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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머의 리뷰

상상력으로 빚은 섬의 정체성 - 신화 그리고 전설 / 김효선

by 너머의 새 2025. 6. 14.

 

 

상상력으로 빚은 섬의 정체성 - 신화 그리고 전설 / 김효선

 

 

이집트 나일강 하류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농사를 가르쳐 준 이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오시리스. 그에게는 아내 이시스가 있었는데 그의 누이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아우이면서 적대자였던 세트가 오시리스를 죽여 바다에 던져버린다. 이시스는 오시리스를 찾아 미라로 만들었으나 다시 세트가 빼앗아 여러 토막으로 잘라 땅 위에 뿌린다. 이시스는 다시 그 토막들을 하나하나 찾아내 맞추자 오시리스가 부활해 불사신이 되었다. 이 이야기는 바로 오시리스 신화다. 오시리스는 생명을 부여하여 땅을 기름지게 하는 나일강 그 자체이며 그의 아내 이시스는 씨를 받아들이는 이집트의 대지를 상징한다. 오시리스 신화는 이집트가 다른 지역의 침략을 받지 않는 폐쇄적 환경에서 영혼불멸사상과 부활사상을 꿈꾸며 나타난 결과다.

 

이처럼 신화는 인류문명의 시작과 함께 자연환경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유목 생활에서 정착 생활로 이어지고 도시가 생겨나면서 사람들은 거친 자연으로부터 삶을 유지하고 지켜나갈 힘이 필요했다. 그 힘은 나약한 인간을 통합하고 보살피는 신적인 존재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통치자는 인간과 태생부터 달라야 한다. 그래야 나약한 인간세계를 지켜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 인간은 신이라는 존재자를 내세워 강력한 믿음을 부여하며 문명을 지켜내려 했다. 따라서 신은 곧 자연환경이며 종교이며 삶의 모든 것이었다. 물활적 상상력으로 빚은 신을 통해 도시가 유지되고 평화롭고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다고 믿었다.

 

섬 제주는 한국이라는 나라 안에서도 외따로 떨어져 있다. 아무도 이곳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내버려 두다시피 한 황무지였다. 단절된 시․공간으로 정체성에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육지와 고립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그들만의 집단문화가 필요해졌다. 그렇게 자연성과 집단성을 토대로 특정 민족의 생활 정서와 풍속을 담은 것이 설화다. 설화는 대개 신화, 전설, 민담으로 구분된다. ‘일반적으로 신화는 신비함과 초월성을 토대로 천지창조, 홍수, 사랑, 동물의 등장, 그리고 죽음 등의 주제를 통해 인류 공통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신화는 지역, 민족, 그리고 국가별로 내용적 차이가 존재하지만, 현실의 고통, 시련, 그리고 어려움의 극복과 미래의 희망적인 메시지 제공의 측면에서 유사한 면이 있다.’(강준수, 「제주 창조신화를 통한 인류원형의 여신문화 분석」, 󰡔문학과 종교󰡕) 육지와 동떨어져 교류가 자유롭지 않은 섬에서 그들을 지켜주고 보호해줄 신적인 존재가 절실히 필요했다.

 

섬(제주)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신화로 창조의 신 설문대 할망이 있다. 선문대 할망이라고도 불린다. 설문대 할망을 빼놓고 섬을 이야기할 수 없을 만큼 설문대에 관한 이야기는 제주도 전 지역에 골고루 퍼져 있다. 그만큼 오래된 신화이며 보편성을 지닌 신화로 영향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왜 제주는 설문대 할망을 창조의 신이며 숭배의 대상으로 여겼을까. 인류가 등장한 고대 시기부터 인간은 만물의 생장을 관장하는 조물주가 있다고 믿어왔다. 조물주가 있지 않고서는 자연이 하는 일을 설명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연환경은 농경의 삶을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생의 일차적 욕구를 담당하고 있으므로. 따라서 만물과 공생하는 삶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이며 근본이라 생각했다. 하물며 섬이라는 혹독한 환경에 놓인 사람들은 어떠했을까. 자연은 곧 삶의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으로 이어지는 수단으로 작용한다. 그 자연을 창조한 조물주를 신으로 섬기고 제사를 지냄으로써 섬의 정체성을 찾으려 했던 것은 아닐까. 황폐한 섬에서 살아남고자 모성으로 끌어안은 설문대 할망 신화처럼 말이다.

 

1

(...중략)

설문대할망은 치마폭에 흙을 담아

제주섬 한가운데 산 만들기 시작했네

치맛자락 터진 구멍으로 졸졸졸

흘러내린 흙 모아져 여기저기

오망조망 오름들 생겼네

허허벌에 높은 산 만들어 세우자

설문대 할망은 민둥산이여 생각에 잠그고

깊고 넓은 숲 만들기로 작정하였네

허리엔 지나던 구름 무심무심 걸리고

하늘 이고 망망한 바다 지켜보며

꿈꾸는 이 음성이여 천둥 번개 이마에 걸고

한 가닥 설문대할망은 꿈을 꾸었네

2

깊이와 넓이 짓는 것이 바다만이겠느냐

한라산이여 만둥산 만들 순 없었네

설문대할망은 들판에 금잔디 깔고 파릇파릇

삼동낭, 세비낭, 도체비낭도 파랗게

꽝꽝낭, 소낭, 멩게낭도 듬성듬성

층층이 깊이 재어 굴거리낭, 틀낭

넓이를 재어 족낭, 자귀낭,소리낭,동박낭

노가리,조로기,구상낭 푸르르르

높낮이 만들어 일천칠백이 넘는

나무와 풀 심고 보니 아름다워라

백록담엔 신선들 백록 타고 와서

신선놀이 즐겁게 낮잠자기 할 만하였네

설문대할망은 푸나무들 심고 나니

심심하였네 산바람 만들어

가지마다 걸어놓고

노래하는 새들 모았네

휘파람새 호오개굑 호오개굑 노래하게 하자

호오개굑 호오개굑 동박새도 날아들고

동박꽃이 온 섬을 하얗게 빨갛게 물들여놨네

(...중략)

제주 바다 건너면 어떤 세상 있을까

가난한 섬사람들 무명 한 통이 모자라

모으고 모으고 섬 안에 있는 무명 다 모아도

마침내 설문대할망 솟곳 못 지어냈네

제주 바다 건너가는 연륙의 꿈은 산산산

가난하게 깨어져 절해고도

제주섬은 영원히 섬으로 남아

(...중략)

- 문충성, 「설문대할망」부분

 

설문대 할망의 신화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시이다. 섬(제주) 탄생 기원설에 의하면 설문대 할망은 옥황상제의 딸로 벌을 받아 지상으로 내려올 때 치마폭에 담긴 흙이 쏟아져 내리면서 섬이 탄생했다는 이야기가 보편적이다. 이 시는 설문대 할망이 섬을 어떤 심정으로 만들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애정을 담아 섬에서 조화롭게 살아가기를 기원하고 있다. 자연의 위대함과 동시에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삶의 방식과도 닿아 있다.

인간은 생로병사를 겪는 유한의 생명체다. 몸으로 느끼고 몸으로 일을 하며 사는 존재다. 생명이 살아가기 위한 환경은 ‘휘파람새 호오개굑 호오개굑 노래하게 하자/호오개굑 호오개굑 동박새도 날아들고/동박꽃이 온 섬을 하얗게 빨갛게 물들여’ 놓듯 평화롭고 여유로운 풍경이다. 비록 혹독한 생활이지만 그 안에서도 인간은 자연과 조화로운 삶을 추구한다. 그런 삶이야말로 신과 인간이 그리는 이상향이다. 설문대 할망인 여성을 창조자로 내세운 것 역시 생명을 잉태하고 생명을 키우는 모성적 본능의 일환이라 볼 수 있다. 섬세하면서 부드러운 성정으로 만물을 어루만져야 평화로움을 추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제주의 오름이 완만하고 부드러운 곡선의 형태를 띠고 있어 여성적이라는 말도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한라산에서 뿜어져 나온 흙이 곧 오름이 되었다는 설에서 비롯된 말이다. 섬 그 자체가 설문대 할망이며 모든 생명을 관장한다는 이야기다. 다른 시에서도 설문대 할망의 신화적 요소는 주로 여성성과 창조성과 관련되어 나타난다.

 

(...중략)

 

내가 빚은 골짜기와 숲을 저만치 밀어 두고

돌담 구멍으로 하늘의 발걸음이 드나들어

둥근 세숫물을 받아 얼굴을 씻고

 

(...중략)

 

해가 마를 동안 설핏 잠이 들었다지 푸른 사슴 흰 사슴 검은 사슴들이 마구 뛰어다니는 바 람에 파도까지 엉덩이를 들썩거렸대 둥근 포말을 보석처럼 돌기둥에 턱 걸어놓고 잠결에 몸 을 뒤척였더니 산꼭대기에 엉덩이만 한 웅덩이가 생겼다지 발가락까지 꼼지락거리는 바람에 섬에 걸쳐 놓은 심장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는데

-김효선, 「영실靈室」부분(시집 󰡔시골시인-J」)

 

빨래를 하려고 일어났다가 오랜만에 쏟았다

내가 하도 울어서 바다가 생겼다

멍든 물을 뒤지다가 바람을 쓰러뜨렸다

파도도 내가 그랬다

-이원하, 「누워서 등으로 섬을 만지는 시간」부분(󰡔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시 「영실靈室」은 설문대 할망을 모티프로 쓴 시다. 섬을 대상으로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가시적 주체가 설문대 할망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섬은 마치 뿌리가 없는 바다에 발을 두고 있는 것처럼 정체성이 모호하다. 그런 모호함이 어쩌면 상상력의 원천이 되지 않았을까. 설문대 할망은 시의 화자이며 상상력의 모티프다. 섬이라는 폐쇄와 고립의 공간을 자유와 이상향의 공간으로 만들고자 노력했던 인물로 그려진다. 비록 설문대 할망은 섬사람들을 위해 육지와 연결하는 다리를 놓아준다는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런 안타까운 서사마저 섬을 이상과 신비로운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원하 시인의 시 첫 연에서도 설문대 할망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물론 설문대 할망을 모티프로 쓴 시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빨래’와 ‘바다’는 설문대 할망과 꽤 친숙한 신화적 이미지로 전달된다. ‘시적 이미지는 하나의 물질을 갖는다’(가스통 바슐라르, 󰡔물과 꿈󰡕, p.9.)는 말을 바꾸어 말하면 하나의 물질은 시적 이미지를 갖는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즉 ‘물은 인간의 사고 가운데 가장 큰 가치 부여 작용(valorisation)의 하나, 즉 순수성에 의한 가치 부여 작용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섬에서 ‘물’은 아주 중요한 삶의 가치다. 삶의 수단이며 원동력이며 때론 가장 슬픈 비애의 물질이기도 하다. 생명체는 물이 없으면 살아가지 못하는 비극적 존재다. 끊임없이 돌고 돌아 다시 물이 되어 흐르고 흘러 무한으로 이어지는지 생명의 근원이다. 섬은 물성이 강한 환경에 놓여 있다. 물성의 반대에 숲을 이룬 산이 존재한다. 섬사람들은 그 모든 조화를 꿈꾸며 설문대 할망을 창조했는지도 모른다. 오시리스처럼 창조의 신이 설문대 할망이라면 그의 아내 이시스의 역할로 농사의 신 ‘자청비’가 있다.

 

침묵이어서 거침없는 필체가 뜰로 번집니다. 적막한 한낮 그리운 눈알들이 자라고 있다고, 나의 눈먼 그림자에 당신을 섞습니다. 내게서 씻겨나간 당신의 눈웃음은 얼마나 차가워졌을 까요?

 

숲이 목을 늘려 동창을 드나들면 베틀에 머리를 누인 산마루의 몸빛이 서늘합니다. 비단으 로 바람을 짓고 한 줌 씨앗 같은 숨소리를 심습니다. 책을 접고 눕는 눈향나무가 편애하는 방향으로 빈 배를 밀며 간 이를 알고 있습니다.

 

이 세계를 견딜 수 없어 풍경이 됩니다. 나는 당신의 이물감. 침묵이 은어 떼의 등줄기 를 숨길 때도, 빗방울이 여름곡식 속으로 스밀 때도 늘 밤을 품었습니다.

 

실핏줄로 한 폭의 삽화를 그립니다. 소년을 오르는 바람의 등을 본 것도 같습니다. 등 굽은 잔물결, 수로를 따라 흘러갈 수 없는 것들만 하오를 나고 있습니다. 그늘에 든 이 야기에 연둣빛 혀가 돋고, 잠시 낮달을 손에 넣어봅니다. 서녘에 이르는 것들은 모두 맨 발입니다.

 

낮 안으로 담장이 지고 숲이 노을로 어두워집니다. 하나의 등불은 수면 위로 내걸리고 하나의 등불은 수면 밑으로 내려갑니다. 물뱀에게 혀를 물린 물의 저녁은 달의 모서리로 부 풀어 오릅니다.

 

나는 사부시 말라버린 그늘. 빈손을 헐어 별들을 짜다 보면 어슬녘 허기는 처마 밑 어둠 의 무늬가 됩니다. 밤과 달이 등을 돌립니다. 어둠을 사이에 두고 당신과 내가 투명해집 니다. 실뱀이 소리 없이 울고 이제 회유어의 무리를 기다립니다.

 

*자청비 : 제주 설화 속 사랑과 농경의 여신

- 최형심, 「자청비」전문(󰡔시와미학󰡕2013, 봄호)

 

서사는 어떤 목적과 방향에 따라 지향점을 갖는다. 거꾸로 목적과 방향성을 지향하기 위해 서사를 만들기도 한다. 이 시에서 자연물 혹은 사물들은 저마다의 성질과 특성을 드러내며 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필체가 뜰로 번진다’거나 ‘숲이 목을 늘’이고 ‘베틀에 머리를 누인 산마루’, ‘씨앗 같은 숨소리’, ‘책을 접고 눕는 눈향나무’, ‘낮 안으로 담장이 지고’ 등등 전체적으로 물환론적 이미지들은 방향성을 가지고 나열되어 있다.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현상들이지만 어쩐지 낮은음자리표처럼 한 옥타브 내린 저음의 목소리들이다. 낮게 깔린 안개처럼 자욱하게 번진 암울한 분위기마저 감돈다. 시인에게 ‘자청비’는 어떤 의미일까.

 

이 시는 제목이 없었더라면 ‘자청비’를 연상하기 쉽지 않다. 자청비와의 연관성을 찾아볼 수 있는 문장은 ‘한 줌 씨앗’, ‘빗방울이 여름곡식 속으로’ 정도이다. 농사의 신인 ‘자청비’의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시적 이미지로 새롭게 승화시킨 작품이라 생각된다. 농경사회를 지나 현대에 이르면서 자청비의 흔적은 그저 쓸쓸한 풍경에 섞인 눈빛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목숨 걸고 사랑을 찾아 농사의 신이 되기까지의 험난한 과정은 온데간데없이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 씁쓸함처럼. 단순히 생활의 변화를 떠나 우리 안에 고여있던 옛사람들의 간절함이 세계 밖으로 밀려난 쓸쓸함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절실하게 지나간 길은 있으나 그 길을 쓰다듬고 보듬는 자는 얼마나 될까.

 

그래서일까. 시 전체를 지배하는 이미지는 주로 ‘침묵’, ‘눈먼’, ‘서늘한’, ‘차가워졌을까?’, ‘견딜 수 없어’, ‘이물감’, ‘그늘’, ‘맨발’, ‘어두워’, ‘말라버린’, ‘허기’, ‘소리 없이 울고’ 등 대부분 어휘들이 하강하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자청비가 쏟은 열정과 애정의 시간은 점점 빛을 잃어간다. 씨를 뿌리고 곡식이 풍성하게 익어가도록 정성을 쏟은 자청비는 이 땅의 어머니와도 비슷하다. 자식을 잉태하고 기르고 독립해서 떠나버린 뒤에 밀려오는 허무감. 빈둥지증후군이라고도 불리는, 그래서 이 시의 화자 시점은 빈 들을 바라보는 심정으로 서 있다. 부모의 손길이 필요 없어 떠난 자식들처럼 자청비 역시 ‘이 세계는 견딜 수 없어 풍경이’ 되어버린 모습이다. 이제 세상은 신의 손길이 필요 없어진 걸까. 과학이 그 자리를 다 채워줄 수 있을까. 자청비는 절대자의 위치보다는 이 세계에 스미고 섞여들어 가난한 사람 없이 평화로운 삶을 추구하기를 바라는 존재였다. 그러나 점점 인심은 각박해지고 자청비가 꿈꾸던 세계로부터 멀어져간다. 신은 이제 ‘어둠을 사이에 두고 당신과 내가 투명해’지면서 ‘회유어의 무리를 기다’리는 일밖에는 달리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어쩌면 이 시는 자청비를 통해 우리 곁을 떠나가는 신화적 정서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내려 했던 것은 아닐까.

 

신화에 비해 ‘전설은, 시대․장소․인물․증거물 등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고유명사로 나타난다는 점이 그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중략) 전설을 사실이라고 믿는 것은 그 내용에 사실 그 대표인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 전체가 사실 그대로는 아니되, 어느 부분만은 사실이’(현용준,󰡔제주도 전설󰡕, 서문당)라는 믿음 때문이다. 섬은 자연을 토대로 생업을 이어가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점점 경제가 발전하면서 문화가치 창출이 중요해지는 시기가 도래한다. 도시적 환경과 복잡한 사회에서 겪는 스트레스로 자연 회귀 현상이 빚어진 것이다. 자신이 살던 공간을 떠나 낯선 곳으로 가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숨통이 트였다. 자연경관이 새로운 경제가치로 이어진 셈이다. 그렇게 제주는 섬이라는 불모지에서 꼭 가봐야 할 관광지로 떠올랐다. 하지만 단순히 아름다운 경치와 공간에 기대기에는 연속성이 떨어진다. 관광명소라고 불리는 곳은 지형적 아름다움과 동시에 서사가 존재할 때 그 가치가 새롭게 형성된다. 서귀포시 남원읍에 위치한 쇠소깍도 그중 하나다.

 

소가 드러누운 것처럼 각이 뚜렷한 너를 바라보는

내 얼굴의 남쪽은 날마다 흔들린다

 

창을 열면 그리운 남쪽,

살청빛 물결을 건너는 것을 남쪽의

남쪽이라 부른다면

 

네 발목에 주저앉아 무서워,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무서움보다 깊은 색, 살이 녹아내린

남쪽은 건널 수 없다

 

눈이 내리면 너도 두 손을 가리고 울겠지

눈 내리는 날의 너를 생각하다가

북쪽도 남쪽도 아닌 가슴팍에 글썽이는 눈을 묻은

젊은 남자의 비애를 떠올린다

 

흑해의 지류 같은 여자를 건너는 것은

신분이 다른 북쪽의 일,

 

구실잣밤나무 발목 아래 고인 너는 따뜻해서

용천수가 솟아나온 너는 더 따뜻해서

비루한 아랫도리, 아랫도리로만 흐르는 물의 노래

흘러간 노래로 반짝이는 물의 살결을

무어라 불러야 하나

 

아직도 검푸른 혈흔이 남아 있는 마음이

무르팍에 이르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지독한 사랑처럼

먼 바다로 떠나가는 남쪽

 

누구에게나 전설은 있지, 중얼거려 보는

내 얼굴의 남쪽

 

*쇠소깍: 서귀포 효돈천 하구에 있는 沼.

- 강영은, 「쇠소깍*, 남쪽」전문(시집󰡔최초의 그늘󰡕)

 

전설은 왜 비극으로 점철된 하나의 메타포일까. 어쩌면 비극적 모티프가 전설로 성립되는 것은 아닐까. ‘쇠소깍’은 시에 나온 것처럼 ‘소가 드러누운’ 형상의 물웅덩이 ‘沼(소)’다. 실제로 짙은 연녹색의 물빛을 띠고 있는데 시인은 이 물빛을 ‘살청빛’이라는 자신만의 색을 창조해낸다. 그 빛은 ‘무서움보다 깊은 색, 살이 녹아내린’ 색으로 남녀 간의 비극적인 사랑을 극대화하기에 충분하다. ‘신분이 다른’ 젊은 남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고스란히 녹아 흐르는 쇠소깍. 전설은 단순한 장소마저 신비로운 공간으로 바꿔놓는다. 비극적 서사의 무대로‘쇠소깍’이라는 장소는 선택한 것이다. 특히 이 시에서 ‘남쪽’은 여덟 번이나 등장한다. ‘남쪽’은 ‘날마다 흔들’리는 ‘살청빛 물결’이며 ‘건널 수 없’는 ‘먼바다로 떠나가’는 ‘내 얼굴’이다. 그러니까 ‘남쪽’은 화자의 시선이 머무는 또 하나의 장소다. 그러나 그곳은 갈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비극적 결말이 이루어진 곳이기에. 그러나 ‘쇠소깍’에서 흐르는 물은 자꾸만 그곳으로 나를 떠민다. 아직 이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고. 비극이든 희극이든 ‘물’이라는 시간을 부여하게 되면 끊임없이 돌고 도는 서사로 이어진다. 마치 우리의 이야기인 것처럼. ‘누구에게나 전설’ 하나쯤 가지고 있는 것처럼. 물리적 공간은 이루지 못한 사랑이 남긴 또 하나의 장소로 기억되면서 마치 한 편의 서사(극)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그것이 바로 공간이 장소성을 획득하는 순간일 것이다.

 

인간은 시․공간을 떠나 살 수 없는 존재다. 어떤 경험이나 서사가 없는 공간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빠르게 지워진다.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문학에서 시공간은 실제적 이미지를 표방하며 구체성을 획득한다. 독자는 눈에 보이는 것처럼 실감하며 간접체험을 할 수 있다. ‘전설은 오랜 시간에 걸쳐 전해오는 통시간적(通時間的)인 존재로서 전달 내용, 전달자, 전달 방식, 수용자, 그리고 변화성을 포함하는 개념인데 신성함보다는 진실성을 토대로 제한된 시공간을 갖는다. 전설은 증거물 성격상 일반적으로 지역적 범위를 지니며, 특정 지역을 토대로 해당 지역주민들에게 지역적 유대감이나 애향심을 지니도록’(김태곤, 󰡔한국구비문학개론󰡕, 서울:민속원, 1996.)하는 특성이 있다. 다음 시에서 전설적 공간이 어떻게 지역적 유대감과 애향심으로 이어지는지 알 수 있다.

 

이승의 끝이 저승의 시작이라면

여기서부터 경계가 모호해진다

모호해서 좋았다 나는

 

들키지 않았다

 

그는 서쪽으로 떠났다

푸른달이 뜨는 곳이라 했다

 

경계에 뜬 달은 삭과 망이었다

 

그는 망에 있었고 나는 삭에 있었다

내가 망에 있었고 그는 삭에 있었다

 

내 눈길이 머무르면 그믐이라 부르고

그대 눈길이 머무르면 초승이라 불렀다

 

가끔은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경계가

선명해졌다

 

삭고 망이 많았던 큰어머니는 삭망제朔望祭를 했다

제祭가 끝날 때마다

이승은 저승 쪽으로 밀려들어 가고

저승은 이승 쪽으로 밀려들어 왔다

 

돌아보지 마라 경계가 경고가 되는

용궁올레 입구로

영혼 돌아오는 소리

낯선 생이 자꾸 덧씌워졌다

칼선도리라 불렀다

모호한 경계와 경고 사이 세워 놓은

바위 하나

 

그대 눈빛이 오래 머물다 갔다

 

나는 먼 삭과 망에 그대를 두고 왔다

- 강영란, 「칼선도리」전문(시집󰡔오래 기다려도 레몬은 달콤해지지 않고󰡕)

 

이 시 역시 서귀포시 동쪽 표선면 신산리 해변에 솟아 있는 ‘칼선도리 바위’에 전해오는 전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야기는 옛날 상군 해녀 송씨가 이곳에서 자주 물질을 했는데 하루는 어마어마하게 큰 전복이 보여 자맥질해 들어갔다가 물길이 깊어 정신을 잃었는데 문득 정신을 차리니 별천지 같은 용궁이 나타났다. 그곳은 남해용궁으로 인간이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다. 해녀 송씨는 사정을 말하고 절대로 뒤돌아보지 말라는 다짐을 받고 떠난다. 이 일로 남해용궁으로 인간들이 두 번 다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은 것이 칼선도리 바위라고 전해지고 있다.

 

한평생 바다에 의지하며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에게 바다는 이승과 저승을 한몸에 담고 있는 공간이다. 그렇게 ‘이승의 끝이 저승의 시작’으로 이어진다. 그 두 곳의 ‘경계에 뜬 달은 삭과 망이’다. 삭(朔)은 매월 음력 초하루를 뜻하고 망(望)은 보름을 이른다. 시작과 끝이 아닌 중간지점, 그 애매모호 한 경계에서 ‘낯선 생이 자꾸 덧씌워’다. ‘이승은 저승 쪽으로’, ‘저승은 이승 쪽으로’ 밀려갔다 밀려오며 서로의 몸을 섞는다. 저승은 단순히 상상의 공간이 아니다. 이승이 있기에 저승도 존재한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공간이다. 시는 현재와 과거 혹은 먼 전생까지 드나듦을 반복한다. 물론 그 중심엔 ‘칼선도리’ 바위 전설이 자리한다.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 지상과 바닷속이라는 경계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삶을 이어가는 존재라는 이유다. 이 시에 등장하는 ‘삭’과 ‘망’은 이승과 저승으로 연결된 보이지 않는 문이다. 전설은 그 경계의 중심에서 상상력을 발휘한다. 한 발만 넘어가면 다시 이승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세계. 해녀는 그런 경계의 아슬함을 넘나드는 삶으로 생을 이어간다. 두려움은 혼자가 아닌 여럿이 헤쳐나갈 때 힘이 생긴다. 힘든 삶이 서로를 더욱 돈독하게 엮어주고 화합하며 유대감을 형성해 나갔을 것이다. 유대감은 결국 자신들이 사는 곳에 대한 애향심으로 이어지게 된다.

 

전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지만 결국 인간이라는 슬픈 짐승으로 살아내기 위한 운명적 상상력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 돌아와 섬사람들의 중심에 한라산 백록담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한라산은 신선이 놀던 산으로 알려져 있다. ‘신선들이 흰 사슴을 타고 여기저기 절경을 구경하고 정상에 있는 백록담에 이르러 그 맑은 물을 사슴에게 먹였다. 그래서 백록담(白鹿潭)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현용준,󰡔제주도 전설󰡕, 서문당)라고 알려진다. 물론 전설적인 이야기지만 한라산은 그 자체로 신비로움과 상상력을 품은 장소다. 정지용 시인의 「백록담」은 전설이나 신화를 모티프로 하지 않았지만, 대상 그 자체만으로도 신성한 기운이 감도는 상상력이 돋보인다.

 

1

絶頂에 가까울수록 뻑국채 꽃 키가 점점 消耗된다. 한마루 오르면 허리가 슬어지고 다시 한 마루 우에서 목아지가 없고 나종에는 얼골만 갸옷 내다본다. 花紋처럼 版박힌다. 바람이 차 기가 咸鏡道 끝과 맞서는 데서 뻑국채 키는 아조 없어지고도 八月 한철엔 흩어진 星辰처럼 爛漫하다. 山그림자 어둑어둑하면 그러지 않어도 뻑국채 꽃밭에서 별들이 켜든다. 제자리에 서 별이 옮긴다. 나는 여기서 기진했다.

 

2

巖古蘭, 丸藥 같이 어여쁜 열매로 목을 축이고 살어 일어섰다.

 

3

白樺 옆에서 白樺가 髑髏가 되기까지 산다. 내가 죽어 白樺처럼 흴것이 숭없지 않다.

 

4

鬼神도 쓸쓸하여 살지 않는 한모롱이, 도체비꽃이 낮에도 혼자 무서워 파랗게 질린다.

 

5

바야흐로 海拔六千呎우에서 마소가 사람을 대수롭게 아니녀기고 산다. 말이 말끼리 소가 소 끼리, 망아지가 어미소를 송아지가 어미말을 따르다가 이내 헤여진다.

 

6

첫새끼를 낳노라고 암소가 몹시 혼이 났다. 얼결에 山길 百里를 돌아 西歸浦로 달어났다. 물도 마르기 전에 어미를 여힌 송아지는 움매-움매-울었다. 말을 보고도 登山客을 보고도 마고 매달렸다. 우리 새끼들도 毛色이 다른 어미한틔 맡길것을 나는 울었다.

 

7

風蘭이 풍기는 香氣, 꾀꼬리 서로 부르는 소리, 濟州회파람새 회파람부는 소리, 돌에 물이 따로 굴으는 소리, 먼 데서 바다가 구길 때 솨-솨-솔소리, 물푸레 동백 떡갈나무속에서 나 는 길을 잘못 들었다가 다시 측넌출 긔여간 흰돌바기 고부랑길로 나섰다. 문득 마조친 아롱 점말이 避하지 않는다.

 

8

고비 고사리 더덕순 도리지꽃 취 삭갓나물 대풀 石茸 별과 같은 방울을 달은 高山植物을 색 이며 醉하며 자며 한다. 白鹿潭 조찰한 물을 그리여 山脈우에서 짓는 行列이 구름보다 莊嚴 하다. 소나기 놋낫 맞으며 무지개에 말리우며 궁둥이에 꽃물 익여 붙인채로 살이 붓는다.

 

9

가재도 긔지 않는 白鹿潭 푸른 물에 하눌이 돈다. 不具에 가깝도록 고단한 나의 다리를 돌 아 소가 갔다. 좇겨온 실구름 一抹에도 白鹿潭은 흐리운다. 나의 얼골에 한나잘 포긴 白鹿 潭은 쓸쓸하다. 나는 깨다 졸다 祈禱조차 잊었더니라.

-정지용, 「백록담」 전문

 

「백록담」은 1939년《문장》3호에 처음 발표한 작품이다. 이 시는 정확한 산문의 형식을 취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율격과 심상으로 시적 효과를 획득하고 있다는 평으로 주목받았다. 1920년대부터 30년대 초반까지 모더니즘 시인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인. 내면의 깊숙한 곳까지 도달해 새로운 아우라를 뿜어내는 시는 오히려 담백한 문장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터득한 듯싶다. 한라산 정상 백록담을 오르면서 본 자연물들의 담담하고 담백한 묘사가 그 안에 함축된 의미와 기운을 파장시키는 효과를 얻는다. ‘뻑국채 꽃 키가’ ‘한마루 오르면 허리가 슬어지고 다시 한마루 우에서 모가지가 없어지고 나종에는 얼굴만 갸옷 내다’보다 마침내 ‘아조 없어’지는 소멸로 이어진다. 그러고 나면 ‘뻑국채 꽃밭에서 별들이 켜’지고 화자는 ‘기진’해 버린다. 삶의 생로병사가 한눈에 그려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 땅의 모든 생명체는 자연으로 회귀하는 순환적 구조임을 상기시키는 장면이다. 한편으론 ‘귀신도 쓸쓸하여 살지 않’고 ‘도체비꽃이 낮에도 혼자 무서워 파랗게 질’릴 정도로 산은 인간과 자연물을 뛰어넘어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한 장소임을 확인하게 만든다. 그것은 “산이 지니는 다중성 때문이 아니라 산을 구성하는 요소들, 곧 높이, 수직성, 질량, 형태 등이 환기하는 다양한 암시성 때문이다. 높이라는 요소를 강조할 때 정신의 내적인 고양을 상징한다. 산봉우리가 신비성을 암시하는 것은 또한 그것이 지상과 하늘이 서로 만나는 지점, 혹은 세계를 표상하는 축, 곧 세계-축이 통과하는 중심이기 때문이”(이승훈 편저(1995), 󰡔문학상징사전󰡕, 고려원)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시는 신화적 혹은 전설적 요소를 직접 표출하지 않는다. 다만 시 전체에 흐르는 공기나 분위기가 높고 숭고하며 신성함으로 가득 차 있다는 걸 느낄 뿐이다. 마치 삶도 죽음도 이곳에선 경계가 지워진(‘내가 죽어 白樺처럼 흴것이 숭없지 않다.’)듯 보인다. 산신의 기운으로 생명은 살아 움직이고 인연이 되고 헤어지고 결국 ‘白鹿潭(백록담)은 쓸쓸’해지면서 ‘祈禱(기도)조차 잊’게 되는 곳이다. 물아일체 혹은 무아지경으로 끌어들인다. 현실의 모든 고락이 산에 오름으로써 해소되는 것이 아닌 동화(同化)되어 일부가 되는 것처럼. 한라산 혹은 설문대 할망 신화 역시 신적인 우월감보다는 자연합일(自然合一)을 통해 평화로우면서 자유로운 세상을 이룩하고자 한 인간의 소망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그렇게 신화와 전설을 끌어들인 상상력은 행복과 이상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가장 오래된 믿음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신화와 전설은 오랫동안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면서 상상력이 오히려 믿음으로 자리 잡았다. 삶이 주는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싶은 방편이었다. 세상은 과학발전으로 눈부시게 발전했으나 여전히 우리의 불안과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존재의 정체성에서 점점 더 멀어져가는 현상을 빚고 있다. 인간이 어디서 왔으며 무엇으로 살아가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어쩌면 신화와 전설은 단지 옛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닌 현대사회에 맞게 재해석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신화와 전설이 주는 상상력은 또 다른 능력을 발휘할지도 모른다.

 

* 김효선/ 2004년 계간《리토피아》등단, 시집 『서른다섯 개의 삐걱거림』(문화체육관광부우수도서선정), 『오늘의 연애 내일의 날씨』, 『어느 악기의 고백』(2020년세종나눔도서선정), <시와경계>문학상, 서귀포문학작품상, 칠십리문학상, 프리랜서 작가, 제주대학교 강사

 

 

-『다층』 2025년 봄호 <특집> '섬, 詩의 실크로드를 가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