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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머의 새

지슬

by 너머의 새 2023. 9. 20.

지슬/강영은

 

 

나는 드디어

말상대를 고안해냈다

거기 누구 없소? 소리칠 때

누구도 들을 수 없는 나밖에 들을 수 없는

목소리를 만들어냈다

내 귀의 바깥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내가 섬일 때

날다가 지친 갈매기들이 섬에 집중할 때

갈참나무 잎사귀처럼 침몰하는 귀가

저절로 닿는 심연, 그 아득한 깊이에서 들려오는

존재의 목소리

그것이 설령,

내 몸의 줄기에서 뻗어나간 것일지라도

놀란 흙 밖으로 튀어나온 그것을

나는 지슬*이라 불렀다

그럴 때 나는

불타오르는 산이고 쏟아지는 빗줄기이고 숲을 뒤덮는 바람이고 계곡에 넘쳐 흐르는 물

 

나는 드디어

나의 고독과 대화하는 나를 가지게 되었다

나의 예언은 어디에서 오는지

나의 방언은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마침내

감옥이고 차가운 별이 되고 마는

나의 독백을

대화체로 바꾸어주는 시(詩)를 가지게 되었다

흙 무덤에서 파낸 그것을

나는 지슬이라 불렀다

 

*지슬 감자를 뜻하는 제주어

『현대시』 2022년 10월호 ‘현대시가 선정한 이달의 시인’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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