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스마가 내재하는 문학 /심은섭
인간이 싸우는 이유 중에 하나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역사는 투쟁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주관적인 입장에서 싸우는 것은 ‘개인(나)’를 위한 싸움이며, 객관적인 입장에서 싸우는 것은 ‘전체(너)’를 위한 싸움이다. 이런 싸움들 중에는 물리적인 힘에 의한 싸움뿐만 아니라 물리적인 힘이 배제된 상태에서 남을 지배하는 싸움, 즉 카리스마charisma가 있다. 카리스마를 사전적 의미, 또는 사회학적 측면에서 해석해보면 ‘추종자들이 지도자가 갖추고 있다고 믿는 경외로운 속성이나 마력적인 힘, 또는 사람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인격적인 특성’이다. 이 카리스마라는 용어는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1864~1920)에 의해 학술적인 용어로서 본격화 되었고, 그의 저서 〈경제와 사회 Wirtschaft und Gesellschaft〉에서 카리스마적 권위를 전통적·법률적 권위와 구별되는 형태의 권위로서 정식화했다. 이런 권위가 변형되는 과정을 '카리스마의 일상화'(routinization of charisma)라고 그는 표현한 바 있다.
인간은 자유를 추구하면서도 근본적으로 나약하기 때문에 은연중에 어떤 카리스마를 희구(希求)하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카리스마가 일반적인 사회체제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세계에서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많은 독자들을 감동으로 휘어잡거나 심복하게 하는 능력이나 자질을 갖춘 작품들이 그러하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각각의 특색을 지닌 네 작품을 통해 그들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작품세계를 살펴보기로 한다.
1.‘이긴 자가 진다’는 것에 대해
우리나라 마을마다 들판마다 봄이면
솜방망이 꽃이 활짝 핀다
상반심은 사람이고 하반신은 말인 켄타우로스가, 검은 켄타우로스가, 흰 켄타우로스가, 워커 신은 켄타우로스가, 구두 신은 켄타우로스가, 꽃냄새를 맡고 히힝, 히히힝, 정원까지 들어와 뛰어다니는 동안, 한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도가니들이 하나하나 금이 가고 깨져 버렸다.
법원 앞 화단에 솜방망이 꽃이 잔뜩 피어서 그 냄새가 코를 찌르는 동안
-성배순, 「켄타우로스 공화국」 (월간 『현대시학』 2012년 1월호)
성배순 시인은 「켄타우로스 공화국」을 통해 감동이라는 힘의 카리스마로 독자들을 지배하려고 한다. 바로 사회의 모순된 제도와 극렬하게 싸우고 있는 문학적 힘을 우리들에게 보여 주고 있는 것이 그러한 것이다. 소위 무전유죄 유전무죄가 존재하는 세계와 싸우고 있다. 그것도 물리력이 완전히 배제된 문학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감동과 비판의 도구를 가지고 싸운다. 그는 싸움에 있어서 어떤 대가나 보상을 요구하지 않으며, 전관예우를 고집하지도 않는다. 오직 문인으로서 「켄타우로스 공화국」에 충실할 뿐이다. 그는 법원 앞 화단에 잔뜩 피어 있는 솜방망이 꽃이 피어 있다는 표현으로 의식이 남루해져 가는 현대사회의 모순을 비판한다.
켄타로우스가 정원을 휘 젖고 다니고, 솜방망이 꽃이 법원 앞 화단에만 피는 게 아니라 마을이나 들판에도 피어있다. 검은 켄타우로스이든, 흰 켄타우로스이든, 워커나 검은 구두를 신은 켄타우로스이든 그런 켄타우로스가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솜방망이가 온 천지에 피어있다는 것은 이 사회가 분명히 병들어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앞의 「켄타우로스 공화국」에서 병든 사회를 주도하는 주체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것은 현대시가 가지고 있는 ‘감춤과 드러냄’이라는 고유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 까닭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성배순 시인은 「켄타우로스 공화국」을 통해 사회 구성원들간의 반목과 불신이 아닌 통합을 원하기 때문이다. 상호 불신하는 유기적 관계가 아니라 상호 신뢰하는 새로운 질서, 약속을 요구하고 있다. 새로운 질서, 약속이라는 것은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말한다. 지금 그는 한 개의 펜으로 부르주아의 총체성에 대항해서 싸우며, 부조리한 사회에 대해 증인이 되고자 한다.
솜방망이 꽃이 피는 공간적 배경이 ‘마을마다 들판마다’에서 ‘법원 앞 화단’이라고 분명히 제시함으로써 독자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의도를 품고 있는 것도 「켄타우로스 공화국」가 지니는 하나의 특징이라 하겠다. 그리고 그는 비판의 대상과 매우 짧은 비판적 거리로 ‘내’가 아닌 ‘너’를 위해 싸우고 있다. 이것은 ‘승자가 진다’는 사회를 ‘패자가 이긴다’는 사회로 반전 시키려는 시인의 중대한 노력이다.
2. 죽음은 자신에 의한 타살
차 유리창을 노크 했을 때
머리를 맞댄 두 죽음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텅 빈 입 속에서 뇌조가 튀어나왔다
수 천 미터의 상공으로 날아오른 뇌조는
날카로운 쇳소리로 울부짖었지만
구름을 뚫지 못한 지층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뇌조가 이 세상의 초록빛 말을 버리는 순간
허공이 무덤을 팠으므로 허공이 제 몸을 뒤집어
뇌조의 행방을 알려주기 전까지
죽음의 배후에 입이 있다는 것을
입이 입을 껴안는 방식은 귀에 있다는 것을
귀가 말의 무덤인 것을 알지 못했다
뇌조가 빠져나간 몸을 알코올로 적실 때마다
입에서 흘러나온 악취에 얼마나 자주 젖어야 했던가
입과 귀가 통하지 않는 세상과 만날 때 마다
그 구멍을 솜으로 틀어 막아야 했다
뇌조 속에서 돋아나온 기표들
세상에 뿌려놓은 입들이 무성하게 자라나도록
귀의 행방을 오래도록 더듬을 것이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초록빛 귀에 대하여
사람들은 죽음 뒤편의 말을 골라 먹을 것이다
무덤 속에 든 입을 꺼낸 것처럼
-강영은, 「검시관」 (웹진 『시인광장』 2012년 1월호)
인간이 지니고 있는 죽음이 파멸적인가 아니면 구원적인가를 놓고 우리는 한번쯤 깊은 고민에 빠져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죽음 하나를 안고 살아간다는 데 그 이유가 있다. 때로는 사람들은 “모든 인간은 다 죽어도 나는 죽지 않는다”는 착각을 하며 살아가지만 인간은 분명히 죽는다. 그런 가운데에서 죽음이 끝인가, 아니면 시작인가를 놓고 논자들은 열띤 논의를 하고 있지만 그러한 논쟁마저 끝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죽음에 대해 강영은 시인의 「검시관」은 상징성의 비유로 예술적 표현을 감지하며, 한 인간의 죽음의 깊이와 폭이 얼마나 깊고 넓을 수 있는가를 인상 깊게 들려 주고 있다.
아무튼 이 작품은 읽는 우리들에게 검시하는 검시관의 입장에 서게 한다. 아주 당황할만한 새롭게 제기되는 의문은 아니지만 인간의 죽음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인가를 비판적으로 묻고 있다. 간혹, 죽음은 자연의 제(諸)법칙을 따르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가설을 설정한다. 가령, 생로병사가 아닌 그물망처럼 얽혀있는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5관에 그 사인(死因)을 둔다는데 있다. 그 5관 중에서도 입이다. 죽음을 대좌하는 검시관은 ‘죽음의 배후에 입이 있다는 것을/입이 입을 껴안는 방식은 귀에 있다는 것을/귀가 말의 무덤인 것을 알지 못’한 채 ‘입과 귀가 통하지 않는 세상과 만날 때 마다/그 구멍을 솜으로 틀어 막아야 했’던 것이다. 사인에 대한 측량과 평가는 검시관 개인의 지배적인 기준의 개념에 비추어야만 가능하다는 논리를 뒤집고 있다.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원인이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것이 아닌 검시관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 잣대가 되고, 그로 말미암아 상이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는 자조 섞인 상징성을 보이고 있다. 삶은 위기의 연속이며 이 위기의 극복은 죽음이다. 이 죽음은 자신에 의해 타살하는 형식의 방법을 취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죽음 뒤편의 말을 골라 먹’고 있다. 죽음 이전에 죽음의 원인에 대해 알 권리를 가진 한 인간임을 말하고 있다. 인간의 죽음이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애매한 일종의 실험인 것이다.
3. 강렬성과 환기력, 그리고 신선함
병든 눈으로 강가를 걸었다
민박집 어린 소녀가
플라스틱 피리를 낮게 불고 있다
텅 빈 물결의 뼈를 들여다보면
잘못 짚은 음계처럼
저녁의 얼굴 한쪽도 적시지 못하는 마음이여
바람이 끌고 오는 저녁
당신에게서 내게 건너 오는 말은
젖은 물고기 두 마리의 떨림
당신의 흐린 팔목이 내 얼굴을 끌어당길 때
입술은 누군가 쓰다 버린 청동빛 칼날
당신을 필사하는 나는
두 눈이 짓무른 필경사의 후예
당신은 몇 겹으로 주름지던 물결이었나
심장과 이마를 내려놓고
당신은 어떤 음계로 이 저녁을 빠져나갔는가
온몸의 피를 빼 당신에게 더운 피를 먹였다
우리는 늘 멀다
-서안나, 「저녁의 음계」 (계간 『시산맥』 2011년 겨울호)
서안나 시인은 「저녁의 음계」에서 개인적 낭만의식을 극복하고 시를 언어의 예술로 승화시키고 있다. 곧 ‘시는 언어다’라는 예술적 의식을 자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저녁의 음계」가 품고 있는 이미지의 특징을 루이스(C.D.Lewis)가 주장했던 세 가지로 집약해 보면 강렬성과 환기력, 그리고 신선함이다. 예를 들면 ‘입술은 누군가 쓰다 버린 청동빛 칼날’이라는 이미지는 강렬성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시는 운율과 순간적인 언어예술이기 때문이다. 특히 ‘청동빛 칼날’은 폭력성을 연상시킬 만큼 강렬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그 까닭은 「저녁의 음계」가 지니고 있는 전체적인 분위기가 매우 진지한 상태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두 번째로는 환기력이다. 하나의 연이면서 행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시의 마지막 부분인 3연의 ‘우리는 늘 멀다’는 시선을 한곳으로 집중시키는 환기력을 보여주고 있다. 진지한 태도로 끌고 오던 시적 분위기를 일순간에 확 바꾸어 놓고 있다. 그 다음은 신선함, 즉 신선한 비유이다. 원관념이 담고 있는 의미를 근접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가장 적절하게 비유해야 할 객관적 상관물을 어떤 방식으로든 끌고 오는 일이다. 예컨대 ‘잘못 짚은 음계처럼/저녁의 얼굴 한쪽도 적시지 못하는 마음’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일종의 ‘낯설게 하기’의 기법이 잘 활용된 것이다. 이것은 더구나 인간의 보편적 정서에 호소하는 신선함을 주고 있다. 강렬성과 환기력, 그리고 신선함을 갖춤으로써 주위의 시선을 끌어 당기는 카리스마가 강렬하게 느껴진다
.
4.‘우연’과 ‘유희’
높은 바람과 구름을 타고 다니는 독수리 날개의 넓고 튼튼한 부력만을 골라 냉장 숙성시킨 후에 구웠습니다.
하루 중 가장 차갑고 맑은 시간에 터져 나오는 새벽닭의 힘찬 울음만을 엄선하여 바삭바삭하게 튀겼습니다.
시속 111킬로미터로 달리는 치타의 근육이 만들어내는 팽팽한 탄력만 가려내 담백하게 고았습니다.
발톱과 이빨이 간지러워 우는 고양이의 갓난아기 울음에서 애절한 눈빛만 솎아내 고소하게 볶았습니다.
수천 미터 밖 물살의 힘과 방향을 읽는 물고기 지느러미를 푹 끓여 고감도 감각만을 진하게 우려냈습니다.
두근거리는 토기의 심장에서 연한 놀람과 어린 두려움을 떨림이 살아있는 그대로 발라낸 갖은 양념에 무쳤습니다.
주인을 향해 막무가내로 흔들어대는 개 꼬리에서 명랑하게 들뛰는 유전자만을 갈아 즙을 냈습니다.
씹지 않아도 녹아서 핏줄로 전율하며 스며드는 육질과 육즙의 싱싱한 발버둥만을 양념으로 사용했습니
다.
-김기택, 「오늘의 특선 요리」 (월간 『현대시』 2012년 1월호)
근대의 세계는 필연의 세계이다. 그러나 건축 분야에서 시작된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는 ‘우연’과 ‘유희’를 추구한다. 다시 말해 탈중심화이다. 휴 실버만 교수 역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중심으로부터의 무한한 분산작용’이라고 했다. 동질성보다는 이질성을, 화술speech보다는 기술writing을, 탈인간화를 추구한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세계의 ‘이성’을 비판하면서 완결된 작품 추구를 포기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이성을 비판하는 것은 자기보존 수단이면서 타자를 배제하는 독단의 세계라는 인식에서 비롯되었고, 또 완결된 작품을 추구하지 않는 것은 이성(주체, 나)과 광기(타자)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인정한다는 데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앞에서 논의했던 명제를 전제로 김기택 시인의 「오늘의 특선 요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작품의 완결성을 포기하고 있다. 이것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세계(현실)를 설명하려고 한다. 이를테면 김기택 시인의 입장에서는 근대적인 모델(모더니즘)로는 모든 제도(현실)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낡은 전통방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모델로 모든 제도(세계)를 설명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를 따르고 있다. 따라서 계층적 구조를 타파하는 「오늘의 특선 요리」를 내놓기 위해서는 그에겐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형식이 필요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단일한 자아로 중심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복수의 자아로 미끄러지며 차이를 연기한다. 「오늘의 특선 요리」는 모두 8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8연을 끌고 오면서 중심으로 들어가 무엇을 찾아낸 것이 아니라 표층에서 계속 미끄러지고 있다. 그는 여러 개의 목소리로 각 연과 연의 차이만 얘기할 뿐이지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작품 속의 시적 화자는 단일한 자아가 아니라 복수의 자아가 존재한다. 또 요리의 재료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그래서 유연하고 해석적이며 자기의식적으로 대화적인 태도를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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