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너머의 산문

빛이며 어둠인 순간들

by 너머의 새 2015. 9. 10.

■ 빛이며 어둠인 순간들 -시작노트







무덥고 지루한 여름, 소나기구름이 지나간 하늘에 뭉게구름이 피어난다. 불안정한 구름의 층위에서 빛과 어둠이 교차한다. 빛이며 어둠인 순간들, 이미지의 입체적 궤적은 상상의 공간 속에서 피사체가 된다. 표현이 생각을 능가하는 공격적인 미에 도달하기 위해 과도함의 심리를 이끌어내 이미지를 채색한다.



의미에 종속된 언어 위로 올라온 돌출부를 상상이라고 한다면, 상상의 입체적 조형물을 만드는 작업을 시 쓰기라 명명해본다. 상상력은 경험의 한계성과 진정성의 측면에서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한다. 시 쓰기의 작업은 상상력을 조합하고 풀어내는 작업일지 모른다.



“레비나스”가 말했듯, 무한한 미래의 시간성은 나의 지배를 벗어나 있는 것이지만 ‘타자안의 나’를 통해서 무한한 미래로 연결될 수 있다는 믿음은 ‘나’의 유한성을 극복해준다. 주체를 구성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능동적인 시 작업의 오류를 허용해준다.



시인은 거짓된 진실, 허구적 진실을 독자에게 설득시키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시가 일가를 이루는 집체적 활동의 산물이 아니라 개인적이며 독창적인 활동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차별화된 감각과 상상을 의도하려고 하는 오류의 문장에 대해 감상의 몫은 독자에게 맡기려고 한다. 문학적 상상력은 미적 대상으로써의 시적 이미지를 통하여 한 영혼과 다른 영혼이 맺는 직접적인 관계이기 때문이다.



기표의 변형 속에 잠재한 기의는 동일성을 지닌다. 동일성이 지향하는 세계는 시적화자의 공간이다. 시 쓰기의 다양성에 대해 고체와 기체와 액체의 속성을 가진 구름의 본질을 찾아내어 언어로 형상화 할 것, 속삭이는 빗줄기를 백지에 가두어 본다. /강영은



- <시로여는 세상>2010년 가을호 신작 소시집 ㅡ



♠신작 소시집






유리사막/강영은





몸속에 사막을 지닌 여자들은 바다를 숭배했다



낙타 한 마리 없이 알몸으로 건너는 사막은 발끝에서 시작 된다 사막의 기원을 더듬으면 만 개의 천문이 열리고 붉은 달을 새긴 금서들이 흘러내린다



모래를 읽는 일은 어제의 찌든 잠을 깨우는 일이어서 가슴 한 쪽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면 수 천 톤의 모래가 흉부에서 쏟아진다



한 뼘 자란 귀 속으로 스며드는 뜨겁디뜨거운 서사,



흰 타올을 머리에 감은 여자는 방금 파라오와 헤어졌다 뜨거운 몸을 열고 홍해를 건넌 그녀는 유리관 속 누워있는 미이라. 알몸을 드러낸 습속은 며칠 동안 한증의 전설로 떠돌 것이다



지평선이 없는 오늘은 매몰된 모래무덤에서 흘러나간다 모래 알갱이들이 물소리를 낸다는 건 이 도시에선 흔한 일, 습벽의 도시가 오 분만에 사막으로 번복 된다



누군가 모래무덤을 거꾸로 세운다 땀방울에 젖은 여자가 반짝인다 제 몸의 물기란 물기를 죄다 유리관 속에 버리고 한증막 문을 나서는



네페르티티*, 당신이 손을 댄다면 사막을 다 건너지 못한 그녀는 부서지거나 쏟아질 것이다





* 네페르티티 : 이집트 제18왕조의 왕 아크나톤의왕비. 미녀였지만 왕의 총애를 잃고 왕궁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무리수를 읽는 법/강영은





젖은 7월이 우산 위로 기운다. 빗방울 하나가 손등을 타고 굴러 떨어진다. 빗줄기가 슬어놓은 물꽃, 꽃은 웅덩이에 파문을 낳고 그리움의 둘레는 끝없이 퍼져나간다.



새들은 젖은 깃털에 우기를 묻어둘지 모르지만 나는 처마 밑에 흐르는 태양을 모아 둬야지, 물수제비뜨듯



따뜻한 방을 꿈꾸는 구름은 앓고 있는 어금니, 줄줄 흐르는 구름의 상처 아래 활짝 핀 꽃잎들이 무리지어 젖는다. 세상의 모든 꽃은 접이불루의 불문율을 지녔구나,



잇몸 속에 상처를 가두지 못한 구름은 진화 이론을 거부한 √2,..........꽃잎 위로 확산되는 곡선의 불이문(不二門)이다



흐르는 것들이 무리수라면, 직선이거나 사선으로 꽂히는 빗줄기는 유리창의 안팎을 통과한 적이 없는 유리수로 읽는다



물에 잠긴 먼 마을의 이야기이지만 사랑에 눈 먼 어족류의 지느러미가 겨드랑이 아래 돋았던 날들, 읽지 못한 날들은 죽은 물고기의 눈알로 떠오른다



발자국 소리가 젖는 悲요일, 한 지붕 아래 연골의 흐느낌에 미끄러진 한 쌍의 남녀가 빗물처럼, 빗줄기처럼, 서로를 스친다.



수 천 년 동안 옴폭 파인 웅덩이에서 한 발자국도 떠나지 못한 지구가 동그랗게 고인다. 무리수를 가둔다



팜므파탈/강영은





느릅나무 둥치를 타고 오르는 등칡의 꼬부라진 음계는 벌레의 귀만 길어 올리네 깊은 우물의 고요는 들리는 귀에겐 커다란 파문,



파문 지는 꽃 중심 향해 딱정벌레 한 마리, 제 몸의 바깥을 들이 미네. 소리 내지 마, 우리 사랑 약해지잖아* 들어갈수록 깊어지는 음역을 향해



제 몸의 안팎을 전복시킨 딱정벌레, 트럼펫처럼 휘어진 꽃 나팔 속 무수히 떨어지는 꽃가루, 잘못 읽은 분절음 속에 갇히고 마네.



앞에서 보면 남자의 양물 같고 옆에서 보면 여자의 음부 같아 한 번 들어가면 빠져나오기 힘들다는 팜므파탈의 꽃,



등칡이 꽃을 피웠네.구부러진 등이 꽃을 피웠네.



가파른 음계를 기어오르는 딱정벌레의 귀는 내게 없지만 천만 길 벼랑에 내 몸의 바깥을 쥐어주고 싶은 봄날,



느릅나무 꼭대기까지 제 목숨줄을 쥐고 오르는 저 눈부신 봄을 꺾으려면 단단한 뿌리에 묶여 있는 등줄기를 먼저 읽어야 하리, 천길 아래로 낙화하는 나를 후렴구로 두어야 하리,



*이승철의 "안녕이라고 말하지마"중에서






샤콘느 /강영은






비탈리의 샤콘느, 당신을 위한 춤이 막 시작 되었어,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둥글게 둘러앉아 원 리틀 투 리틀 쓰리 리틀 인디언 춤을 출 때. 침묵이 쇠망치처럼 뒤통수에 덮칠 때, 사랑하는 당신이 어둠과 하나 될 때, 돌아보면 안 돼, 누군가 소리칠 때,



외발 무용수가 스탭을 밟듯, 뿔을 치켜든 소가 각축을 하듯, 청상아리가 허벅지를 물어뜯듯 파도가, 침몰하는 선박의 종아리를 휘감았어. 빠르고 갑작스럽고 아픈 선율에 물고기들이 사라졌어. 심해에서 불어터진 살점들이 한 순간, 물비늘로 일렁였어.



뜨겁고 차가운 파도의 춤사위가 너울거리는 백령의 해안은 산자들을 위한 죽은 자들의 불 꺼진 무대,



조기떼가 돌아오듯 조기떼가 지나갔어 뱃전을 붙잡은 손가락이 꽃잎으로 흩날렸어,조류를 잃어버린 항해처럼 선체 바닥으로 가라앉는 국화 향, 국화 향은 태생을 알 수 없는 해저 음에 현을 조율하며 겹꽃으로 피는 눈물의 율(汩)을 밟고 있었어.



파도가 종적을 알 수 없는 춤이라면, 물결 위를 동동 떠다니는 흰 국화들이 무희라면,



흐느낌이 천공의 활을 켜든 오늘 밤, 이 별을 떠난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붙들고 미친 듯 춤을 춰 봐, 슬픔의 한계수역을 넘나드는



비탈리의 샤콘느, 당신을 위한 춤곡이 막 시작 되었어.





*제목 수정





거미의 수사학(修辭學)/강영은









어둠 속 무심코 내딛은 발목이 거미줄에 포획 당했다. 그물코는 작아서 보이지 않고 그물은 너무 가늘어 소름이 돋았다.



누가 누구의 발목을 잡은 것인지 능동과 수동의 주체가 묘연한 순간을 미완이라 해야 하나, 해체라고 해야 하나. 눈높이가 다른 사랑이라 해야 하나, 이별이라고 해야 하나,



딱딱하게 굳은 발가락이 지층을 뚫었을 때 돌의 입 속에서 찾아낸 삼엽층 화석, 거미목, 거미 과의

문장에 대해 세계는 여전히 진화 중일지 모르지만



구석진 곳에 매복한 저 비유를 흑막(黑幕)이라 명명해도 되나.



불후의 명작은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듯 필생의 언어를 꽁무니에 매달고 죽어라고 꽁무니를 빼는 거미 한 마리,



먹이를 기다리는 입에 대하여, 똥구멍이 입이 되는 說에 대하여 거푸거푸 집을 짓는 불후의 수사법을 흥망이라 불러도 되나,



캄캄하다 시(詩), 천공에 그물을 펼친 흥망의 흑막이란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