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촛점 시말눈 혹은 세계(생)를 전유하는 인간학적 태도 / 김석준(시인, 문학 평론가)
시말은 결코 가벼운 언어일 수 없다. 시말은 언제나 둔중한 삶-시간-세계를 고유한 언어로 치환시키면서 이 세계를 전유하게 되는데, 그것은 이해의 한계 내에서 생성된다. 아포리아 또는 명징성. 우리는 무엇을 이해하고 어떤 사태를 이해하지 못하는가. 우리는 시말의 내접면에 어떤 인간학적 기호를 기입하여 영혼의 표징을 읽어내는가. 기호의 제국 혹은 의문부호. 엄밀히 따지고 볼 때, 산다는 것은 최선이 아니라 차선이다. 아니 우리는 수많은 앎에의 의지를 통해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명징한 논리적 형식을 산출해내지만, 그것은 역으로 우리를 아포리아에 빠지게 만든다. 우리는 ‘고작’이다. 우리는 작은 지혜의 범주에 갇힌 채 삶-시간-세계를 살아내다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자인하면서 저 아포리아라는 거대한 덫에 걸려 넘어지게 되어 있다.
전유적 사유 혹은 불가지론에의 도달. 어쩌면 인간학적 태도는 이 두 가지 인식의 결정 방식 사이를 끝없이 유랑하면서 어떤 의식의 지점에 이르게 되는데, 그것은 앎이 도달하는 두 극점이거나 시말눈이 형성되는 지점이다. 이를테면 삶-시간-세계를 살아낸 흔적인 시말운동은 일종에 다층적 인식의 흔적인데, 그것은 물자체(Ding an sich)에 대한 의식적 탐구에 다름 아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물음들로 가득 찬 이 세계 혹은 호모 로퀜스(Homo loquens). 자고로 시인이란 말과 세계(혹은 사물) 사이를 변증법적으로 건너면서 이 세계를 정의하는 자인데, 그것은 말에 의해 언표된 세계의 이해방식이다. 언표되기를 거부하는 아포리아와 그것의 명징한 이해 사이를 무한반복적으로 왕래하면서, 시인은 초절적 순간에 이른다. 미지의 의미를 찾아 그것의 의미체계를 건설하면서 시인은 의식의 혁명에 이른다. 비록 그것이 전유적 사유와 아포리아 사이에서 빚어지는 말과 사물의 변증법적 운동이기는 하지만, 시인의 시말길은 새롭게 태어난 시말눈을 다촛점 렌즈로 투영하면서 저 절대의 순간을 인간학적 태도로 재현하게 된다.
내가 방금 지나가고 그는 죽었다?
아니 그가 죽고 방금 내가 지나 갔다?
모르겠다
지나쳐버린 것이 이것뿐이랴
길에 쓰러져 길을 막는 것
길에 짐이 되는 것
돌부리처럼 기분 나쁘게 걸리는 것
그의 죽음인지 몰랐다
누가 짐짝을
누가 쓰레기 더미를 여기에 버렸는가
지나쳐버린 것이 실수다
모르겠다
실수가 이것뿐이랴
사인규명을 위해 경찰들이 출동하고
사내를 마지막으로 본 꽃가게의 꽃들이
심문을 당하고
사내가 죽은 시각 당신은 어디에 있었는가?
내 알리바이가 수상하다.
박은수, 「지나쳐버린 사물에 대하여」전문, 『반쪽나무』, 산맥
우리는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가. 죽음이 삶과 삶 사이사이를 교묘하게 가로지를 때, 우리가 안다고 믿었던 그 모든 것들은 진정한 앎으로 수렴하는가. 사실 엄밀히 말해서 인간에게 허여된 삶-시간-세계란 그 자체로 미궁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은가. 시인 박은수의 「지나쳐버린 사물에 대하여」는 심원한 영역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학에 내재된 우연과 필연 사이를 죽음으로 이접시키면서 근본원인의 지대를 사유하고 있다. 대저 그와 나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대저 시인 박은수는 그와 나 사이를 죽음이라는 저 처연한 형식으로 지나가면서 무엇을 사유하고 고민하는가. 나의 “알리바이”인가, 그의 죽음 속에 새겨진 미필적 고의인가. 시인 말대로 우리는 삶-시간-세계를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수많은 “실수”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 세계는 분절화된 전유에 의해 움직이는 단속적인 운동이 아니라, 상호 원인으로 끊임없이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마치 지구 한쪽 끝에 있는 한 마리 나비의 날개 짓이 지구 반대편의 태풍의 원인이 될 수 있듯이, 그냥 “지나쳐버린 것”은 그냥 사라져 소멸하지 않는다. “길을 막”고 “길에 짐이 되”어 그의 죽음에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미지의 원인이 된다.
어쩌면 시인 박은수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 세계는 상호타자성의 원칙이 지배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삶-시간-세계는 하버마스가 말한 상호 인정투쟁에 기반한 상호주관성의 원리가 아니라, 전혀 연관이 없다고 믿어지는 나의 “지나침”에 의해 그의 죽음을 촉발시켰을지도 모른다. 하여 삶-시간-세계란 나와 너의 인과적 필연운동이 아니라, 전혀 상관이 없는 나와 그의 우연적 운동이다. 허나 그러한 인식적 층위에도 불구하고 그의 죽음에 나의 지나침은 원인 아니다. 분명 그 모를 미지의 힘들이 직접적으로 작동하여 그의 죽음을 유발했겠지만, 시인 박은수는 자신의 “알리바이가 수상하다”고 여기면서 이 세계 전체를 천라지망과 같은 그 무엇으로 인식하고 있다. 하여 시 「지나쳐버린 사물에 대하여」는 그냥 지나쳐버릴 수 없는 삶-시간-세계의 원리를 무심코 지나친 듯이 이야기하면서 이 세계 전체가 작동하는 방식을 심문하고 있다. 비록 우리가 이 세계의 운행 속에 작은 몸짓으로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가 이 세계를 만들어간다는 사실을 아주 예민한 시선으로 포착하여 노래하고 있다. 그냥 지나쳐버린 사물은 결코 없다. 모든 것은 그 형식을 불문하고 의미의 형식이다. 비록 그것이 무의미한 “쓰레기 더미”로 치부될지도 모르지만, 시인은 삶의 흔적들 전체를 의미의 지대로 예인하고 있다. 하여 지나쳐버린 사물들의 총합이 이 세계의 운동이고 의미를 촉발시켜 그의 죽음에 원인이 된다. 절대로 그냥 지나쳐버린 사물이란 존재할 수 없다.
나는 1분에 16번 숨쉬는데
별은 1초에 79개씩 사라진다
내 심장은 하루에 10만 번 뛰는데
별은 1초에 79개씩 사라진다
죽을 때 빠져나갈 내 무게는 21그램인데
별은 1초에 79개씩 사라진다
나는 1분에 0.5리터 공기를 마시는데
별은 1초에 79개씩 사라진다
내 심성은 7년마다 한번씩 바뀌는데
별은 1초에 79개씩 사라진다
나는 하루에 12번 웃는데
별은 1초에 79개씩 사라진다
별은 세상에 마음이 없어 사라지고
세상에 마음이 있어 사람들은 무섭게 모여든다
천양희, 「별이 사라진다」전문,『문학청춘』가을호
전유란 관계다. 전유란 대상을 내 쪽으로 끌고 와 그것을 나의 의식 대상으로 수렴시키는 그야말로 폭력적인 태도이다. 왜냐하면 전유는 그 자체로 일면화 된 의식이기 때문이다. 허나 그러한 부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삶-시간-세계란 그 자체로 전유에 의해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게 된다. 왜냐하면 전유란 그 자체로 새로운 관계맺음이기 때문이다. 마음길 혹은 별의 길 또는 나와 별 사이의 거리. 삶-시간-세계는 그 자체로 창발적인 이질성이나 다양성이 지배하고 있는데, 그것은 일종에 의식이나 마음의 휨 현상을 통하지 않는 결코 새로운 의미 관계를 생성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전유란 이질적인 대상을 내 쪽으로 휘게 만들어 새로운 이미지의 조합을 이룩하는 전일한 의식의 상태에 다름 아니다. 시인 천양희는 별과 나 사이의 전유적 관계를 새롭게 형성하면서 그 모든 의미의 층위를 “사라진다”라는 현재동사로 포괄하고 있다.
인간학적 전유 혹은 보이지 않는 관계. 또는 마음이 내어놓은 길. 시 「별이 사라진다」는 전혀 별개의 사태들을 “마음”의 심급 아래 상호 관계맺음을 형성하고 있다. 나의 호흡, 심장박동, 영혼, 폐활량, 심성, 그리고 웃음을 1초에 79개씩 사라지는 별들과의 유비를 상호 교차 반복시키면서 새로운 의미를 예인하고 있다. 나에게 속한 객관적인 인간학적 사태와 저 은하계에서 소멸하는 별들을 마음으로 매개시킬 때, 이 양자는 같은 의미의 질량으로 질적 전환될 수 있는가. 별의 사라짐 혹은 인간의 모여듬. 대저 마음이란 무엇인가. 시인 천양희에게 있어서 전혀 별개의 사태를 마음으로 이접시켜 전유적 관계를 형성할 때, 사라지고 모여든 것의 궁극적 실체는 무엇인가. 인간의 마음인가, 사라진 별인가.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시인이 「별이 사라진다」 전체를 지극히 객관적인 사실들의 무감각한 나열로 일관하다가 마음의 있고 없음으로 시말운동 전체를 조율할 때, 대저 마음의 위상학적 위치는 어디인가. 대저 시인에게 있어서 마음이란 관계를 풀고 맺는 삶-시간-세계의 자유로운 流路는 아닌지. 하여 마음이 있고 없음만이 사라짐과 생성을 관장하는 것은 아닌지. 시 「별이 사라진다」에 묘파된 마음의 정체를 알 것도 같고 모를 것 같다.
‘잔뼈가 굵어졌다’
일곱 글자와 씨름을 하다가
그를 찾아 나섰다
세월의 더께가 묻은
언어의 편린을 맨 먼저
건져 올렸을 어느 생채기 난
생애의 문전에서 기웃거리려니
민며느리 홑적삼과
땀내 나는 머슴이 걷어찬 돌멩이와
득의를 놓친 샌님이 지나가고 있었다
열린 동공이 그들을 생포하려니
고개를 저으며 사라지고
까마득한 한 옛날이 따라 나왔다
풀이 자라지 않는 어지러운 발자국에서
뜻을 얻은 문자가
종유석처럼 견고하게 자라고 있었다
일주일 간 교육이라는 그가
길들여지고 있을 이 시각
생각의 미늘에 걸려든
손때 묻은 낱말의 전, 언어의
숲에서 나는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정재분,「국어사전을 찾다」전문,『그대를 듣는다』, 종려나무
시인이란 의미 있는 말을 찾아 그곳에 새로운 이미지를 채색하는 자이다. 정재분의 시 「국어사전을 찾다」는 시말을 전유하는 과정을 세밀한 필치로 그려내면서 지난한 시인의 삶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다. 문자와 “씨름”하는 시인 혹은 “언어의 편린”에 저당 잡힌 삶. 시인 정재분은 시말의 비등점 근방에서 헤매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말을 “교육”하고 말을 “길들여” 가면서 하나의 적확한 이미지를 창조하는 순간을 재현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시 「국어사전을 찾다」는 새로운 의미 창조의 순간을 다양한 비유를 통해서 형상화하고 있는데, 그것은 어쩌면 시말이 존재하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시말은 그 자체로 삶-시간-세계가 기입된 흔적들의 향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말길은 단순한 말의 문양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의 문양 내부에 “생채기나 생애”를 기록하면서 그것을 새로운 시말문법으로 전유하는 방식이다.
지금 시인은 말의 전당에서 헤매고 있다. 이 말과 저 말 사이를 배회하면서 이 생애와 저 생애를 기웃기웃 들여다보면서 “뜻을 얻은 문자”를 단단히 다지고 있다. “생각의 미늘” 혹은 시말길. 허나 쉽게 시말이 잡히지 않는다. 허나 “손때 묻은 낱말의 전, 언어의/숲” 속에서 시말길을 잃어버린다. 시적 전유의 순간은 그리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말과 씨름하는 시인, 하여 늘 말 앞에 굴복당하고 마는 시인. 어쩌면 시의 숲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정재분의 시적 태도가 맞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시인이란 늘 말 앞에 무력하고 나약한 자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여 시인은 서리를 밟은 듯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 전전긍긍하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서글픈 운명의 소유자이다. 허나 찾아 나선다. 허나 시인은 시말의 아름답고 숭고한 위의를 찾아, 저 거대한 말의 숲(혹은 국어사전) 속을 방황하고 있다. 시말에 저당 잡힌 시인이라는 운명.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정재분의 시 「국어사전을 찾다」는 시말의 진정성이 아니라 시인의 진정성을 아주 정직하게 드러내면서 시인이 어떤 부류의 인간형인지를 보여주는 메타시인론에 다름 아니다.
소꿉놀이하던 어린 각시의 치마 속에 막대사탕을 꽂은
친절한 슈퍼맨은 제 얼굴을 박살냈죠
조각난 얼굴은 공터에 버렸죠
슈퍼맨을 법정에 세운 건 깨어진 거울,
끈끈해진 바람이 현장 검증을 시작하자
핏빛 구름이 혐의를 벗었죠
수은 칠 벗겨진 거울의 등뼈에서 뿔뿔이 달아나던
새끼 거미들이 기억의 거미줄을 치는지
현장을 목격한 내면이 인터뷰를 시작했죠
(입을 만나면 분열하는 말이 두렵고 손을 만나면 막대사탕 같은 주먹이 두렵다 구름을 만나면 번식하는 빗방울이 두렵고 꽃을 만나면 때 없이 핀 내막이 두렵다 어둠을 만나면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두렵고 윗도리를 만나면 본적 없는 아랫도리가 두렵다 오른쪽을 만나면 상관없는 왼쪽이 두렵고 어제를 만나면 미리 와 있는 내일이 두렵다 너를 만나면 너를 모르는 내가 두렵고 너를 아는 내가 두렵다 )
칫솔로 박박 문질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는 진술 속에서 곰팡이처럼
번식하는 기억, 당신 입 속은 커다란 목장인가요?
돌아보면 아무도 없는데
인디안 인형처럼 우우, 울지도 못하는 어린 소녀가
치약 꽃처럼 피고 지는 아침마다
면도날에 찢긴 슈퍼맨이 화장실에 걸려요
강영은,「생리학 백화점-침묵의 벽1」전문,『현대시』10월호
산다는 것은 언제나 예기치 못한 전유적 사태에 포로로 사로잡혀 비극적인 생에의 형식으로 종료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억압된 의식 밑에 가라앉은 저 광폭한 리비도 혹은 두려운 미지의 X. 전유된 나 혹은 전유하고 싶은 나. 우리는 온전한 삶을 살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의 내면에 가라앉은 그 무엇인가에 항상 사로잡혀 스스로를 기만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생이 존재하는 방식이다. 미지의 X에 의해 전유되고 차압당한 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본능의 족쇄에 굴복하고 마는 생. 시인 강영은의 시 「생리학 백화점-침묵의 벽1」은 분열된 의식과 행위의 지대를 혹은 괄호의 안과 밖의 이중성을 주밀하게 응시하면서 인간 전체의 “내면”세계를 진단 중이다. 가따리와 들뢰즈가 『앙띠오이디푸스』에서 말한 것처럼, 자본적 욕망이 지배하는 우리 시대의 자화상은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 변태성 혹은 내면의 양심. 우리 모두는 수수방관자이거나 미필적 고의로 가득 찬 기만적 존재에 다름 아니다.
하여 시 「생리학 백화점-침묵의 벽1」은 인간학적 사태가 욕동하는 저 극렬한 性의 지대를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 사회의 성모랄에 대한 비판적 성찰에 다름 아니다. 시인은 “슈퍼맨”으로 표상되는 강간범을 법정에 세워 리비도의 지대를 현장 점검을 하고 있다. 변태성 혹은 롤리타 콤플렉스. 강영은은 괄호 밖의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성욕의 지대와 두려움이 가득 찬 괄호 안의 무의식을 심문하면서 “깨어진 거울” 같은 우리 인간들의 자화상을 하나하나 점검하고 있다. 사이코패스 혹은 우리들의 얼굴. 우리들은 진정 유아성범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너, 나 그리고 우리는 자본적 이념이 만든 환상에 빠져 모랄 해저드에 이른 것은 아닌가. 시인이 괄호 안의 코라와 같은 무의식의 지대를 두려움으로 가득 채웠던 것은 다름 아닌 도덕불감증은 아니었을까.
성이라는 물리적 공간은 그 자체로 양가성을 띤 하여 육체적 욕망의 충족과 인륜적 규범을 동시에 표상하고 있다. 聖스럽기도하고 俗스럽기도 한 性. 영화 <<잔다리>>의 여주인공이 ‘Sex is natural’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어쩌면 강영은이 언표한 시말운동은 문명화된 성이 만든 파행적 국면의 비극성을 여실히 드러내면서 양심의 자리를 되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프로이트가 『문명과 그의 불만』에서 말한 것처럼, 문명적 이성(혹은 초자아)은 리비도의 자연스러운 발현을 억압하면서 욕구불만이나 변태성을 양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괄호의 안과 밖을 극명하게 대비시키면서 시인은 분열증을 앓고 있는 이 시대의 자화상을 내밀하게 들여다보고 있다.
젊은 숫소 같은 아빠들이 새끼들에게 햄버거를 사 먹이고 있다 노동절인지 근로자의 날인지 그런 게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두부장수가 맥도날드 앞을 지나가고 있다 다 팔아도 하루 땟거리도 안 될 것들을 싣고, 대형 차량 사이로 번데기처럼 쪼그라든 노인이 리어카에 매달려 간다 ‘재활용’에서 꺼내 입었는지 바지는 뗄룽하니 정강이가 나왔다 비를 맞고 가는 새까맣게 절은 옷은 착 달라붙어 몸을 감싸는 껍데기에 지나지 않을 뿐,
갈수록 낯설어져 아득히 따로 굴러가는 세상에 구멍 난 수레바퀴 같은 인생, 바람에 흩날리는 면사포같이 꽃비는 내리는데, 쭈글쭈글해서 더 검고 더 차가워 보이는 저 몸뚱어리에도 한번쯤은 복사꽃이 불을 켜든 적이 있었는지, 죽어서야 풀어놓을 수 있는 워낭을 모가지에 매달고서 할딱이고 있다 등판이 내려앉고 엉덩짝이 함몰된 숫소처럼 수레에 질질 끌려가고 있다 최서림, 「5월 1일」전문,『시와 사상』여름호
시란 눈트임이다. 아프고 저리고 따스한, 그리고 기쁘고 슬프고 온화한 이 세상의 가녀린 몸짓에 다가가 보듬어 안는 마음이 바로 시눈이다. 하여 시란 마음이 가 닿는 지점에 움트는 씨눈이나 진배없는데, 그것은 바로 이 세상에 흩뿌려진 인간학적 온기이다. 환타지나 시각적이고 감감적인 이미지가 난무하는 21세기에도 시는 아직도 유효하다. 다촛점 렌즈로 이 세상 굽어보기. 낮은 곳에 임하여 아픔과 고통을 승화시키기. 이 세계는 각각의 다양한 시선들이 각각의 몫을 다하면서 상호 連彈되고 있다. 부조화 혹은 불평등. 시인 최서림의 「5월 1일」은 다촛점 렌즈 줌을 끌어당겨 낮은 자의 일상적 삶의 형태를 내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아프고 참담하다. 불평등은 어디서 기원하는가. 유전자인가, 사회적 구조인가. 왜 이 세계는 평등을 실현시키지 못하는가. 한편에서는 생을 향유하고, 다른 한편에선 “세상에 구멍난 수레바퀴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우리는 왜 불평등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가. 유전의 법칙인가, 후천적 학습인가.
시 「5월 1일」은 도심을 살아가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맥도날드와 두부장수”로 극명하게 대비시키면서 자본의 구조에 도사린 기만성을 폭로하고 있다. 시인 최서림의 시선이 수레를 끄는 두부장수 노인의 모습에 집중되어 있기는 하지만, 하여 비에 젖어 쪼글쪼글한 노인의 비참한 형상에 모든 시선이 집중되어 자본적 모순성이 약간 완화된 듯이 보이기도 하지만, 기실 시인이 말하고 싶은 것은 기본권에 속하는 노동에서 소외되어 “땟거리”조차 연명하기 힘든 이 도시의 극빈자에게로 향해있다. 어떤 계층이 부를 만들고, 누가 가난한 자를 양산하는가. 시인은 미국식 자본주의 상징인 “맥도날드”의 화려한 앞면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응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한번도 화려하게 꽃 피지 못한 생이거나 비에 젖어 “할딱이”는 “번데기처럼 쪼그라든 노인”의 생이다. 마르크스의 『경제학 철학 수고』나 『자본론』이 옳다면, 자본은 부도덕하다. 아니 자본주의 체제는 더 많은 부를 창출하기 위해서 부가 그 자체로 도덕적이지 않아도 된다고 용인하고 있다. 비록 시인이 5월 1일 노동절의 풍모를 이중적으로 대비시켜 소묘하고 있기는 하지만, 최서림의 시적 의도는 자본주의의 이념과 체제를 두부장수 노인에 빗대어 우회적으로 비판 서술하고 있다.
소리 없이 폭발하는 불꽃
조심스레 가슴에 옮겨 심는다
분화구 그득 채울 그 날을 위해
멀리하고 싶은 욕망까지도
몸 속 아주 가까이 와 있다
후-욱,하고 오래 전 기억에서 꺼져버린 불씨
그 흔한 유언장도 없이 메말라 죽어 가는 나의 화산을
누가, 촉촉한 입술로 건드려다오
몸 속 용암이 멎은
그곳에 온기 살아나도록
치마폭으로 살며시 감싸다오
날마다 새카맣게 타 들어가는 가슴
검은 연기 내뿜어 눈 멀었다
내 마음을 타넘고
곰팡내 나는 희망을 물어 가버린 전생(前生)
거기, 불길 속 뛰어 들기에는
몸이 너무 차다
김희업,「나의 화산」전문,『칼 회고전』, 시작
생을 화려하게 폭발시키는 것은 가능한가. 생의 형식이 선험적으로 이미 차압당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 생은 새로운 생을 기획할 수 있는가. 시인 김희업의 「나의 화산」은 그 생에의 형식을 “화산”으로 비유하면서 자신의 삶-시간-세계에 대한 의미론적 성찰에 이르고 있다. 생에의 욕망 혹은 사그라진 의지. 시인 김희업은 이 양자 사이에서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그것은 어쩌면 니체적인 의미의 생에의 의지이거나 시인으로 거듭 태어나고 다시 싶은 의지적 결의에 다름 아니다. 허나 차갑게 식은 몸. 시인에게 “몸”은 시적 화두이자, 그가 스스로를 넘어서야만 제일의 과제이다. 서정주의 『화사집』에 나타난 관능적이고 자기 고백적인 몸에 관한 인식처럼, 시인은 자신의 육체적 한계상황을 정직하게 고백하면서 진정한 존재론적 초상을 응시하고 있다.
천형성 혹은 초인. 시인에게 화산은 양가적 실체로 표상되지만, 기실 그것은 휴화산이거나 사화산에 다름 아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화산은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을 표현하는 객관적 실체이거나 시인의 삶-시간-세계를 혁신시킬 수 있는 유일한 실재이다. 하여 화산은 시인 자신의 존재의 거울이다. 비록 김희업이 자신의 존재론적 형상을 “희망을 물어 가버린 전생(前生)”으로 형상화하고 있기는 하지만, 하여 현실의 원칙 속에서 어떠한 희망도 간직하지 못한 것처럼 비추어지기는 하지만, 시인 김희업은 자신의 외연적 실체를 정확하게 직시하면서 그 외연적 형상 밑으로 존재를 응결시켜 숭고한 정신성을 견인해 내고 있다. 하여 시인의 시말운동은 존재의 형식에 차압당한 육체성을 고결한 정신으로 지양 극복하여 존재의 심연으로 귀의해 들어가고 있다.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시말을 욕동시키는 화산. 활화산과 휴(사)화산 사이에서 질식하는 존재. 화산은 김희업 자신이다. 화산은 “날마다 새카맣게 타들어가는 가슴”, 즉 시인의 아픈 마음이다. 허나 언젠가 다시 마그마를 분출하면서 활화산처럼 “폭발하는 불꽃”을 기대하면서 시인은 자신의 차가운 몸성을 냉정하게 정관하고 있다.
때론 사랑이 시들해질 때가 있지
달력 그림 같은 창밖 풍경들도 이내 무료해지듯
경춘선 기차 객실에 나란히 앉아 재잘거리다
넓은 어깨에 고개를 묻고 잠이 든 그 설렘도
덕수궁 돌담길 따라 걷던 끝난 것 같지 않은 그 떨림도
북촌마을 막다른 골목 가슴 터질 듯 두근거리던 입맞춤도
그냥 지겨워질 때가 있지
그래서 보낸 사람이 있지
세월이 흘러 홀로 지나온 길을 남몰래 돌아보지
날은 어둡고 텅 빈 하늘아래 드문드문 가로등불
오래된 성당 앞 가로수 길에 찬바람 불고
낙엽과 함께 뒹구는 당신 이름, 당신과의 날들
빛바랜 누런 털, 눈물 그렁그렁한 선한 눈망울
영화 속 늙은 소 같은 옛날 사람
시들하고 지겨웠던, 휴식이고 위로였던 그 이름
늘 내 안에 있는 당신
이제 눈물을 훔치며 무릎을 내미네
두근거림은 없어도 이런 것도 사랑이라고
곽효환, 「옛날 사람」전문,『문학청춘』가을호
사랑은 전유다. 아니 사랑은 그 누군가를 전유했다고 믿어지는 순간에 발생하는 감성의 체계인데, 그것은 언제나 관계의 정립적 국면이다. 사랑이 있었던 자리 혹은 사랑을 추억하며 생을 반추하는 자리. 또는 빛바랜 옛사랑의 그림자. 곽효환의 「옛날 사람」은 사랑이 있었다 떠난 그 시간, 그 장소를 애잔하게 추억하면서 사랑의 의미를 되묻고 있다. 이영훈이 작사한 「광화문 연가」의 애잔하지만 아름다운 노랫말처럼, 곽효환은 사랑이었고, 사랑했었던 자리를 추억하고 회상하면서 서정의 절대적 순간에 이르고 있다. “설렘 혹은 떨림”. “눈물 혹은 입맞춤”. 서정적 회감은 과거로 회귀하여 사랑했던 순간을 정확하게 재현하는데, 그것은 fp테를 거부하는 므네모시네이다. 다시 말해서 생은 언제나 미래적 시간의 끌어당김에 의해 유인되는 것 같지만, 기실 생은 과거의 강렬했던 순간이 만들어낸 표상작용에 의해 지배받게 된다. 하여 서정적 회감의 순간은 현재와 미래를 길항시키는 과거나 대과거의 전유적 국면에 대한 인간학적인 태도에 다름 아니다.
양가적 감정으로 존재하는 “당신의 이름, 당신과의 날들”. 사랑은 그렇게 왔다 그렇게 시들해지기 마련이지만, 사랑의 흔적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회감의 구조 내에 사랑은 언제나 현재적이다. 왜냐하면 시인 곽효환은 사랑의 흔적들을 정확하게 재현하면서 그때 그 감정의 순간으로 정확하게 회귀해 들어가기 때문이다. 하여 서정적 회감을 표상하는 사랑은 “늘 내 안에 있는 당신”의 초상에게로 달려가 당신을 現存시킨다. 어쩌면 곽효환의 「옛날 사람」은 진짜 옛날 사람이 아니라 소멸시효가 적용이 되지 않는, 하여 늘 가슴 한켠에 살아 움직이는 현재의 사랑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시인은 “두근거림은 없어도 이런 것도 사랑이라고” 언명했기 때문이다. 베르그송적 의미에서 사랑의 의식이 지속하는 한, 과거의 사랑도 늘 현재적이다. 하여 시인에게 사랑은 그 내적 외적 형식을 불문하고 회감의 구조 내에서 언제나 현존적으로 현전하고 있다. 사랑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언덕’은 듬직하다
둥그렇게 미덥다
믿음이란 그 말보다
외려 더 미더운데
헛되다
그 누구에게도
언덕되지
못한
내
삶
문무학,「낱말 새로 읽기28-언덕」전문,『낱말』동학사
가장 첨예한 전유 방식이나 앎에의 의지를 실현시키는 것은 언어이다. 이를테면 언어는 그 자체로 삶-시간-세계를 대리표상하면서 그것의 의미를 확정하는데, 시인 문무학은 “언덕”이라는 낱말을 재전유하면서 자신의 존재론적 위치를 가늠하고 있다. 이 얼마나 멋진 발상인가. 이 얼마나 참신한 시말운동인가. 전유된 의미의 세계를 재전유하면서 시인은 새로운 앎의 지대로 비약하고 있는데, 그것은 새로운 앎이거나 전유된 의미에 대한 전복적 의지이다. 어쩌면 시인 문무학의 「낱말 새로 읽기」 연작들은 이제까지 믿어졌던 확정적 의미를 새롭게 갱신시키면서 시적 위의의 위상학적 위치를 탐문하고 있는데, 그것은 어쩌면 시말혁명의 전초기지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새로운 시말의 생성 조건만이 진정한 시적 주체로 거듭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인 문무학의 시말운동은 말 자체의 순수한 사유작용을 극한까지 몰고 가 새로운 말의 지대를 탐색하고 있다.
시 「낱말 새로 읽기28-언덕」은 그러한 경우의 적확한 예인데, 시인 문무학은 “언덕과 믿음과 삶” 사이사이를 인간학적 태도나 이해로 교묘하게 종주하면서 삶-시간-세계에 새겨진 의미를 재전유하고 있다. 믿음보다 더 미더운 언덕 혹은 믿음으로 전도된 언덕. 비록 시인이 자신의 삶을 “헛되다”라고 언표하고 있기는 하지만, 언덕의 語義轉成은 말의 의미적 질량을 존재론적 가치로 치환시켜 말이 곧 삶이라는 등식을 성립시킨다. 다시 말해서 시인 문무학의 「낱말 새로 읽기」연작들이 이 시대에 유효한 것은 시인 본연의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면서 말의 새로운 형국을 정초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덕=믿음’이다. 언덕은 단순한 사물 표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혹은 소쉬르가 『일반언어학강의』에서 말한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일대일 대응방식으로 언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읽기 방식에 따라서 새롭게 의미를 분출하게 되는 그야말로 새로운 시말운동의 보고이다. 이 얼마나 위대한 읽기 방식이 아닌가.
눈썹과 눈썹 사이가 멀어 시인이 된 여자
눈썹과 눈썹 사이를 평생 걸어가는 여자
눈썹에서 눈썹까지
한 번도 당도하지 않은 여자
잃어버린 황금 눈썹 한 포기를 찾아
끝없이 방황하는 여자
상상의 구름떼가 그녀의 눈썹을 뜯어 먹는다
흰 이마에 푸른 번개가 뜨고
별을 보고 점을 치는 예언자처럼
가장 뜨거운 시의 심장을 훔쳐 도망쳐 온
눈썹과 눈썹 사이 광활한 미간眉間
이화은, 「미간美間」전문,『웹진』가을호
시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대저 어떤 운명을 타고 날 때, 우리는 시인이라는 숭고한 이름 가질 수 있는가. “눈썹과 눈썹” 사이를 종주하는 시인. 눈썹과 눈썹 사이에서 예인되는 시말. 眉間을 美間으로 의미를 전복시켜 새로운 미를 생성하는 시인. 어쩌면 시인에게 눈썹과 눈썹 사이는 미적 형식이 존재하는 거리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예술가란 자고로 눈썹과 눈썹 사이를 왕래하면서 새로운 미적 형식을 창조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眉間을 美間으로 전유하여 새로운 운명을 만나기. 시인 이화은에게 있어서 시란 그 자체로 대상을 전유하여 대상 가능성을 새롭게 현시하는 방식인데, 그것은 결코 도달이 불가능한 눈썹과 눈썹 사이의 거리에서 생성된 “가장 뜨거운 시”를 예인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눈썹과 눈썹 사이 혹은 미적 거리. 이화은의 시 「미간美間」은 아름답고 경이로운 시말운동을 전개하고 있는데, 그것은 시인이 될 수 있는 천형적 운명성과 시말의 존재적 층위를 눈썹과 눈썹 사이라는 최단 거리로 응축시켰다가 이내 그것의 미적 거리를 최대화하는 아이러니를 연출하고 있다. 이 얼마나 멋지고 기발한 발상이 아닌가. 눈썹과 눈썹 사이에서 태어나 평생 시인의 운명적 길을 걸어갈 때, 두 눈썹 사이에서 시인은 방황하면서 새로운 시말의 국면을 예인하게 된다. 허나 한번도 두 눈썹 사이를 완벽하게 당도하지 못한 시인. 이화은에게 있어서 두 눈썹은 예술의 거대한 두 축에 다름 아니다. 다시 말해서 한쪽 눈썹이 내용이라면, 다른 한쪽 눈썹은 형식인데, 시인은 그 두 눈썹, 즉 내용과 형식 사이에서 “황금 눈썹”을 찾아 방황하고 있다. 상상력과 예지력을 가지고 시말 사이사이를 아슬아슬하게 건너면서 이화은 시인은 시말의 절대적 순간을 포착하고자 시도 중이다.
허나 찾아지지 않는 시말. 허나 한번도 당도하지 못한 미(내용미)와 미(형식미) 사이의 최대거리. 眉間은 美間이다. 미간은 너무도 광활한 예술의 절대공간이자, 모든 미적 형식이 발원하는 역동적인 공간이기도 한데, 그것은 시의 신이 거주하는 뮤즈의 전당이다. 비록 시인이 “예언자”적 영매가 되어 “황금 눈썹 한 포기” 같은 완벽한 시말을 예인하고자 하나, 시인은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처럼 평생을 걷고 방황하면서 몰락을 승인하는 자이다. 왜냐하면 시인이란 자고로 미의 최대 거리 사이를 평생 왕래하다가 미 앞에 굴복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비록 시인 이화은이 “시의 심장”을 훔쳐 완벽한 미를 전유하고자 시도 중이지만, 시인은 광활한 眉間 사이에 갇혀 이내 몰락하게 된다. 시인으로의 운명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광활한 眉間과 美間 사이에 갇힌 채 아름다운 시말을 예인하기 위해 자신의 온 생애를 바치고 있다. 아름답지 아니한가!
문학청춘 2009 겨울호
김석준 시인, 평론가
1964 충남 아산 출생, 고려대학교 철학과 졸업, 서울대 국문학 석사, 박사, 현재 산업대학교에서 국문학 강의를 하고 있다
1999년 <상처>외 4편의 시로 <시와 시학>등단, 2001년 <천상병 론>으로 <시안>을 통해 평론가 등간,
저서로 <비평의 예술적 지향>(2003년 시와 시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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