어서 그 속에서 또 다른 자신과 조우하는 놀라움과 치유라는 이름으로 상처 입은 영혼이 소생하는 것을 보기도 한다.
먹이를 찾아가는 수백만 마리의 누(gnu)* 떼가
대평원을 흔들며 달리고 있다
떡 벌어진 어깨와 드럼통 같은 몸뚱어리를 떠받치고
가느다란 두 다리가 함께 달린다
날카로운 이빨에 맞서는 것은
기우뚱거리는 발목의 힘뿐이지만
그 가느다란 끈이
서로의 발자국을 묶어주면서
건기를 지나
풀이 무성한 우기로 대평원을 운반한다
구르고 나뒹굴며 생의 행간을 지나는 길
누가,
누가 되지 않고 지나갈 수 있을 것인가
긴 문장을 완성하는 누 떼의 행렬 사이
누에게 길을 묻는 햇빛의 발자국이 간간이 섞인다
-<作詩法>전문-
시집 <녹색비단구렁이>를 내기 전까지 무의식의 저편에 선 나는 사실, 오랫동안 시의 밥이었다. 배고픈 것은 내가 아니라 詩였던 것이다. 때문에, 참고 기다려온 시에게 어떤 성찬을 제공할 것인지 삼고초려의 기다림과 정성으로 밥상을 차려보지만 내 손끝에서 지어지는 밥은 설거나 너무 질어 시의 입맛을 충족시키는데 충분치 않았다. 시에게 누를 끼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위 시는 밥 짓기에 대한 辯인 동시에 다짐이기도 하다. ‘누가, 누가 되지 않고 지나갈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중의적인 어법은 대초원을 향하는 누의 고된 삶과 시의 평원을 향하는 고통의 시간이 중첩 돼있다. 창작의 고통 속에서 햇빛 발자국 같은 따뜻하고 맛깔 진 밥을 짓기 위해서는 상상력이라는 장작불이 필요하다. 한편의 시가 재현(현실)의 축과 표현(개성)의 축, 그리고 언어(기호)의 축을 가지고 있다면 이 세 개의 축을 조화롭게 회전시키는 것이 상상력이라는 불길이기 때문이다. 문학적 상상력은 문학가가 책을 좋아하는 친구에게 제공하는 미적 대상으로써 시적 이미지를 통하여 한 영혼과 다른 영혼이 맺는 직접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활활 타오르는 시혼으로 교통할 수 있어야 한다. 상상력의 영토를 확장하는 일은 시혼을 지피는 불쏘시개의 역할이며 거기에서 피어난 불길을 가지고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창의적인 요리사의 몫일 것이다. 활활 타오르거나 물길처럼 요동치며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여주는 연상 작용은 자아와 타자와의 동질성을 발견케 하고 주제나 이미지를 응집시키는 힘을 갖는다 “글을 쓰면서 생각한다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생각과 말은 서로 탐탁치 않게 여긴다”고 말한 <조르주 상드>의 말처럼 말 위로 불쑥 솟아오른 차원을 붙들기 위해 긴장감을 놓지 않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이 차원을 영감(靈感) inspiration이라고 한다면, 그 순간이야말로 시가 나를 만나러 오는 순간이다.
어머니. 천둥번개 치고 비 오는 날이면 비 냄새에 칭칭 감겨 있는 생각을 벗어버리고 몸 밖으로 범람하는 강물이 되고 싶어요 모과나무 가지에 매달린 모과열매처럼 시퍼렇게 독 오른 모가지를 공중에 매달고 뭉게뭉게 피어나는 구름신부가 되어 한 번의 낙뢰, 한 번의 키스로 죽는 천둥벌거숭이처럼 내 몸의 죽은 강물을 퍼 나르고 싶어요
하지만 어머니, 내가 건너야 할 몸 밖의 세상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뿐이에요 눈부시게 빛나는 햇빛의 징검다리뿐이에요 내 몸에 똬리 튼 슬픔을 불러내지 못하기 때문일까요? 연두에서 암록까지 간극을 알 수 없는 초록에 눈이 부셔요 밤이면 독니에 찔려 죽는 꿈들만 벌떡벌떡 일어나요
어머니, 녹색비단구렁이새끼를 부화하는 세상이란 정말이지 음모일 뿐이에요 희망에 희망을 덧칠하는 초록의 음모에서 나를 구해주세요 제발 내 몸의 비단 옷을 벗겨주세요 꼬리에서 머리까지 훌러덩 벗어던지고 도도히 흐르는 검은 강,깊이 모를 슬픔으로 꿈틀대는 한 줄기 물길이고 싶어요 -<녹색비단구렁이>전문-
<녹색비단구렁이>는 의미에 종속된 언어 위로 올라온 그 돌출부인 셈이다. 현상학의 기본 규칙에 따라 크고 작은 돌출부를 개인적으로 체험하려고 훈련하면서 나는 시적 언어가 말의 높이를 향해 열려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처럼 표현이 생각을 능가하는 공격적인 미에 도달하기 위해 과도함의 심리를 이끌어내 이미지를 채색한 심리적 현실 속에서 시의 세계는 더 이상 의미의 세계와 연속선상에 있지 않고 독립성을 지닌다. 유성호 (한양대 교수)는 시집 <녹색비단구렁이> 해설에서 “꽃/집/독”이라는 다중적 속성을 ‘시’에 부여하는데, 그렇게 ‘꽃’과 ‘집’처럼 피고 지고 세워지고 무너지는 동안 ‘시’는 ‘독’처럼 스며 시인 자신을 “시퍼렇게 독 오른” 존재로 만들었다. 이처럼 치명적 독성을 감염시킨 ‘시’에 대하여 시인은 이제 “내 허물을 벗겨다오”라고 말함으로써, 시집 곳곳에 퍼져 있는 독성을 가로질러 새롭게 거듭나려는 존재론적 갱신을 욕망하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존재론적 갱신에 있어 좀 더 본질적이고 원형질적인 존재를 탐구해보고 싶은 나는 이 시점에서 내 시의 향방을 점검해보려고 한다.
도시 위에서 나, 지붕 위로 한 발을 내디뎠네
한 순간 지붕이 환해졌네
발은 가깝고 지붕은 멀었네 허공이 붕 뜨고 지붕이 꺼졌네
길이 사라졌네 지상에 포물선이 사라졌네
더 이상 사라질 것이 없었네
청람 빛 스커트가 펄럭이며 날았네
몸뚱이를 벗어던지고 어디론가 한없이 날아갔네
성당의 종탑이 나를 뚫고 지나갔네
푸른 언덕과 우리 속에 잠든 양떼와
광장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내 몸을 통과했네
내 몸에서 핏줄기가 흘러 나왔네
핏자국이 바닥을 물들이는 동안
차디찬 바닥이 나를 끌어 당겼네
바닥에 드러누운 내 그림자가 오래오래
어둠을 애무했네 어둠이 눈동자에 복사되었네
슬픔이 블랙으로 현상되었네
나, 그 때 모든 도시가 색채에 물들어 잠드는 줄 알았네
밤이 무중력 상태라는 것을 알지 못했네
바닥이 지붕의 가설무대라는 것을 알지 못했네
나는 내가 달빛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네
-<지붕과 바닥의 연계성에 대한 고찰>전문-
위 시는 앞으로 쓰거나 쓰고 싶은 징후를 내장하고 있는 시라 하겠다. 전통적인 이미지의 거처, 바로 거기에 살러 온 예외적인 이미지들이 있는데 내가 체험한 이미지들은 망막의 드라마가 된다. 그것은 응집된 시선의 명망 속에서 창조된다. 문학 이미지를 현실성으로 보여주려는 목적에는 다양한 텍스트가 활용되는데 위 시는 샤갈의 그림 ‘도시 위에서’ 표출해낸 달빛 이미지를 두 번 상상하고 두 번 생각하여 내가 지닌 여성성과 결합한 시이다. 두 번의 해방을 거친 시, 말하자면 환유적 기법을 사용하여 달빛 속의 나를 코팅한 셈이다. 지향하는 바, 서정의 세계를 바탕으로 한 모더니즘을 표방하고 싶은 나의 시 작업은 종종 이러한 환유 속에 궁굴려지고 다듬어진다. 그때마다 점검하는 것은 시 속에 드러난 시적 언술이 자폐적인지, 혹은 구사하고 있는 시어들이 딱딱하고 마른 빵처럼 기표 속에 드러난 언어적 유희의 불과한 것인지, 무모할 정도로 신경을 쓰기도 한다. 세계 혹은 독자와의 소통을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 욕심에 불과하겠지만 졸시 <담쟁이>의 마지막 구절처럼 ”기막힌 한 줄의 문장으로 나는 나를 넘고 싶다“는 생각은 감동과 감탄이 합체한 시를 갈구한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이 ” ‘나’는 나’의 세계에서 떠나 ‘나’의 바깥 또는 ‘나’와 절대적으로 다른 자를 향한다. 하지만 타자는 내가 어떠한 수단으로도 지배할 수 없는 절대적 외재성을 지닌다. 때문에 타자가 누구든 관계없이 그의 생명을 존중하고 윤리적 관계를 맺을 때 ‘나’의 유한성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타자는 단지 공존해야 할 다른 자아가 아니라, 주체를 구성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무한자’인 것이다. 시인이란, 레비나스가 말한 무한자가 아닐까? 말하자면, 무한한 미래의 시간성은 나의 지배를 벗어나 있는 것이지만 나는 타자안의 나를 통해서 무한한 미래로 연결된다. 이 같은 점에서 내 시의 주체는 미래의 무한한 타자성과 불연속적 연속성을 띠게 되는 양상으로 변모 해나갈 것 같다.
시와 정신 2009, 가을호 /우리 시대의 시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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