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력한 오후의 시학/ 이병헌 (문학평론가,대진대 교수)
누구라도 깊은 사연이 담긴 말, 하고 싶은 말을 쉽사리 꺼내지 못하고 그 결과 서로의 말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되고, 황폐해진 그의 뇌리에 문득 문득 유령의 출몰하는 느낌이 든다면 그 삶은 생기를 잃고 말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가 결핍을 노래하고 고통과 상처를 감싸온지 오래지만 요즘의 시들은 그러한 말조차도 드러내어 말하기를 기피하고 있는 느김이다. 많은 시인들이 총체적인 무력감에 빠진 듯하다. 그것은 부정과 불의, 인간성의 말살, 그로 인한 대참사와 같은 것으로 만 설명되진 않는다. 시인을 비롯한 많은 지각 있는 이들이 그만 기운을 잃고 살아가게 된데에는 언어가 제 기능을 말휘하지 못하게 된 것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책임있는 당국자가 자신이 한 말을 번복하는 것은 물론이고, 엉둥한 말이나 정반대의 의미를 지닌 말을 지속적으로 하여 그만 할 말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것이 그런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한 요즘의 시를 '무기력한 오후의 시'라고 부르고자 한다. 1930년대의 김기림은 지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허공에로 눈을 돌리게 하는 '대낮에 피로한 오후의 심리' 를벗어나려면 고전주의와 로맨티시즘 혹은 기술과 사상을 결합하여 총체성을 지님으로써 생기를 회복한' 오전의 시'를 서야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지당한 요구나 처방을 되풀이 할 계제가 아니다. 지금의 시와 시인은 말을 잊은 말, 말이 아닌 말, 신음이나 탄성과 같은 말을 통해서라도 내면의 욕구를 분출시킬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명확히 의미를 전달하는 말들보다도 이러한 비정상의 언어에 더욱 공감하게 된 세태를 인정하고 삶의 기본적인 것이 정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기나긴 인고의 시간을 감내해야 한다
- 전략
돌무더기 가슴 답답한 날이면 제주행 비행기를 탄다 하늘 더 멀어지기 전에 하늘 보다 더 멀리 가기 전에 바닷가 빈 집으로 돌아간다. 가슴 속 산담 헐어 잡초 무성한 밭을 일구고 밤바다에 어망을 던져두니 물 밖으로 나온 밤낙지처럼 눈이 맑아진다
정신을 육체의 노예로 만들었던* 서울을 도망치듯 벗어난 일이 그대 탓인가 되물어봐도 물결은 한결같은 문장에 밑줄을 칠 뿐, 별빛에도 눈동자에도 가없는 밀물, 널개 바위 위 갈매기 날개 아득해진다
사람을 꽃이라 부르는 일도 사람을 흉기라 여기는 일도 그때는 솔깃했으나 모든 비유는 낡아지는 법 내 스스로 산을 그대라 불렀고 바다를 그녀라 불렀으나 지금 나에게 그대도 없고 그녀도 없으니 스스로 젖은 적 없는 저, 산과 바다를 무슨 비유로 노래 할 것인가
죽은 귀를 깨우는 파도소리에 나는 다만 혀로 쓰는 붓질과 귀가 잣는 소음과 멀어지고 싶을 뿐 물결과 거래하는 나의 귀거래는 오늘을 말없이 건너는 일, 파랑이는 나를 견디는 일일 것이다
물결이 빠져나간 여는 이미 마른 슬픔, 썰물을 불러들이는 두 다리가 몇 尺 길어진다. 언제 올지 모르는 썰물,
그 바닷가에서 섬이 된 사람들을 오래 기다렸다
- 강영은, 「귀거래 (歸去來)」전문, 마고의 항아리 (현대시학사, 2015)
귀거래 (歸去來)의 화자는 서울을 벗어나 제주로 내려와 바닷가에 서 있지만 답답한 가슴이 저절로 풀리는 것 같지는 않다. '물밖으로 나온 밤낙지'처럼 눈이 맑아져 끝없이 밀려오는 밀물을 보며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갖게 된 것만 해도 다행이다. 산과 바다를 그는 한때 그대와 그녀로 바꿔 불렀으나 시효가 지났고 이제는 그것들을 새로운 비유, 새로운 이름으로 볼러주어야 한다. 이것은 화자의 고민이기도 하지만 바로 그것이 시인의 권능이기도 하다. 바닷가의 파도소리는 화자의 '죽은 귀'를 깨운다. 그러나 그는 '혀로 쓰는 붓질'이나 '귀로 잣는 소음'으로 비유된 모든 비본질적인 말들과 멀어지고 싶다. 제주 출신 강영은 시인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화자의 귀거래. 즉, 귀향은 말없이 오늘을 건너도 있지만 흔들리는 그 자신을 견디기 위한 행동이다. 섬이 된 사람들처럼 오래 견디면 '마른 슬픔'' 썰물' 로 표상된 시련도 지나갈 것이다.
-후략
이병헌1955년 서울 출생,고려대 국문과 동대학원국문과, 198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저서 「한국 현대비평의 문제」, 「내면의 열망」
『문학 청춘』 2015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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