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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머의 리뷰

무음(無音)의 진실 /신진숙(문학평론가)

by 너머의 새 2015. 9. 7.

무음(無音)의 진실 /신진숙(문학평론가) 
         -강영은 신작시평




사물은 언제나 이미 말을 한다. 그러나 들을 수 없다. 그것은 무음(無音)으로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물은 온전히 내재화할 수 없는 타자다. 즉, 사물은 의식의 대상이 아니라 인식할 수 없는 부재, 그것이다.

그렇다면 무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타자의 타자성 자체를 의미하지 않는가. 레비나스는 타자의 타자성을 절대적인 외재성에서 찾았다. 타자는 주체와의 행복한 상호관계 속에 놓이지 않는다. 그것은 비상호성으로 존재한다. 즉, “타자성은 향유를 통해 우리 자신의 것으로 동화(同化)시킬 수 있는 잠정적인 규정으로서의 타자성이 아니라 그것의 존재 자체가 곧 타자성인 그런 의미의 타자성이다.” 레비나스가 타자를 “신비”라고 부른 것은 이 때문이다. 즉, 타자는 장악할 수 없다. 그것은 다른 존재, 다른 말의 소유자다. 만일 주체와 타자의 관계가 상호주관적인 관계를 맺는다면, 그것은 철저히 비대칭적인 어떤 것이다. 즉, 타자는 주체의 반조 혹은 반사가 만들어낸 어떤 것이 아니다. 타자인 사물들은 그야말로 주체의 가능성의 불가능성, 즉 “할 수 있음의 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존재들이다.

강영은 시인의 출발 역시 이와 같지 않을까. 시적 주체는 타자의 타자성 앞에서 합일을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역설적으로 그것의 불가능성 속에서만 의미를 지닌다.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출발하는 시가 만일 타자 그 자체를 완전히 도해하거나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가장 주요한 시적 에너지를 상실하고 나는 결과를 초래한다. 다시 말해 서정은 완전한 융합을 전제한 채 쓰여질 수 없다. 융합을 실현한 서정은 응고된, 늙은 서정일 뿐이다. 서정은 그야말로 서정의 불가능성 속에서 제 역설의 의미를 구현한다. 이것이 강영은 시인의 시에서 나이를 읽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녀는 불가능한 독해 때문에 타자를 읽는다. 그리고 쓴다.


꽁무니에 바늘귀를 단 가시거미 한 마리,
감나무와 목련나무 사이 모텔 한 채 짓고 있다
저, 모텔에 세 들고 싶다


장수하늘소 같은 사내 하나 끌어들여
꿈 속 집같이 흔들리는 그물 침대 위
내 깊은 잠 풀어놓고 싶다


매일매일 줄타기하는 가시거미처럼
그 사내 걸어 온 길 칭칭 동여맨다면
나, 밤마다 그 길 들락거릴 수 있으리


그 사내, 쓰고 온 모자 벗어버리고
신고 온 신발도 벗어던져
돌아갈 길 아주 잃어버린다면
사내 닮은 어여쁜 죽음 하나 낳을 수 있으리


그 죽음 자랄 때까지
빵처럼 그 죽음 뜯어먹으며
하늘 끝까지 날아오르는 날개 옷 한 벌
자을 수 있으리


저, 허공 모텔에 들 수 있다면,
-「허공모텔」전문


때문에 시적 주체와 타자가 만나는 방식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그녀의 시에서 주체와 타자는 경계가 모호하다. 나와 가시거미는 하나의 존재이면서 다른 존재이다. 삶과 죽음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이 둘의 겹침은 가정형 “(한)다면”이라는 전제조건이 붙는다. 만일 내가 가시거미‘라면’, “허공모텔”을 짓고, “장수하늘소 같은 사내 하나 끌어들”일 것이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인식한다면 그것은 주체가 하나의 행복한 자기동일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완전한 겹침과 합일은 불가능하다. “허공 모텔에 들”어 “어여쁜 죽음 하나 낳을 수” 있는 방법이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돌아갈 길”을 “아주 잃어버”려야만 가능한 어떤 일이다. 존재함의 조건인 육체 속에 갇힌 자에게 그것은 처음부터 허락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거미와 시적 주체 ‘나’는 대칭적인 상호주관성을 벗어난다. 가시거미는 주체에 의해 투사된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사물과 주체 사이의 “저”만큼 벌어진 틈새를, 그 거리를 지울 수 없다. “커다란 나무를 통째로 마셨는지/ 푸른 잎사귀와 붉은 줄기를 입에 문 채/ 끄덕끄덕 졸고 있”(「디오게네스의 잠」)는 디오게네스/코알라 역시 이러한 ‘거리’ 속에서만 포착된다. 디오게네스/코알라에게 ‘나’는 햇빛을 가리는 하나의 “그늘”일 뿐이다. 타자는 주체에 동화되지 않는다.

그러나 시는 이러한 타자와의 불가능한 접촉을 추구함으로써 쓰여진다. 가시거미의 세계이자 언어인 거미줄은 그 자체로 허공에 쓰여진다. 그것은 굳어진 일상 어법과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며, 시는 그 점에서 거미줄과 같다. 가령, 나무는 사막의 모래폭풍을 견딜 수 없다. “꽃”은 가당치도 않다. 그러나 나무는 끝내 꽃을 피워낸다. 사막이 표상하는 고통, 괴로움, 혹은 타자의 세계 속에서 나무는 주술처럼 꽃을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꽃은 어떤 방식으로 사막을 내면과 함께 변증해 내는가. 주체는 사막이라는 타자의 세계를 어떻게 건너는 것일까. 그리고 어떻게 하여 노을빛 장미에 이르는가. 이는 강영은 시인의 시적 지향점이 무엇인지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그녀 속에 숨은 구름이 부푸는 그 때,
사막에는 모래폭풍이 몰아친다죠?
그녀를 찾다 지친 사람들 눈에
사막은 언제나 지극한 것끼리 통하는 극약 처방을 한다는데요
보세요,


ㅅㅅㅅㅅ, 햇살의 흰 뼈를 등에 지고 사막을 건너는 그녀
ㅅㅅㅅㅅ, 사막의 뱀처럼 모래 무덤을 끌고 가요


그녀 몸속에 오글거리는 빛의 맹독,
사막의 노을, 진분홍 드레스자락 펼지는 저물녘이면


ㅅㅅㅅㅅ, 낙타 등처럼 사막을 품은 꽃
ㅅㅅㅅㅅ, 제 몸이 삼킨 사막을 피워내는 내 안의 꽃
-「사막 장미」부분


실마리는 바로 “품음”에 있다. 즉, 주체는 타자를 ‘품음으로써’만 존재한다. 사막장미가 사막이라는 타자를 품어내지 않는다면 사막장미를 꽃피우지 못할 것이다. “무덤”은 존재의 바깥이 아니라 내부여야 한다. 즉, “사막”의 죽음, 즉 타자를 존재의 일부로 받아들일 때, 주체는 자기 자신을 벗어날 수 있다. “맹독”이 “꽃”이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기가 아닌 것, 타자라는 고통은 하나의 진정한 존재론적 바탕이다. 그러므로 사막장미는 타협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사막을 끌어안는다. 그리고 다른 것이 되려 한다. 사막도 아니고, 단순히 꽃도 아닌, 다른 것. 그것은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닌, 주체도 아니며 타자도 아닌 어떤 존재자, 이상한 꽃, “사막”이면서 “장미”인 어떤 존재이다. 즉, 그것은 “주체이면서 타자”(레비나스)일 수 있는 어떤 존재자로 변증되어 간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관계의 존재방식에 대하여 시인이 땅을 껴안은 것 같은, 혹은 주체와 타자가 서로 기댄 듯한 “ㅅㅅㅅㅅ”으로 형태화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기호가 상형문자처럼 읽힘으로써, 감춰진 비의들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강영은 시인이 생각하는 사랑은 무엇과 같은가. 타자라는 존재를 자기 안에 들임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주체가 되는 존재 방식, 그 생생한 주체와 타자의 변증, 탄탄하게 타자의 사막을 움켜쥘 뿐만 아니라 허공 속에 길을 내고야 마는 생산의 힘, 사랑은 그녀에게 어떤 의미인가.


시애틀의 배션 아일랜드에서 자전거 나무를 본다
자전거의 두 바퀴가 허공에 매달려 있는 커다란 꽃 같다
녹슨 바퀴 꽃 살대마다 지나가는 햇빛.
자전거가 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무가 껴안은 시간 속에서
자전거가 계속 달리고 있는데도
우리 눈이 멈춰있다고 착각하는 것인지 모른다
유심히 살펴보니 허공을 수직으로 달리는 나무와
둥근 길을 나이테 속에 내려놓은 자전거가
서로의 속도를 껴안고 있다
달려오던 속도와 뿌리박힌 속도 중 어떤 속도가
페달을 내려놓은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한 영혼이 또 다른 혼에 머문 것처럼
서로의 허공을 쓰다듬고 있다
속도가 속도를 껴안는 순간, 한 몸을 이룬
자전거나무
더 이상의 과녁이 필요 없다는 듯
딱, 멈춰 섰을 것이다
통과 할 수 없는 시간이 각막에 달라붙은
거기서부터
내 눈먼 사랑도 벌겋게 녹물 번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제논의 화살」전문


사랑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시작이다. “허공을 제 키 만큼 달리는 나무와/ 나이테 속에 제 길을 내려놓은 자전거가/ 서로의 속도를 껴안”는 일처럼. 따라서 시인은 사랑을 “서로의 허공을 쓰다듬”으며, “허공이 꽃피는” 일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사랑은 어떤 목적(과녁) 없이도 시작하면서, 어떤 목적도 넘어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아주 우연한 한 순간에 발생한다. 거기엔 필연적인 이유도 없다. 시인은 이러한 사랑의 표상을, 실제하지만 불안한 우연성에 기댄 이미지 “나무자전거” 속에서 발견한다.

그러나 모든 사랑은 행과 불행을 동시에 준다.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그렇듯, 타자를 완전히 소유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 때문에 괴로워하며, 사랑하고 있는 육체를 벗어나 타자에게로 완전하게 흘러갈 수 없다는 점 때문에 슬퍼한다. 사랑하는 대상인 타자는 도달할 수 없다. 따라서 사랑은 도착할 수 없는 “제논의 화살”과 같다.

바로 그 점에서 사랑의 시작은 자기동일성에 균열을 만든다. 자기동일성의 화살을 벗어난 타자의 타자성을 인식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것은 무한히 흘러가는 그러므로 사라지지 않는 시간을 찢고, 현재라는 그러므로 사라짐을 상상할 수 있는 시간을 건져 올림으로써 주체가 하나의 진정한 주체에 다가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즉, 시간이라는 익명의 무한한 흐름 속에 균열을 냄으로써 비로소 미래가 열린다. 이는 레비나스가 타자를 시간과 견주며, 사랑을 주체의 진정한 정립과 미래의 가능성으로 이해한 것과도 연관된다. 단지 존재하기(il y a)만 한다면, 자기동일성을 벗어나 타자로 향할 수 없다면, 미래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사랑은 시간의 흐름을 얻는다. 그것은 불꽃과 같은 사랑의 절정이면서 동시에 모든 것이 멈춘 채 녹슬어가는 절정 ‘이후’이기도 하다. 사랑은 모든 시작과 모든 사라짐을 표상한다. “내 눈먼 사랑도 벌겋게 녹물 번지기/ 시작”할 때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강영은 시인의 시에 등장하는 타자들, 즉 사막장미, 가시거미, 코알라, 나무자전거 등은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삶에 대한 깨달음을 주는 존재자들이다. 무음으로 살아가는 타자들이야말로 삶의 진실을 들려주는 숭고한 존재인 것이다.


경칩 날 아침, 이슬비 내린다
방울져 내리는 빗방울을 바라보다
와, 개구리알이다!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른다
둥글고 말간 알들이 송알송알 내린다
동그라미가 툭 툭 터지는 것이
올챙이 투명꼬리 터지는 것 같다
바람이 헤적일 때마다
꼬리를 살랑이는 투명 올챙이
앞다리가 쏙, 뒷다리가 쑥,
땅바닥을 딛고 튀어오른다
땅바닥이 넙죽 네다리를 벌린다

경칩 날 아침, 어디서 개구리가 운다

개구리 한 마리 보이지 않는데

봄이 온다, 봄이 온다, 내가 운다

천지가 연못이다

            -「투명개구리」전문

  사물은 하나의 이미지이자 이야기이다. 시인은 빗방울이 떨어지는 모습을 투명개구리의 도약으로 형상화한다. 이 경우 하나의 이미지는 하나 이상의 의미를 향한다. 그럴 때 주체와 타자의 관계는 더없이 순수하다. ‘사물-이미지’는 순수하게 주체가 자기 내부를 응시하도록 촉발한다. 단단한 사물의 외피를 거두고, 존재의 숨겨진 의미를 캐내길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정작 다른 데 있다. 즉, “봄이 온다. 봄이 온다, 내가 운다”라는 대목이다. “봄이 온다”는 두 번 반복된다. 그것은 한 번만으로는 부족한, 봄이라는 기호 밖으로 결락된 어떤 보이지 않는 무엇을 표상한다. 즉, 첫 번째의 봄은 무한히 도약하는 생명의 흐름을, 두 번째 봄은 그러한 도약으로부터 누락된, 그래서 존재할 수 없는 잉여로서의 봄을 의미한다. 그리고 두 번의 봄을 호명한 후에야, “내가 운다.” 봄이 만물을 소생시키는 힘을 지닌 영원성으로 긍정되는 동시에 부정되는 순간이다.
 
  이 점에서 사물은 무음이며, 음이다. 그만큼 다의적이고 다원적이다. 진실은 바로 거기 있다. 봄은 그냥 봄이 아니며, 삶은 그냥 삶이 아니다. 그 속에는 그것이 아닌 타자성이 들어 있으며, 그것이 바로 삶의 의미인 것이다. 봄 속에는 봄 아닌 것이, 내 속엔 또 내 것이 아닐 것 같은 울음들이 담겨 있음이다. 그래서 “천지”가 이 낯선 울음으로 가득한 “연못”이 될 수 있다. 시인은 이러한 방식으로, 내가 아닌 존재, 낯설고 다른 것이 나라는 존재의 가장 중요한 일부임을 보여주고자 한 것은 아닐까.

  강영은 시인은 사물을 꿰뚫는 투명한 시선으로 세상을 읽는 중이다. 그녀의 시에서 시적 주체는 타자를 향하지만, 완전한 융합에 이르지는 않는다. 주체와 타자는 끊임없이 ‘다른 말’을 한다. 그것은 타자 존재가 이색적이라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즉, 강영은 시인에게 타자는 낯선 언어들로 가득 차 있으며, 동시에 아무것도 들을 수 없는 무음영역(無音領域)으로 남아 있다. 시인은 이 무음(無音)이면서 음(音)이기도 한 타자의 소리를 듣고 쓴다. 이를 통해 주체 안에 존재하는 낯선 타자성이 드러나고, 또 진정한 삶의 본질들이 사물-이미지 속에서 개장된다. 그 경우 하나의 사물-기호는 주체와 타자의 내밀한 존재론적 풍경 속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어떤 것이 되기도 한다.
 
  앞으로도 강영은 시인이 자본주의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는 더욱 다양한 그리고 처절한 타자의 생생한 얼굴까지도 담아낼 수 있기를 조심스레 기대해 본다.
 
2008, 애지 가을호 

 

신진숙(문학평론가) 2005년 ?유심?평론 등단. 현재 경희대 한국어학과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