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시인/ 강영은
쓴다와 쓰다 사이,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밤 골 아저씨의
낫 같은 ㄴ이 있다
그 낫은
길이 잘 든 손을 갖고 있어서
아저씨가 까놓은 알밤들은
울퉁불퉁
반발이 심했지만
맛이 좋았다
잠 안 오는 밤
쓰다와 쓴다 사이,
낫 놓고 니은 자는 더 더욱 모르는 아저씨의
낫,
종결형 어미가 시퍼렇게 달려든다
날카로운 날에 손을 베인다
잘 벼려진 낫날이
붉은 혀가 삼킨 밤 껍데기를 헤집어
꿀꿀이 바구미를 토해낸다
밤새도록 밤을 파먹은
벌레 시인이다
"애지 "2007년 겨울호
2008, 시안 [계간리뷰 좋은시] /이혜원(고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문학평론가)
롤랑 바르트는 문학을 다른 글쓰기와 구분하여 '자동사적인 글쓰기'라고 명명하였다.
문학은 어떠한 '목적' 없이 쓰는 행위라는 것이다. 이는 가령 신문 기사가 갖는 분명한 목적과는 구분된다. 어떤 정보를 주기 위해, 혹은 어떤 주장을 펼치기 위해 쓰는 타동사적인 글쓰기와 비교할 때 문학적 글쓰기는 한결 자유롭고 순수하다. 그러한 문학적 글쓰기가 현재 진행형이 되는 순간은 글쓰기 자체에 지극히 집중된 흥분과 열정의 상태일 것이다.
비유컨대 위의 시에서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밤골 아저씨"가 "길이 잘든 손을 갖고" 알밤을 가는 경우와 흡사하다고 할까? 밤골 아저씨는 기역자도 모르지만 낫은 기가 막히게 잘 다룬다.
시인이 언어를 다룰 때도 그 문법이나 구조를 다지면서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이리저리 굴리고 어루만지면서 보기 좋게 다듬어내는 것이다. 또한 밤골 아저씨가 알밤을 까는 행위는 농사를 짓기 위해 낫을 쓸 때와 또 다르게 '자동사'적이다. 잠안오는 밤 알밤을 까면서 극도로 집중하여 낫날을 다룰 때의 재미와 몰입의 상태는 시인이 언어를 다룰 때와 흡사한 것이다.
여기서 '쓴다' 와 '쓰다' 사이의 "ㄴ"에는 잘벼려진 낫날처럼 바로 사용할 수 있는 긴장된 현재형의 시간이 존재한다는 상상이 흥미롭다. 이 시에는 밤골 아저씨 말고도 또 다른 시인이 등장 하는데, 그건 바로 " 밤새도록 밤을 파먹은 벌레시인" 이다.
밤새도록 언어의 미로를 파들어가는 시인처럼" 벌레시인"의 노고도 끝이 없다, 본능처럼 이끌린다는 점에서 시인이나 벌레시인은 모두 자신의 생에 도취되어 잇는 존재들이다. 그렇지 않다면야 밤을 새우며 목적없는 말을 다듬는 저 기이한 형태를 어찌 설명 할 수 있을 것인가?
이혜원(고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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