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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머의 리뷰

분열된 존재의 허상과 탈주체화의 시/박남희

by 너머의 새 2015. 9. 7.

그림자연극/강영은


그는,
겨드랑이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가지고 연극을 상영한다
오른편 그림자를 아내라 하고 왼편 그림자를 애인이라 부른다
제각각의 몸을 가진 그녀들이
서로 만나거나 겹쳐지는 일은 드물다
그가 품고 있던 생각들, 혹은 잠재적인 형상 속에서도
역할 분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오른 쪽 그녀를 지나 왼 쪽 그녀에게 가는 일은
몸의 영역을 넓히는 일이다
그때마다 그의 폭이 늘어난다
그녀와의 삶이 밥줄처럼 단단해지기 위하여
그는 날마다 손에 쥐어진 끈들을 점검한다
왼쪽도 오른쪽도 아닌 단지 그림자의 길을 가고 있는 그녀,
그가 조종하고 있는 그녀들은 빛과 어둠으로
제 자신을 빚어내는 표정만을 연기한다
빛과 어둠의 양분된 삶 속에서 등 뒤를 비추는 조명이 잠깐 꺼질 때
텅 빈 자막 같은 그녀의 내면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녀가 밥을 먹거나 시장을 보는 그 때,
누구도 그림자가 아닌 그녀의 실체를 눈치 채지 못한다
막 뒤의 내막은 언제나 가려져 있는 법이어서
그림자와 실재 사이의 간극은 쉽사리 눈에 띄지 않는다
그가 조명을 비추는 동안 그늘은 영원히 그녀의 내부가 된다
그늘이 몸 밖으로 흘러넘치는 한, 몸 안에 한 편의 드라마를 간직한
그녀의 生은 계속된다

이 연극은
그녀가 구겨지기 전에 끝나지 않는다



*그림자 연극:인형극의 일종. 평면 형태의 인형을 강한 조명과 반투명의 스크린 사이에서
움직이게 함으로써 스크린에 나타나는 인형의 그림자를 즐기는 인형극이다


2005년 미네르바 겨울호,



분열된 존재의 허상과 탈주체화의 시/박남희


빛나는 태양은 존재의 이면에 그림자를 남긴다. 그림자는 역설적으로 빛의 존재성을 나타낸다. 이 땅의 모든 만물은 이처럼 빛과 어둠 사이에 존재한다. 빛은 사물과 만나 어둠을 증거하고, 어둠은 사물 저 쪽의 빛을 증거한다. 그런데 이 세상의 빛은 때때로 존재를 감추고 그림자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림자는 빛과 어둠이 만나서 생겨나는 것이지만, 때때로 허위적이거나 눈속임을 할 때가 있다는 점에서 반드시 진실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 시는 ‘인생은 한편의 연극이다’는 화두를 배경에 깔고 있다. 그런데 이 시에 나오는 연극은 인물들의 형상은 보이지 않고 그림자만 등장하는 그림자 연극이다. 그림자 연극에서 인물들은 철저히 이미지화된다. 그들은 “빛과 어둠으로/ 제 자신을 빚어내는 표정만을 연기한다”. 그들의 존재성은 무대 뒤의 목소리에 의해서 정의되고 규정된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그림자의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그림자가 아닌 그녀의 실체를 눈치채지 못한다”. 시인은 그림자 연극이 지니고 있는 “그림자와 실재 사이의 간극”에 주목한다.

그런데 이 시는 묘하게도 페미니즘의 색채를 띄고 있다. 그림자인 그녀들을 조종하는 남자인 그는 오른쪽의 아내를 지나 왼쪽의 애인에게로 가는 일이 몸의 영역을 넓히는 일이 되지만, 그녀는 그에 의해서 조명이 비추어지는 동안만 존재할 수 있고, 그 동안도 그늘은 그녀의 내부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영원히 어둠과 그늘을 떠나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존재가 여자이다. 그녀의 두 자아인 아내와 애인이 등장하는 그림자 연극 역시 그에 의해서 연출된 “그늘이 몸 밖으로 흘러넘치는” “한편의 드라마”일 뿐이다.

시인이 이 시의 초두에서 아내와 애인이 서로 만나거나 겹쳐지는 일은 드물다고 말한 것은 그림자 연극이라는 표면만 보면 역할 분담이지만, 여자라는 존재성으로서의 두 가지 자아라는 측면에서는 여성이 지니고 있는 자아의 숙명적 분열상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아내와 애인, 그림자와 실체로 표상되는 분열된 여성성은 서로 겹쳐지거나 일체화되지 못한다. 이처럼 비극적인 그녀의 생인 연극은 그녀가 구겨지기 전에는 끝나지 않는다. 이처럼 그녀의 삶은 철저히 타자화된다. 주체성을 잃어버리고 타자화된 삶은 불행하다.

하지만 강영은의 시는 불행에 침잠해 있지는 않다. 시인의 예리한 눈은 그림자 연극으로 표상되는 여성적 삶의 실체를 꿰뚫어서 아내와 애인, 그림자와 실체의 간극을 정확하게 짚어낸다. 따라서 이 시가 지닌 냉철함이야말로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비극적인 여성성을 반성적 사유의 지평으로 끌어 올려 주는 원동력이다.

창작 21계간 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