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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머의 해설

​구원의 서정, 고통의 미학 -김원욱 시집 해설

by 너머의 새 2019. 4. 1.

           

구원의 서정, 고통의 미학 -김원욱 시집 해설  

 

                                        강영은



1,

  슐라이어마허는 그의 저서에서 종교의 본질을 무한자(우주, 신)에 대한 '절대 의존의 감정'으로 보고, 인간은 ‘무한자의 거울로서 자유롭게 자기를 실현하는 것이 옳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슐라이어마허의 말은 구원과 자기실현을 목적으로 둔 시인에게 있어 시(詩)의 내질과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김원욱 시인에게도 동일한 목적성이 엿보이는데 일찍이 <나의 문학을 말한다>라는 산문에서 ‘구원으로서의 문학’을 표방한 적이 있을 뿐 아니라 인간의 삶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부정적인 상황을 되비추거나 토설함으로써 무한자의 거울처럼 자신의 삶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이전의 시편들이 “말 이전의 것들이 제 몸으로 드는 자발적 위리안치’’(두 번째 시집의 해설 중에서)안에서 구원을 간구하고 있다면, 이번 시집에서 연동되는 시말들은 타력적 구원에 자력적 구원을 결집하는 시공간을 통하여 구원에 합일하려는 태도로 보여진다. 사고와 존재를 통일하려는 그의 시말들은 구원의 기능을 가동하는 양태로 나타나며 그 양태는 ‘몸 안의 나’에서 ‘몸 밖의 나’로 이동하는 경로를 보여준다.

몸속의 우주

내가 한 점 먼지였을 때

그저 맨손뿐인 작은 외침이었을 때, 흔들림이 흔들림으로

침묵은 또 다른 침묵으로

소멸의 예감인 듯 켜켜이 쌓여서

투명한 빛깔들 내밀한 저쪽 소리에 귀 기울일 때

나는 생각의 이쪽에서 사각사각 시간을 지워갔었지

창밖은 온통 시간의 무덤뿐

들리지 않는 은하계 음파 같은

한사코 창가에 기대는 바람소리 같은

그 겨울, 말라터진 혓바닥으로 시공의 문을 열어젖히다가

별무리 도란거리는 썰물 근처

잠든 달빛 깨우는 세포들의 반란을 목도하다가

억겁 저 멀리 적요의 그늘

그리운 허상 하나 자리하기까지

싱싱하게 살아있는 거대한 침묵을 바라보기까지


 시인은 누구나 자신의 고통을 즐겨 작품으로 만든다. 시를 쓴다는 것은 섬세하게 고통을 지속해나가는 언어를 양상하는 일이다. “내면 가장 깊은 곳에서 스스로에게 말을 거는 것은 인간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값진 선물이다”라고 한 바슐라르의 말처럼 스스로에게 던지는 독백의 언어야말로 구원의 언어이며 위로의 언어일 것이다. 자신을 성찰케 하는 그것은 ‘자아’ 라는 시공을 뛰어넘어 ‘타아(他我)’로 전이되는 구원의 순기능이다. ​ 

 ‘억겁 저 멀리 적요의 그늘/그리운 허상 하나 자리하기까지/싱싱하게 살아있는 거대한 침묵을 바라보기까지’ 시인은 무수한 시간을 지워나간다. 침묵하고 있던 내면이 타오르는 순간 시간은 ‘누군가의 누군가’를 호명한다. 존재의 원천이 물끄러미 자신을 응시하는 놀라운 경험은 시인으로 하여금, 자기 안에 머물렀던 타아(他我)를 구현(具顯)하는 현실이 된다.


 

누군가의 누군가는

누군가의 어머니 아버지

누군가의 삼촌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속

누군가의 누군가를 만지고 또 만지는

누군가의 뼈,

꽃잎에 섞여 바삭거리며

누군가 울고 있는

누군가 떠나지 못하는

누군가 눈물의 글 남기는

누군가의 누군가가

잠시 머물다 떠난 그리운 땅

그리운 숲 그리운 하늘

한때 두근거리며 찾아갔던

누군가의 집

빗물에 젖어 정처 없이 걷던

이 지상 낮은 길들 죄다 젖어서

누군가를 마냥 그리워하는

양지공원 추모의 집 106실,

알 것만 같은 누군가의

누군가는.

 

 “누군가의 누군가”는 ‘누구’인가? 이 시에서 드러나는 ‘누군가’는 “누군가의 누군가를 만지고 또 만지는/ 누군가의 뼈”로써, 뼈의 제유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만 같은 누군가” 이다. 그 ‘누군가’가 몸담고 있는 공간은 “잠시 머물다 떠난 그리운 땅”으로 지칭된다. 누군가, 울고 있는, 떠나지 못하는, 여전히 남아 눈물의 글을 남기는 그 공간은 시적 화자의 공간이면서 이 세상이다.  

  여기서 시인이 사용한 “누군가의 누군가”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누군가의 누군가’는 이 세상에 와서 잠시 머물다간 존재로 설명되어진다. 지구라는 별에 왔다가 떠난 ‘누구’,이다. ‘누구’는 잘 모르는 사람, 막연한 사람을 가리키는 인칭 대명사지만 ‘누구’라는 익명의 존재성에 물음이나 추측의 의미를 나타나는 어미 ‘-ㄴ가’를 두 번 반복해 사용함으로써, 존재의 근원에 닿아있는 총체적 의미로 확장된다. 존재의 연대성, 존재의 영속성을 뜻하는 의미가 된다. 일상 언어생활에서는 명백한 의미 전달이 중요하지만 시의 언어가 애매성을 지닐 때, 핵심적인 의미와 더불어 풍부한 암시성을 포함한다. 때문에, 불특정 다수로도 한 개인으로도 읽을 수 있는 이 애매성은 읽는 이의 정서를 환기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결국, “누군가의 누군가”는 타자의 존재를 인식하는 행위이며, 타자 속에 또 다른 나를 낳는 명망(名望)의 눈을 지니는 동기가 된다.


  ‘시인의 말’을 보면, 그동안 걸어온 길이 온전한 자아가 아닌 허상이었음을 고백한다. 온전한 자아를 찾으려는 명망의 눈은 허상인 자아를 죽임으로써 몸 밖의 우주, 현실을 향해 새로운 지점을 내딛는다.  

 ‘삶의 껍질처럼/ 은하의 별들 무수히 쏟아져 내리는 거울 속/내 몸인 듯 이름 없는 허상 하나 뒤뚱거리며/세상 밖으로 걸어 나가네’-(시신이 되어) 부분


  세상 밖으로, 엄밀히 말하면 ‘자신’ 밖으로 걸어 나간 시인은 이제 신산했던 주변을 향해 따뜻하고 인간적인 눈길을 보내기 시작한다. “문 밖에서 꽃집을 기웃”거리거나, “시장 모퉁이 화장실 들러/ 깊숙이 감춰둔 질긴 물건 조심조심 만져 보”거나 “쓰레기를 치우면서”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행위 속에서 ‘몸속의 우주’가 아닌 ‘몸 밖의 우주’를 감지해낸다. 세상을 향해 화해의 손길을 던지는 시인의 새로운 시작일 것이다. “소리가 소리를 무너뜨릴 때까지/썩은 내장 허물어질 때까지” 자신과 불화했던 순간의 흔적을 지운다. 이는 독백으로 시작된 구원의 형식이 “더는 아프지 않게” 적막에 파묻히는 무심의 차원에 다다랐음을 말한다.


무심에 대하여

 

홀로 서있고 싶은 거다

넉넉하게 노을도 보고 별빛과도 대화하면서 은하계 저쪽 소식도 듣고 싶은 거다

 

섬 가득 빽빽이 들어선 소나무처럼 키 재기하는 소질은 없으니

그냥 놔달라는 거다 자꾸만 키 재기하라면 어느 횟집 수속관 속에서 파닥이다가 침 흘리는 그분을 위해 탁, 피 흘려주고 싶은 거다

 

시원하게 한세상 살 수는 없는 건지

날이 갈수록 육신은 무디어져서 무능인지 무식인지 모르는, 가야산 풍경소리인지 파도소리인지 자꾸만 헷갈리는

 

바람소리 물소리 새들의 울음까지

땀에 젖은 축축한 옷깃까지

깊숙이 자리한 살들의 촉수처럼 안으로만 쌓여서

 

더는 아프지 않게

오래도록 적막에 묻히고 싶다는 것이다


 2,

 김원욱 시인은 제주에서 낳고 자랐으며 성장하여 일가를 이른 후, 경찰로 복무하며 퇴직할 때까지 섬에서 섬으로 떠돌았다. 생래적, 태생적, 운명적, 어느 면으로 보나 섬사람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숙명을 벗어나려고 했던 적은 없는 것 같다.

  

 섬이란 무엇인가, 장 그루니에가 그의 산문집 <섬>에서 말했듯,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 열매처럼 열려있는 곳이 ‘섬’일 터이다. 한편,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고” 고 노래한 정현종 시인의 시처럼 섬은, 고독으로 점철된 인간 본연의 개연성을 의미하거나 그 때문에 인간 존재의 근원을 표방하는 상징이 되기도 한다.  


 김원욱 시인에게 있어 섬이란 고독과 외로움이 복선으로 깔려 있는 고립무원의 공간이다. 닫힘과 열림이 공존하는 불확실성이 매력적인 그 공간에서 그가 추구해왔던 것은 오로지 시(詩)이며, 시인으로 살아가고자 자발적으로 자신을 유폐했던 공간이기도 하다. ‘섬’으로 의장(擬裝)되어왔던 그의 내밀한 언어들은 이번 시집에서 ‘고통의 몸’이 아닌 ‘고통의 마음’으로 드러난다.


모슬포


모스∼∼을,

넉넉한 어감 따윈 모른다 하자

제주들판 외진 곳

휑한

바람인가 하자

포∼, 하고 한숨 뱉고 나면

섯알오름 휘감아 도는 비명인 듯

까마득한 날

큰 바다가 토해 낸 포말인 듯

세한도의 여백 묻어나는 이승 끝자락

스멀스멀 멀어져가는 신기루 같은 ᄆᆞ을,

모슬포라 하자


  모슬포는 제주의 서남단에 있는 항구로, 바람이 몹시 심한 곳이다. 제주사람들은 그곳을 농담 삼아 ‘못살포’ 로 부르거나, 거친 바람을 잘 견디는 그곳 사람들을 ‘대정 몽생이(망아지)'라 부르기도 한다. 황량한 들판을 배경으로 가진 모슬포 항구에서 임지인 마라도로 떠나는 시적화자(시인 자신이겠지만)의 모습이 유배지로 가는 듯 쓸쓸하다. 그래도 떠나야 한다고, 황한(荒寒)과 적막(寂寞) 속에 사무친 고독을 한지에 그려 넣던 추사처럼, 마음을 다잡는 의지가 느껴진다.  


  ’모슬포‘라는 “넉넉한 어감” 대신 “모슬~~” 과 “포”로 나누어 발음하는 것은 시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시인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어감 속에서 들숨과 날숨 같은 숨결을 느껴본다. 쓸쓸함과 비움이 느껴지는 서정의 숨결이다. 서정시는 개인의 내적 감정을 충일함으로써, 대상을 자아에 동일화하려는 구심적인 성격을 갖는데 더욱 웅숭깊은 서정의 시를 보자,  

 

금잔화 

 

아무도 없는 섬에서 벌거숭이 내 몸을 보니 상처뿐이다

아직 살아있는 것들은 봄이 왔다고 서로 물고 당기다가 싱싱한 원수原水처럼 솟아나는데

지구의 모퉁이

위태롭게 딛고 있는 두 다리, 가슴과 목울대까지

섬이니까

외로운 흔적은 아닐까

내 안 깊숙이 겨울을 이겨낸 푸른 잎사귀라면 어쩔까

아득한 날 가야산 자락 빛바랜 삶의 끝, 서러움이

서러움을 넘어 그래도

살아야 한다고

든든히 서있어야 한다고

함박눈 내리는 흐린 날

눈물도 이쯤이면 되겠지 자위하다가

아무래도 섬이니까

풍랑 속에서도 세상은 온통 상처일 거라고

금잔화처럼 흔들리는 거라고

내 몸 언저리 마다 삐죽거리는 상흔,

그 내밀한 안쪽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서정 시인이 대상과 접속하여 그것의 의미를 변화시키는 것은 자아의 정서를 활성화시키기 위해서지만, 김원욱 시인은 금잔화의 이미지에 섬 이미지를 접속시킴으로써, 정서의 강도(强度)를 변화시킨다. 금잔화-섬-시적 자아로 환기되는 이미지는 그래서 애틋함이 더욱 돌올하다.  


  어느 외딴 섬의 금잔화를 보았음인가, 금잔화도, 나도, “외로운 흔적”을 지닌 존재기에 섬이다. 외로우니까, 서러움으로 서러움을 넘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내 몸 언저리 마다 삐죽거리는 상흔,/ 그 내밀한 안쪽을 가만히 들여다 보”는 또 다른 자아가 있다. 구원의 주체성이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에게 있다는 터득의 발현은 “섬에 들어” “파도의 긍정을 엿보다가” 섬이 된 시인들과 즐거운 추억을 나누는 등, 섬을 점차 열림의 공간으로 변모시키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서러운 이름들/뱃길 끊기고 나면/ 남아있는 것들 끼리 몸 비비며 꿈을 꾸듯/파도소리에 귀를 여는” 시인은 이제 “큰 세상에 들어 빙빙 원을 그리다가/뱃전에 부딪치다가/너울너울 바다의 심연으로 가라앉는/물비늘”처럼

 

  ‘봄!, 검멀레의 봄, 게메마씀, 하루방 어디 이수과’와 같은 제주 언어의 심해 속으로 자맥질하기 시작한다. “생채기만 남은 검멀레 외진 들녘 굼뜬 풋나물, 성긴 햇살에 도톨도톨 말려서 되새김질하는 늙은 암소의 거친 엉덩짝 같은” 제주 말을 통해 ‘고통의 마음’을 치유하기 시작한 것이다.


3,

  사람들은 저마다 가슴에서 씻어내고 싶은 고통스러운 ‘그 무엇’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과거에 생겨나 미처 해결되지 못한 상처들이다. 심리학적 용어로 말하자면 트라우마(trauma)라 불리는 ‘그 무엇’은 일생을 뒤 따라다니며 다양한 모습으로 삶을 간섭하기도 한다. 이 때, 우리의 무의식은 기억, 꿈, 환각으로 재현되는 상처에 대해무수한 상(像)을 만들어낸다. 다음은 이러한 상이 만들어낸 사모곡(思母曲)이다.


 ‘먼지 쌓인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떨리는 선반 위/헌 고무신 한 짝’-<빈집>전문

 

 어머니,/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던 말/눈물 밥 말아먹던/위미교회와 서광사, 그 옆 태룡민박 -<에덴요양원>부분 

 

  깊은 고통은 침묵으로 존재하는 것, 그 이미지는 시인의 눈과 귀에 고스란히 남아 선명한 감각을 재현한다. 시집 속에서 보여지는 사모곡(思母曲)들은 아픈 마음을 구원하기 위헤 스스로에게 던지는 자발적 이미지들이다.  ‘ 떠도는 달’의 연작 시편들은  그러한 삶의 파편들이라 볼 수 있다. 달 이미지는 상처로 덮인 시적 자아(自我)의 모습이지만 표현의 측면에서 보면, 시적 진술보다 시적 묘사(描寫)에 치중한 까닭에 상처의 내역은 자세히 드러나지는 않는다. 시 속의 화자는 정작, 말을 축약한다. “빚쟁이에 쫓겨 무작정 찾아간 낯선 땅, 거처할 곳 찾아 성城 안을 돌아다니다가 비명에 젖은 촉석루, 서슬 푸른 꽃잎 바라보다가/막다른 남강 변” -<떠도는 달 1>에서 보듯. 독자는 고통에 압도된 시말들을 통해 발성화된 언어보다 더 심오한 깊이로 속삭이는 신음소리를 들을 뿐이다.


  왜 저리 온몸 드러내놓고/우주의 중심으로 기울어 가는지/섬 가득 밀물,/허물어지네 -<추석, 달 가네>부분


  다시는 안 보려고 마음먹었던 관계를 허물어뜨리는 건, 밀물 같은 눈물이 있기 때문이다. 지구를 중심으로 떠도는 달처럼, 원심력을 지녔던 자신의 삶을 생각하며 회오의 눈물을 흘렸을 시인은 이제 고통이 가진 힘으로 슬픔의 도정(道程)을 걸어 온 모든 이들에게, 무엇보다 자신에게 사랑의 말을 던진다.


 지상의 환한 것들/ 꽃등 밝히며/아픈 것들끼리 고운 빛 모아 살아가는/꽃잎을 보겠네/아득히 하늘이 어두워질 때/저편의 일들이 꿈인 듯 되살아나고/화로 속에 무심히 들앉아 쿨럭쿨럭 기침을 하는 뼈,/그리운 뼈들에게/ 알 것만 같은 손짓들에게 사랑한다, 말했네

                                                   -<어느 꽃잎에 묻히던 날>부분 


  이는 “내 안 깊숙한 밑동까지 밟아 내려가는/발자국 소리 듣다가” “부끄러웠던 지난 날 죄다 꺼내놓고” “은하銀河의 음습한 내장과 실핏줄을 지나” “생각을 비워버리는, 생각을 생각” 하는 동안, 성찰과 자성의 시간을 지나왔던 시인이 불화했던 세계와 화해했음을 의미한다.

4,

 거센 고통 속에서 스스로를 파괴한 관계의 본질을 회복한 시인이 시속에서 도달한 곳은 과거겠지만 미루어 짐작컨대, 시를 쓰는 동안 시인은 ‘지나간 모든 것은 아름답다’는 위로를 스스로에게 던진 것이다. ‘구원의 문학’으로서 자기 목적성을 실현하는 순간이다. 시인에게 있어, 고통은 오히려 용광로 속의 불길처럼 타오르는 시의 질료가 될 터이다. 다음 시를 보자.

억새에게


알아, 그대 살아 있음은

매서운 파도와

서걱이는 울음소리 때문이었을 거야

흐린 눈 말갛게 닦인 채

빗물로 흐르거나

숭숭 뚫린 돌담 사이로 날을 세워 흐르다가

그리운 하늘

그리운 들판에 다시 태어나거나

그래 알아,

섬 가득 푸르름이 일렁이는 날

눈부신 기쁨으로 흔들리는 우리

뜨거운 내 안에서 솟아나던

그 억새


  우리가 알든 모르든, 고통은 모든 생명체 속에 존재한다. 생명체 상호간의 인내와 조화를 요구하며 공존의 근거가 된다. “알아, 그대 살아 있음은/매서운 파도와/서걱이는 울음소리 때문이었을 거야” 억새에 자신을 투사한 시인은 이러한 상호간의 인내와 조화에 기여하는 쓸모로부터 고통을 이길 힘을 갖게 된다. 승화된 고통의 힘으로 긍정적 에너지로 갖게 된 시인은 세상을 향해 위무의 손길을 던진다. “그래 알아,/ 섬 가득 푸르름이 일렁이는 날/ 눈부신 기쁨으로 흔들리는 우리”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눈이 내렸나/집 건너 경찰서, 그 너머 문예회관/바다 한 쪽 가로막은 빌딩들까지 누가/미망의 창을 닦아놓았나-<새벽을 바라보며>전문 

 

 시인은 이제 보이지 않던 세계를 봄으로써, 미망(迷妄)의 눈을 열고 세계와 합일 되는 순간을 예감한다. 제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먹쿠슬낭처럼, 시의 그늘 속에 안주하는 자신의 존재가 결코 허망하지 않음은 예견한다. 어릴 시절부터 써 왔던 시의 열매들이 주머니 속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먹쿠슬낭

위미爲美 우친내, 어린 한때 몸 들었던 초가 담장 옆


먹쿠슬 열매 떨어질 때마다 주머니 가득 파도소리 주워 담던 그날처럼 하늘 가까이걸려 있는 한라산, 저 눈 녹으면 푸르르르

 

이파리 돋아나고 큰 바다 일어서서 오겠지


* ‘먹쿠슬낭’은 ‘멀구슬나무’의 제주 방언


 쉽게 정의 되지 않는 시의 본질을 독자적 언어와 세계를 품은 초월적 존재라고 한다면, 초월적 존재와 합일되려고 노력하는 김원욱의 시들은 적극적인 구원의 서정으로 고통을 승화시킴으로써, 미학적 가치를 획득한다. 시의 내부에서 뿜어져 나온 뜨거운 열기는 그가 억지로 시를 만들지 않는 진정한 시인임을 증명한다. 그는 이제 몸 밖으로 넘치는 울음으로 타자의 고통을 위무하려 한다. 그 진정성이 더 많은 열매를 맺기 바라는 마음이다. ‘몸속의 우주에서 몸 밖의 우주’ 확장되는 그의 시세계가 “이파리 돋아나고, 큰 바다 일어서듯” 어디에 가닿을지 다음 시집이 기다려지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