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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머의 신작

백로전미발白露前未發*

by 너머의 새 2024. 12. 22.

백로전미발白露前未發*/ 강영은

 

 

난데없이 부는 바람에

강아지풀이 화분을 벗어나려고 발버둥 친다.

귀로 듣는 이야기는 모두 아픈 것이어서

귀를 버리니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는 것일까?

명줄이 끊어지는 강아지를 품에 안고

병원으로 달려가던 날처럼

낯설지만 낯설지만은 않은 풍경.

전쟁과 폭풍, 가짜뉴스 같은

비명은 비명을 모르고 슬픔은 슬픔을 모르고

초록이 친구이길 바랐으나

초록을 초록으로 마주하기엔 절벽 같은 시간

귀가 남긴 풍경 속에서 돌아오지 않는 당신, 다시 볼 수 없는 당신을

여름이라 불러도 되나,

생사를 알 수 없는 계절 속에

나를 세워두고 처서 지난다.​

갓 태어난 생명이 삶과 죽음의 테두리를 도는 이 땅은

계절이 무용(無用)한 세계

이중 고기압과 열대야에 짓눌렸어도

비의(比擬)를 알 수 없는 소슬바람 분다고

국경도 지명도 버린

모든 눈동자에 이슬 맺힌다고

패지 못한 벼 이삭처럼

풀잎 끝에 매달려 아린 가슴 여며보는 밤,​

강아지풀 같은 내 마음에도

휜 이슬 내리나 보다.

*‘백로까지 패지 못한 벼는 더 크지 못 한다’는 제주도 속담

『시와 소금』 2024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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