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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머의 리뷰

없어지기와 변하기/황정산(시인, 문학평론가)

by 너머의 새 2019. 10. 6.

없어지기와 변하기/황정산(시인, 문학평론가)


 현대사회를 욕망의 시대라고들 한다.사람들의 욕망을 채울 상품은 점점 많아지고 거기에 따라 사람들의 욕망의 크기도 커져만 가고 있다. 하지만 욕망은 결핍을 그 이면으로 한다. 욕망이 커지고 그것을 만족시킬 대리물이 많아질수록 그에 따른 결핍은 또한 더 커져만 간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누구나 슬픔을 안고 산다. 욕망과의 괴리는 더 커지고 결핍은 더욱 큰 구멍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모두가 겪고 있는 과도한 열광과 우울은 모두 여기에 기인한다.

 종교마저 초월적 가치를 포기한 이 시대에 시는 이 욕망을 대하는 가장 비세속적인 형식이다. 욕망이면서 욕망이 아니고 실체이면서 실체가 아니고 자신의 말이면서 또한 자신의  말일 수 없는 언어를 통해 시인은 이 욕망을 마주하고 또한 그것의 빈 곳을 치유한다. 그 두가지 방식을 최근 발간된 두 시집을 통해 발견할 수 있다.

 강영은의 『마고의 항아리』는 없는 것에 대한 모색이며 또한 찬가이다. 없는 것은 우리에게 검은 구멍으로 남는다. 그것은 무엇인가로 채워야 할 것이고 가급적 남아있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없는 것이 없는 세상을 꿈꾼다. 하지만 그러한 세상은 결코 존재하지 않고 그럴수록 없는 구멍으로 더욱 큰 것으로 남는다. 강영은 시인은 그 없는 것을 떠올리고 그것에 마주하고자 한다.


수 천 번 생각을 저울질해도 

그 값을 셈할 수 없는 

나는 펜 속에 뿔을 감춘 손을 생각 한다.

축생의 몸뚱어리를 무기 삼아 ​

詩의 정수리를 치받아 온 펜촉은

닳고 닳은 뿔,

네모난 원고지와 각축 벌일 때마다 

29 억 5천만 개의 글자를 눕혀 온 ​

뿔 값은 0이다.

​                  -「각축의 재구성」 부분


 시가 제 값을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고 있는 작품으로 읽히기도 하지만 시인은 그 값이 없다는 것에 더 주목하고 있다. 시의 값은 자본의 질서에서 매겨지는 상품의 가격을 거부하는 것이고 그럴 때 그 각고의 노력에 감춰진 자신의 손의 가치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상품으로 존재하지 않고 세상에 쓰임새 있는 물건으로 존재하지 않을 때 빛나는 시의 가치, 바로 시인은 그 가치를 위해 각축을 하듯 원고지와 씨름을 하고 있다.

 이렇듯 강영은 시인의 시들에서는 없는 것 없어지는 것들이 다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다음의 시를 보자.


나는 발의 행적을 기록합니다

발바닥에 달라붙어 한 문장을 기록하지만

한 행만 받아 적거나 두 행을 동시에 필사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중략)


두 다리가 뜨거워진 나를 누군가 젓가락으로 집어 올립니다

마지막 목숨까지 태우려는 당신은 속독을 좋아 합니까

붉은 갈기와 황금빛 눈을 가진 메추리새끼 같은

한 장의 종이, 백 년 동안 성장하거나 진화한 적이 없는

나는 당신이 방금 말한 계단입니다

                            -「소지」부분


 소지는 없어지는데서 의미가 있는 존재이다. 남아서 존재를 드러내려 하지 않고 끝까지 남아 기록으로서의 가치를 인정 받으려고 하지 않는 존재이다. 하지만 그것에는 다른 사물들에게 없는 목숨과 영혼이 들어 있다. 남아 있지 않고 항상 사라지는 것으로 존재하지만 성장하고 진화하는 계단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귀신이 발목을 잡아당긴다는 백록담에서 마고*의 항아리를 본다. 물이 출렁거리는 솥단지, 수천수만 개의 별빛이 쏟아져도 고인 물이 무쇠처럼 뜨거워지지 않는 연유가 벌써 내 속에 들어온다 귀를 열면 청적색淸笛色의 바람, 맑은 피리 같은 바람 하나 들고 등에 지고 온 바닷가 마을은 멀다  

                           -「마고의 항아리」


 마고는 제주도 토속 신앙에서 산과 강을 만든 여신의 이름이다. 바로 그 산과 강은 빈 곳에서 만들어졌다. 그런데 '마고'는 '항아리' 이기도 하고 '솥단지' 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꽉 차 있지만 언제나 흘러가고 마는 물은 담은 텅빈 백록담이기도 하고 또, 제주도를 있게한'바람'이기도 하다, 그것은 없는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시인아 꿈꾸고 또 이 시집을 통해 이루고 있는 세계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한다.


                                                         『 시와 사람』 2015년 가을호


황정산 1994년 『창작과 비평』으로 평론 시작, 2002년 『정신과 표현』정신과 표현으로 시 발표, 저서/『쉽게 쓴 문학의 이해』, 『주변에서 글 쓰기』 등 현재 대전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