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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비단구렁이

지렁이

by 너머의 새 2015. 9. 7.

지렁이/강영은




철쪽과 매발톱 꽃 사이 지렁이 한 마리
통통한 몸을 햇빛에 적나라하게 드러내놓고
직선으로 곧게 뻗어 있었다
입에서 항문까지 막힘없는 삶을 누렸다는 듯
햇빛 속에 가닥가닥 드러난 핏줄들은
어둑한 삶을 밝히는 전선줄처럼 환하게
몸을 켜들고 있었다
어떠한 빛마저 침입할 수 없는
어둠의 확고한 틀 속에서 눈부신 빛의 각막 속으로
몸을 던진 그는
눅눅한 습기로 족쇄 채워진 제 몸의 슬픔을
풀려 했던 것일까
며칠 째 노숙을 하고 있는 그에게서
생전의 길들이 꿈틀거리며 기어 나왔다
일광욕을 즐기는 듯 미동도 없이 빛 속으로
울컥울컥 어둠을 게워내는 허리띠가 전부인
몸 하나
무언가 세상을 매듭지어 보이려는 듯
바람과 햇빛에
제 몸을 걸어 습기를 말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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