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향沈香, 매향埋香/정호정
하늘을 봐도 구름을 봐도
숲을 봐도 물을 봐도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서향나무는 베어 놨는데
하늘에 묻어야 하나
구름에 묻어야 하나
숲 속 물 속 어디에 묻어야 하나
생각의 실마리를 찾아가는데
문득 가슴이 저려왔다 아리고 아리다
순정한 시절의 아름다운 생각들
눈물이 났다
향기의 서향나무를
천년을 바라 내안에 묻어두기로 했다
■천년향기의 진언-정호정의 시"침향沈香, 매향埋香"
정호정 시인을 첫 대면하기는 2007년도 <시인들이 뽑은 시인상> 시상식장에서였다. 수상자는 난향처럼 품격과 향기가 고아해 보였다. 정신과 삶을 고양시키는 시의 기품을 몸속에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시인은 이미 『프로스트의 샘』 『묘상일지』와 같은 두 권의 시집을 통해 ‘조선시대의 박달나무 목연’처럼 깊고 그윽한 묵향을 지녀서, 그‘고요한 향기’로 보다 완미한 ‘진실의 사리’를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초승달 같은 눈매에 잔잔한 웃음을 머금은 모습은 “시는 영원한 진실 속에 표현된 삶의 이미지”라고 말한 셀리의 말을 실감케 했다. 이처럼 고졸한 시인의 향기를 흥감하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은 커다란 기쁨이 아닐 수 없다. 동서양을 넘나드는 인문학적 교양을 바탕으로 시의 기품을 보여주는 시인의 이러한 향기는 어디에서 온 것인지 금번 상재하는 시집 속, 여러 편의 시 중 「침향 매향」에서 흠향해본다.
침향은 태우면 진기한 향내가 나고 또 뛰어난 약효를 가진 영약이다. 침향나무가 스스로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생성하는 수지 덩어리를 말한다. 침향은 사람이 쓰는 향료 중에 가장 값비싼 향료다. 옛사람들은 보석보다 더 귀하게 여겼다 한다. 시인이 이처럼 귀한 침향을 시적 질료로 삼은 것은 어찌 보면 시에 대한 매향의식, 즉 제례 행위를 갖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매향의식은 시인에게 순정한 시절의 아름다운 생각들을 향한 제례의식으로 전이된다. “서향瑞香나무는 (침향이 될 수 있는) 베어놨”다는 구절은 시를 수태하려는 시인의 소망과 의지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시적 회임에 대한 간절한 염원은 그럼에도 삼라만상의 자연, 그 원형적 질료인 하늘과 구름, 숲, 물을 봐도 생각이 나지 않을 만치 참으로 요원하기만 하다. 시작(詩作)의 어려움은 모든 시인에게 부여된 공통의 과제이며 숙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험난한 길을 가는 시인의 삶은 어쩌면 천년동안 숙성되기를 기다리는 침향처럼 아리고 눈물 나는 고독한 삶이 아닐 수 없다.
시의 씨앗을 틔우기 위해 애쓰는 느리고 더딘 시도(詩道) 위에 질주하는 현대 사회는 무량의 속도를 요구한다. 속도는 물질문명의 내구적 속도일뿐 아니라 삶의 바탕이 되는 자연에 이르기까지 속전속결의 결과를 유도한다. 계절과 관계없이 싹이 트고 꽃이 피어날 뿐더러 제철 과일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각양각색의 열매가 철없이 출하된다. 험산 준령을 넘는 동안 새로운 시를 갈구하는 시의 속도전 역시 시의 내외적으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무차별적인 속도전을 감행하는 이즈음의 시작법과 달리 잉걸불처럼 꺼지지 않는 은근한 시적 발화를 통해 시인은 순정한 시절의 아름다운 생각들, 시를 접하고 시와 희로애락을 나누던 그 때를 생각하며 서향나무처럼 더욱 깊이 있는 시심을 터득한 것이 아닐까.
‘오래 묵힐수록 향기가 짙어진다’는 침향의 교훈은 전복된 속도에 쉽게 용인되는 미덕은 아니다. 성숙하고 용기 있는 시인만이 발화하는 겸허의 미덕인 것이다. 순정하고 무구한 세계를 지향하는 시인의 시적 발화는 “시는 마음에서 우러난다고 한 것이 믿을 만하다”고 말한 이인로의 『파한집』을 생각게 한다. 명유와 학자들의 시문이 인멸될 것을 슬퍼하여 이를 수록한 『파한집』은 한국 최초의 비평문학서로 고려시대의 각판 잔존본으로 소중한 자리매김을 한 책이다. 이처럼 비평적 시각에서 우러났을지도 모른 시인의 시말은 그러나 단호한 어조로 향기를 내뿜기보다는 순정한 세계를 지향하는 잔잔한 어조로 “천년을 바라 내 안에 묻어두기로 했다”고 향기의 분사를 거두어들인다. 얼핏 보면, 소극적인 듯 보이나, 천년이 지나도 썩지 않을 향기로 남겠다는 은근과 끈기의 정서. 말하자면 전통적 진정성이 충만하게 무르녹아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시를 읽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고, 그 감싸인 포근함 속에서 반짝이는 삶의 깊이와 맞닥뜨리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는 시인의 시집 『프로스트의 샘』의 해설(박제천)처럼 시인의 시세계는 여전히 ‘아름다운 평화’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으며 그 연장선상에서 그윽한 향기를 뿜어낸다. 침향 중, 가장 탁월한 기남향의 묵언 진언을 이 시 속에서 들었다/ 강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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