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單語)의 세계 /강영은
늦은 눈 내리는 3월, 눈보라를 지나가는 감정이 있다 몰려드는 눈갈기 손으로 털며 소복소복 쌓이는 눈을 밟으며 눈보다 빠르게 지나가는 표정이 있다
대숲에 드는 눈설레처럼 흰 여백 채우는 발자국 소리
돌담 둘러친 동백숲에선 붉게 핀 애기 동백 뚝뚝, 모가지를 떨구는데 가야 할 먼 곳 있다는 듯 죽음을 지나가는 형식이 있다
그리움은 죽음보다 더 먼 곳에 놓여있다고 오늘을 지나가는 저 사람,
심장이 녹기 전에 눈 속에 묻은 발목 지나야 한다 3월에 태어난 눈사람처럼 비유(比喩)의 세계를 지나야 한다
사람 닮은 한 덩이 돌덩어리로 굳어질까 봐 눈사람은 우두커니 서서 울고 있는데 동백꽃 지는 밤을 지나가는 목숨이 있다
말 걸지 말아줘, 나는 지금 햇빛과 사귀는 중야, 불안의 울타리에도 꽃은 핀다고 눈물 고인 바닥에 돋아난 새싹!
백지에 찍어놓은 마침표처럼 눈은 그쳤는데 내린 눈 만큼 겨울을 지난 네가 '나'였다 눈사람을 지나간 ‘최소의 자립형식’이었다
『문학과 의식』 2022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