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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머의 리뷰

‘관계’를 건너는 공간의 형식

by 너머의 새 2025. 6. 14.

 

‘관계’를 건너는 공간의 형식

                  -강영은 시집 『너머의 새』⟨서평⟩

                                  김성조(시인, 문학평론가)

 

1.

 

강영은 시인의 시에는 ‘관계’에 대한 사유가 깊이 관여하고 있다. ‘관계’는 사물과 사물, 나와 너, 우리들을 두루 아우른다. 나이면서 너이고, 당신이면서 그대들이 시적 대상이 된다. 우리는 날마다 관계 속을 걸어간다. 자연적 조건이든 인간 삶의 영역이든, 심지어 죽음까지도 관계를 벗어나서는 존재하기 어렵다. 각각의 독립적인 존재가 다른 존재와 관계함으로써 생명성의 기본 원리를 확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나와 세계의 관계성은 존재에 대한 인식을 그 기반으로 한다. 이는 크게는 우주적 질서의 범주이면서, 작게는 오늘날의 풍경을 접속하는 긴밀한 연결고리가 되고 있다.

강영은 시인의 경우, 먼 곳에 있는 관념적인 세계가 아니라, 살아오면서 경험하게 되는 다양한 ‘관계’ 요소를 포섭하여 시적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우리가 가볍게 스쳐 지나거나, 혹은 밖으로 잘 표출되지 않은 은폐된 관계성의 여러 파장들을 짚어내는 것이 그것이다. 특징적인 것은, 이러한 관계성의 저변이 대체로 부정적인 색채로 그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현실적/정신적 결핍을 유도하는 부재와 소외 등, 현대적 삶 속에 침잠해 있는 모순성을 확인하는 과정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관계의 홍수 속에 살면서도 진정한 의미의 ‘관계’를 상실하고 있다. 이러한 내적 기류는 “나라는 존재와 나를 둘러싼 세계에 대해 상실과 부재의 감정이 밀려들었다”라는 “시인의 말”에서도 짐작해 볼 수 있다.

너와 나 사이에는 늘 ‘간격’이 개입해 있다. “당신은 얼마나 먼 거리에 놓여있는 포크인가”(「간격」)에서처럼 ‘간격’은 합치할 수 없는 부조화를 동반한다. “칡넝쿨을 따라가다 보면 바람 부는 세상이 온통 굽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숲」)에서도 사람살이의 질곡이 상징화되어 있다. 시인이 지금까지 살아왔고 또 살아가야 할 ‘관계’에 대해 내밀한 물음을 던지고자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물음은 결국 나를 인식하고, 나를 찾아가는 일련의 과정이 될 것이다. ‘관계’에 대한 사유, ‘관계’를 가로지르는 공간에 대한 인식, 내 안의 자아를 정립하는 과정 등이 시집의 전체 구도 속에 포섭되어 있다.

 

유리컵에 담긴 포도알처럼

꺼내기 좋은

얼굴

 

유리컵에 비친 포도알처럼

꺼낼 수 없는

얼굴

 

아침의 일출과 저녁의 일몰처럼

기분이 다른

얼굴

 

이렇게 많은 나를 누가 키웠나?

포도밭 지기 같은 당신이 키웠나?

 

수없이 많은 나와 연애해도

수없이 많은 나와 이별해도

온도가 같은

얼굴

 

내가 뱉은 씨앗과

내가 삼킨 열매처럼

법칙이 같은

얼굴

 

새가 노래하는 아침과

새가 돌아오는 저녁처럼

좌표가 같은

얼굴

 

어제 만났다 오늘

헤어지는 작은 손바닥 안

얼굴들

- 「상대성」 전문

 

세상의 모든 사물과 존재의 흐름은 ‘상대성’에 근거한다. 이는 “모든 사물이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다른 사물과 의존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는 성질”(국어사전) 때문이다. 생성과 폐허, 생명과 죽음의 순환 이치가 모두 이러한 관계성의 구도 속에 놓여있다. 이에 비춰보면, 스쳐 지나는 작은 한 뿌리조차도 그 자체만으로 존재할 수 없다. 우리가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있지만, 여기에는 비와 바람과 햇살 등 다양한 자연적 조건들이 개입해 있다. 인간 삶의 근저에도 눈에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내외적 관계성의 논리가 긴밀하게 작동하고 있다. 강영은 시인이 체감하는 ‘관계’의 흐름 또한 이러한 배경 속에 놓여있다.

‘얼굴’은 인간 존재의 다양한 일면을 각인시키는 대표적인 예가 된다. 시인은 “꺼내기 좋은/얼굴”, “꺼낼 수 없는/얼굴”, “기분이 다른/얼굴”, “온도가 같은/얼굴”, “법칙이 같은/얼굴”, “좌표가 같은/얼굴” 등으로 그 배경을 설정한다. ‘얼굴’이 내장하고 있는 여러 각도의 특징들은 이 시대의 삶의 풍경과 그 풍경을 걸어가는 ‘관계’의 한 척도를 반영한다. 이러한 ‘얼굴’의 상징적 배경 속에는 각각의 표정만큼 서로 합치되지 않는 거리가 내장되어 있다. 같은 방향을 고수하는 “온도가 같은”, “법칙이 같은”, “좌표가 같은” ‘얼굴’들조차 타성에 젖어 무성의/무감각의 형식에 닿아있다.

‘얼굴’은 저마다의 모습으로 목소리를 높이거나 숨기면서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고 불협화음의 오늘을 걸어간다. 공감의 형식이 아닌 수없이 다른,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관계의 한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시인은 이러한 관계의 특성을 “어제 만났다 오늘/헤어지는 작은 손바닥 안/얼굴들”로 표상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맞닥뜨리는 ‘얼굴’과 그 ‘얼굴들’이 생성하는 소리를 “손바닥 안” 같은 작은 공간 속의 소요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소란한 일상적 풍경 속에 담긴 ‘관계’의 허상을 보는 것이다. ‘얼굴’은 ‘나’이기도 하고, ‘너’이기도 하다. 이러한 배경은 “이렇게 많은 나를 누가 키웠나?”에서 그 내적 흐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는 ‘얼굴’이 가진 모순적 일면들이 특정한 외적 대상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 있음을 확인해 준다.

 

굵기가 다른

두 마음은 자주 엇갈려

당신과 나 사이

교차로가 생긴다.

 

그럴 때 당신은

고양이가 죽어나간 골목처럼

사각지대를 번식시킨다.

 

……… 중략 ………

 

우리는

아무 말이나 하면서 다정해지고

아무 말 없이 멀어진다.

 

당신은 세로고 나는 가로다.

- 「타탄체크를 짜는 방식」 부분

 

강영은 시인의 ‘관계’에 대한 시적 사유는 시편 「타탄체크를 짜는 방식」을 통해 더욱 구체화 된다. 우리는 모두 관계 속에 있으면서 관계 밖에 있다. ‘타탄체크’의 문양처럼 복잡하게 얽히고설킨다. 하나의 구조 속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각의 방향을 고집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굵기가 다른/두 마음은 자주 엇갈려” 각기 다른 생각 속을 떠돌게 된다. ‘교차로’, ‘사각지대’ 등은 이러한 배경을 상징화하는 이미지들이다. “우리는/아무 말이나 하면서 다정해지고/아무 말 없이 멀어진다”에서 우리 시대가 직면하고 있는 관계성의 한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이는 현대적 삶 속에서의 만남과 헤어짐이 얼마나 삭막하고 이기적인가를 보여주는 한 척도가 된다.

따라서 “당신과 나 사이”에 상호 신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정황은 “당신은 세로고 나는 가로다”에서 보다 극대화되어 나타난다. 우리의 시선에 포착된, 혹은 경험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성의 부재는 병증의 하나처럼 삶의 저변에 뿌리 깊이 잠식해 있다. 이러한 부재 의식은 이미 치유의 단계를 넘어 더 큰 병증을 유도하는 장애 요소가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통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관계에 대한 욕망 또한 폭주하고 있지만, 그 욕망을 채워줄 내적 진실은 결여되어 있다. 우리는 각기 다른 목소리로 각기 다른 이야기를 잘 다듬어진 표정으로 주고받을 뿐이다. 따라서 거기, 혹은 여기에 너와 내가 있지만, 너와 나는 언제나 부재하다. 시인의 ‘관계’에 대한 사유는 바로 이러한 배경 속에서 출발한다.

 

2.

 

공간은 관계성을 특징짓는 중요한 배경이 된다. 모든 존재는 공간을 살아가는 대상이면서 또한 그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자연적 질서 속의 공간이든 개인적 삶을 주도하는 공간이든 공간은 관계를 열어가는 긴밀한 통로가 된다. 특히, 시인의 시선에 포착된 공간은 시적 상상력을 이끌어가는 의미요소로 작용한다. 이때의 공간은 대부분 경험된 ‘관계’ 속에서 체득된 공간 이미지를 표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에서의 공간 이미지는 ‘관계’의 구도와 비슷한 색채로 의미화되기 마련이다. 이른바 경험된 ‘관계’의 구도가 부정적이면 공간의 형식 또한 부정적인 색채를 띠게 된다는 것이다. 강영은 시인의 시적 상상력은 ‘관계’를 건너 자연스럽게 공간의 영역으로 이동해 간다. 시인이 바라보는 우리 시대의 현실 공간은 어떤 모습일까. 독백에 가까운 시인의 내적 목소리를 따라가 본다.

 

언제부턴가 왼쪽이 아프다.

기침하면 왼쪽 가슴이 쿨럭이고

고개 돌리면 왼쪽 등허리가 땡긴다.

어떤 권력이 점거했는지

어떤 부조리가 관여했는지

미세먼지 같은 대답을 듣는 날에는

목줄까지 뻣뻣하다.

내 몸의 기득권자는 누군가요,

내가 아닌가요?

당귀즙을 앞에 놓고 외쳐 보아도 단단한 근육질에 묶인

도시는 오른쪽으로 돌아서지 못한다.

어쩜 여기는 인형들의 도시일지 몰라,

선반 위에 놓인 목각인형처럼 사지를 내려놓고

빙그르르 돈다.

누가 총을 들이댄 것도 아닌데

네, 네, 그렇군요.

유리 벽에 박힌 나를 보려고 선 채로 돈다.

움직이는 벽에 애걸하듯 선 채로 돈다.

고통의 계단을 높이는 건 누구일까,

계단 위에 놓인 목에 붕대를 감고

계단 아래까지 내려간다.

어느 쪽에도 유리한 증언은 하지 않겠어요.

당신과 나는 경계에 서 있을 뿐이니까요.

구어체의 문 앞에 문어체의 당신은 대답이 없다.

택시를 탄다.

윈도 브러시는 좌우지간 안개 흐르는 길을 지우는데

어느 병원으로 모실까요,

앞만 노려보는 내게 운전기사가 물어본다.

 

글쎄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 「인형들의 도시」 전문

 

위 시편 「인형들의 도시」는 우리에게 많은 상징성을 던져준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공간을 “인형들의 도시”로 읽는 것에서부터 그 진폭이 감지된다. ‘인형들’과 ‘도시’라는 공간 이미지가 대비되면서 공간이 함유한 어두운 일면이 돌출된다. 여기서 ‘인형들’은 주체성을 상실하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누군가에게 조종당하거나 혹은, 항거할 수 없는 무력감을 표상한다고 할 수 있다. 이른바 개인의 고유성은 말살되고 변질된 형태의 오늘이 있을 뿐이다. “내 몸의 기득권자는 누군가요”라는 물음은 이러한 배경을 뒷받침하고 있다. 언젠가부터 ‘나’는 나로 살아가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잠식당한 존재로 전락해 있다. 따라서 “선반 위에 놓인 목각인형처럼” 수동적인 행위만 반복할 뿐이다.

이는 ‘도시’라는 거대 공간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도시’는 거대 폭력을 조장하는 기계적이고 인위적인 공간이다. 시인이 체감하는 ‘도시’는 ‘권력’, ‘부조리’, ‘기득권’이 만연해 있는 공간이다. 인간은 ‘도시’를 만들고 도시는 ‘인형들’을 양산한다. 이러한 모순적인 연결고리는 이제 그 뿌리가 깊어져서 제자리로 돌아갈 수조차 없다. “도시는 오른쪽으로 돌아서지 못한다”에는 이러한 절망적 상황이 매개되어 있다. ‘오른쪽’은 사람이 사람답게 존재하던, 긍정적인 공간 이미지에 닿아있을 것이다. 따라서 “오른쪽으로 돌아서지 못”함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간 상실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경계’는 어느 곳에도 포섭되지 못하는 공간이다. “당신과 나는 경계에 서 있을 뿐이니까요”에는 “당신과 나” 사이의 거리가 암시되어 있다. 따라서 관계성의 부재와 함께 합치되지 않는 단절의 형식이 각인되어 있다. 여기에는 어떤 희망적 대안도 찾을 수 없는 자포자기적인 위기의식이 동반된다. 시인이 체감하는 ‘도시’는 폭력적 부조리와 강압적 요구가 존재하는 공간이다. 매이고, 묶이고, 조종당하는 무기력한 ‘인형들’의 공간이다. “글쎄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요!”에는 방향성을 상실한 현대인들의 자화상이 함축되어 있다. 부조화의 ‘관계’에 이어 공간의 상실이라는 크나큰 문제의식이 대두되는 지점이다. 나를 멈추고 나를 돌아보는, 비판과 반성의 의지가 발현되는 것도 여기에 있다.

 

새가 날아가는 하늘을

해뜨는 곳과 해 지는 곳으로 나눕니다.

방향이 틀리면 북쪽과 남쪽을 강조하거나

죽음을 강요하기도 합니다.

 

나의 흉곽을 새장으로 설득하기도 합니다.

 

사이에 있는 것은 허공

새가슴을 지닌 허공을 손짓하면

새가 돌아올지 모르지만

새의 노동이

노래를 발견하고 나무를 발명합니다.

 

헤아릴 수 없는 크기를 가진 숲에

잠깐 머물러

나무와 나무의 그늘을 이해한다 해도

 

새 발자국에 묻은 피가 없다면

당신이 던진 돌멩이가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점点 하나가

돌에 맞은 허공을 끌고 갑니다.

 

제가 새라는 걸 모르고

새라고 하자

공중이 조각조각 흩어집니다.

 

아무런 목적도 계획도 없이

너머로 넘어가는 새

 

새라고 부르면 새가 될지 모르지만

나라고 발음하는 새는

누구일까요?

- 「너머의 새」 전문

「너머의 새」에서 ‘너머’는 이곳이 아닌 저곳, 즉 시인의 지향 세계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새’는 그 공간으로 이동하고자 하는 시적 주체이다. 이는 곧, 현실과 그 현실 속에 놓인 부조화의 조건들을 벗어나 새로운 공간을 구축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명이다. 현실 공간은 “새가 날아가는 하늘을/해뜨는 곳과 해 지는 곳으로 나”누고, “방향이 틀리면 북쪽과 남쪽을 강조하거나/죽음을 강요하기도”하는 획일화되고 강제화된 모순을 담고 있다. ‘새’는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자 하지만, 세상의 조건들은 이를 통제하고 억압한다. ‘새가’ 품고 있는 진실성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세상의 시선이 그 앞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새 발자국에 묻은 피”와 “당신이 던진 돌멩이”에서 시인의 현실 인식의 저변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수많은 ‘당신’이 던진 ‘돌멩이’는 ‘피’의 상흔이 되기도 하고, 한편으로 ‘새’의 비상을 추동하는 상상력의 근간이 되기도 한다. 현실 그 너머의 세계를 표방하는 ‘너머’는 상승의 공간 이미지에 닿아있다. ‘새’ 또한 현실 안주의 형식을 벗어나 날개 즉, 상승 지향의 의미를 내포한다. 이는 나를 둘러싼 ‘관계’를 스스로 격리시키면서 자신만의 독립된 공간을 생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두 이미지 모두 ‘이곳’을 떠나 ‘저곳’으로 가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를 담고 있다.

‘나’와 ‘새’는 동일시되면서 현실극복의 주체로 떠오른다. 하지만 “아무런 목적도 계획도 없이/너머로 넘어가는 새”에서 알 수 있듯, 아직은 탐색의 단계에 놓여있다. 그럼에도, “나라고 발음하는 새는/누구일까요?”에 담겨있는 자아에 대한 물음은 강렬하다. 이러한 물음은 밖으로 향해 있던 시선을 안으로 이동시켜 나를 찾아가는 동력을 생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피’와 ‘돌멩이’의 세계를 벗어나 ‘너머’의 공간을 확보하고자 하는 동기부여가 바로 그것이다. 현실 공간에 대한 명징한 인식, 이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공간의 구축, 자아의 위치를 확인하고자 하는 열망 등이 상승 이미지를 통해 그 통로를 마련하게 된다.

3.

 

살펴보았듯이, 강영은 시인은 내가 살아가는 공간에 대해, 그 공간을 활보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그리고 나와 세계의 관계성에 대해 숙고한다. 공간은 생명을 존재하게 하고 관계를 이끌어가는 자연스러운 질서의 한 유형이지만 이미 그 본질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이 그 중심에 있다. 세계는 각각의 목소리만 무성해서 완전체로 나아가지 못한다. ‘도시’로 상징화되고 있는 공간은 기계화되고 도구화되어 불협화음의 발자국만 남길 뿐이다. 따라서 교감을 주고받아야 할 나와 세계, 나와 대상은 단절되고, 경직되고, 파편화되어 있다. 지금 ‘여기’의 공간 이미지가 중요한 탐구 대상으로 떠오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기’를 체감하는 것은 ‘관계’를 사유하는 중요한 인식 체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관계’의 구도와 공간의 형식들을 지나 시인의 상상력은 이제 어디로 향하게 될까. 부조화, 불협화음의 현실 속에 그대로 침잠하는 것일까. “삽자루는 삽자루에 기댄 농부처럼 생각이 많아진다”(「삽자루를 생각함」)에서처럼 시인은 생각이 많아진다. ‘생각’은 나와 세계를 인식하고 내 안의 자아를 일깨우는 내밀한 숨결이다. 이는 밖으로 향해 있는 외적 자아가 아니라, 내 안에 잠들어 있는 내 안의 자아에 대한 반응이다. 이러한 시적 흐름은 “나라고 발음하는 새는/누구일까요?”(「너머의 새」)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과도 접목된다. 긴 길을 돌아 이제야 낯설고도 익숙한 나를 만나는 길목으로 접어들고 있다.

 

나는 드디어

말 상대를 고안해 냈다.

 

거기 누구 없소? 소리칠 때

누구도 들을 수 없는 나밖에 들을 수 없는

목소리를 만들어 냈다.

 

내 귀의 바깥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내가 섬일 때

날마다 지친 갈매기들이 섬에 집중할 때

 

갈참나무 잎사귀처럼 침몰하는 귀가

저절로 닿는 심연, 그 아득한 깊이에 들려오는

존재의 목소리

 

그것이 설령

내 몸의 줄기에서 뻗어나간 것일지라도

놀란 흙 밖으로 튀어나온 그것을

나는 지슬이라 불렀다.

 

그럴 때 나는

불타오르는 산이고 쏟아지는 빗줄기이고

숲을 뒤덮는 바람이고 계곡에 넘쳐흐르는 물

 

나는 드디어

나의 고독과 대화하는 나를 가지게 되었다.

 

나의 예언은 어디에서 오는지

나의 방언은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마침내

감옥이고 차가운 별이 되고 마는

 

나의 독백을

대화체로 바꾸는 시詩를 가지게 되었다.

흙무덤에서 파낸 그것을

나는 지슬이라 불렀다.

- 「지슬」 전문

 

“나는 드디어/말 상대를 고안해 냈다”에서 시의 전면에 흐르는 생동을 감지할 수 있다. 여기에는 새로운 발견에 대한 확신이 담겨있다. ‘말 상대’는 소통의 매개체이다. “나는 드디어”에서 ‘말 상대’를 만난 데 대한 감격의 순간이 포착되어 있다. 그리고 이는 “누구도 들을 수 없는 나밖에 들을 수 없는/목소리”라는 특징을 안고 있다. 이러한 은밀하고 긴요한 ‘말 상대’의 존재는 “내 귀의 바깥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로 구조화된다. ‘나’와 ‘바깥’ 즉, ‘나’와 외적 대상이 엄밀히 구분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른바 오로지 내 안에서만 생성되고, ‘나’하고만 소통하는 ‘목소리’라는 의미가 된다.

그러면 이러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시인은 “나의 독백을/대화체로 바꾸는 시詩를 가지게 되었다”로 그 특징적 배경을 명시한다. ‘시’는 나의 ‘말 상대’이면서 “나의 고독과 대화하는 나를 가지게” 하고, “나의 독백을/대화체로 바꾸”게 하는 영역이다. 또한 “그 아득한 깊이에 들려오는/존재의 목소리”로 그 크기의 진폭을 나타낸다. 이른바 ‘나’를 “불타오르는 산이고 쏟아지는 빗줄기이고/숲을 뒤덮는 바람이고 계곡에 넘쳐흐르는 물”이 되게 하는 존재로서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 중심에 ‘지슬’이 있다. ‘지슬’은 “감자를 뜻하는 제주어”라고 주석에 표기되어 있다. 감자라니, 얼마나 소박하고 신선한 생명의 발견인가. 시인의 시선에서 보면, ‘시’는 흔히 떠도는 거대한 범주의 ‘목소리’가 아니라, “흙무덤에서 파낸” ‘지슬’의 숨결에 닿아있다.

“나의 고독”, “나의 독백”에서 이미 느껴지듯이, 시인에게 ‘말 상대’ 혹은 ‘대화’의 연결고리는 대단히 절실하다. 이는 여타의 외부적 소요를 건너와 온전히 내 안의 소리에 집중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시’는 그 매개가 되는 정신적/현실적 극복 기제이다. 시인은 ‘시’를 통해 비로소 ‘대화체’의 한 영역을 발견하게 된다. ‘관계’의 부재와 공간의 모순성이 던져주는 결핍의 현실을 지나 비로소 내 안의 자아를 찾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서 있어야 할 공간과 나아가야 할 방향성이 분명해진다. ‘시’와 시적 공간이야말로 부재와 공백의 심연을 해소하고 상실한 자아를 회복할 수 있는 자기실현의 통로가 되고 있다.

 

돌 위에 돌을 얹고 그 위에 또 돌을 얹어

궁극으로 치닫는 마음

 

마음 위에 마음을 얹고 그 위에 또 마음을 얹어

허공으로 치솟는 몸

 

돌탑은 알고 있었다.

 

한 발 두 발 디딜 때마다 무너질 걸 알고 있었다.

무너질까 두근거리는 나를 알고 있었다.

 

그건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므로

 

조그만 돌멩이를 주워

마음의 맨 꼭대기에 올려놓았다.

 

태어나기 전의 돌탑을

태어난 이후에도 기다렸다.

 

한곳에 머물러 오래 기다렸다.

 

돌멩이가 자랄 때까지

돌탑이 될 때까지

- 「시간의 연대」 전문

 

‘돌탑’을 쌓는 일은 어떤 소망, 염원을 상징화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지극한 인내를 기반으로 하는 ‘시간’이 담보되어 있다. ‘시간’은 시인의 내적 열망을 반영한다. “돌 위에 돌을 얹고 그 위에 또 돌을 얹”고, “마음 위에 마음을 얹고 그 위에 또 마음을 얹”는 ‘궁극’의 순간이 여기에 있다. “한 발 두 발 디딜 때마다 무너질 걸 알고 있었다/무너질까 두근거리는 나를 알고 있었다”에서도 ‘돌탑’을 쌓는 간절한 마음이 내포되어 있다. ‘시간’은 곧 기다림이다. 시인은 “태어나기 전의 돌탑을/태어난 이후에도 기다렸다”, “한곳에 머물러 오래 기다렸다”로 ‘시간’과 기다림의 상관관계를 명시하고 있다. ‘시간’은 꼭 이루고자 하는 혹은, 이루어졌으면 하는 긍정적인 희망을 내장한다. 따라서 “돌멩이가 자랄 때까지/돌탑이 될 때까지” 기다림을 멈추지 않는다.

 

강영은 시인은 “근황의 세계는/기다림이 시드는 세계, 서정이 사라진 세계”(「절망」)라고 말한다. 삶의 생동이 충만해야 할 ‘근황’을 “기다림이 시드는 세계”로 읽고 있다. ‘기다림’은 우리에게 희망을 부여한다. 그리고 그 크기만큼의 절망을 안겨주기도 한다. ‘기다림’을 상실한 세계는 꿈을 상실한 세계이고, “서정이 사라진 세계”이다. 코로나 팬데믹의 한때를 형상화하고 있는 시편이지만, 시인의 현실 인식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절망’은 우리의 삶의 곳곳에 잠복해 있다. 따라서 매 순간 자기 극복의 의지를 발현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돌탑’은 그 연장선상에서 생성된 이미지이다.

우리는 늘 부재와 상실, 결핍과 소외를 경험하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저 그렇게 스쳐 갈 것이고, 누군가는 섬세한 파장으로 다가가 그 속내를 끄집어내기도 한다. 그 안에 부는 바람에 귀 기울이고, 그 상처의 흔적을 찾아낸다. 강영은 시인은 먼 곳이 아닌 우리의 삶의 근저에서 다양한 부조화의 형식들을 짚어낸다. 보이는, 보이지 않는 내외적 모순성을 구체적 의미 영역으로 풀어놓는다. ‘돌탑’은 시간을 인식하고, 시간을 걷고, 시간을 승화시키는 과정이다. ‘관계’에 대한 사유, ‘도시’ 공간에 대한 탐색을 이어오는 동안, “너머의 새”가 탄생하고, ‘돌탑’의 ‘시간’이 생성되었다. 이러한 의미적 단계는 나를 결집하고 내적 완성을 의도해 가는 상상력의 근간이면서, 치열한 시적 탐구 과정으로서의 발자취가 된다.

 

※ 김성조 (시인,평론가)

한양대학교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 졸업. 1993년 『자유문학』 신인상으로 시 등단, 2013년 『미네르바』로 평론 등단. 시집 『그늘이 깊어야 향기도 그윽하다』, 『새들은 길을 버리고』, 『영웅을 기다리며』, 『신화의 푸른 골목길을 걷다』. 시선집 『흔적』. 학술 저서 『부재와 존재의 시학-김종삼의 시간과 공간』, 『한국 근현대 장시사長詩史의 변전과 위상』(2019년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선정). 평론집 『詩의 시간 시작의 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