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고麻姑의 항아리/강영은
왕벚나무 서어나무 붉가시나무 숲이 멀어지면 냉대림이다. 자라면서 햇빛을 그리워한 냉대림의 얼굴에선 오래 묵은 물비린내가 난다. 아랫마을 상머슴이던 곰보 아재처럼 고채목이며 구상나무며 숲의 쓸쓸한 그늘은 넓어지면서 애기고사리 같은 수염이 난다.
산등성이에 쫓겨 산사람이 된 이야기, 두 눈에 불을 밝힌 도깨비가 되었다는 이야기, 밤이면 낫을 쥐고 먹을 것을 구하러 마을로 내려갔다는 이야기, 그 중에서도 사슴을 쏘려다가 하늘의 배를 쏘아버린 이야기에 이르면 활시위처럼 난대와 초원과 활엽수림을 지나온 탁월풍卓越風의 머리카락이 센다.
옅은 먹의 점선으로 처리된 비가 산정에서 흩어진다. 벽랑국의 공주와도 같은 눈이 파란 어릴 적 동무며 별이 돋는 하늘은 보이지 않는다. 보일 듯 말 듯, 물위를 지나가는 흰 사슴과 신선, 끊어질듯 이어질듯, 깎아지른 골짜기와 푸른 계곡이 평포된 눈가에 무슨 얇은 조각이 반짝일 때면 산정은 이렇듯 문고리에 거는 쇠처럼 낡아진다.
두무악頭無嶽에 서서 은하수를 잡아당기면 노인성老人星이 끌려온다. 장수한다는 별을 본 그 밤, 별의 방향이 서쪽으로 조금 기울었는지 아버지와 곰보아재는 안개비 너머 돌무덤 속으로 돌아갔다. 그리운 얼굴들이 무릎아래 죄다 모인다는 돌무덤, 누가 다녀갔는지 이쪽을 바라보는 노루 눈알이 먼다.
귀신이 발목을 잡아당긴다는 백록담에서 마고*의 항아리를 본다. 물이 출렁거리는 솥단지, 수천수만 개의 별빛이 쏟아져도 고인 물이 무쇠처럼 뜨거워지지 않는 연유가 벌써 내 속에 들어온다. 귀를 열면 청적색淸笛色의 바람, 맑은 피리 같은 바람 하나 들고 등에 지고 온 바닷가 마을은 멀다.
*마고麻姑할머니는 한라산을 베고 누워 한 다리는 서해에, 또 한 다리는 동해에 두고 손으로 땅을 훑어 산과 강을 만들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