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른다고 하였다' /권 지 현
우루무치행 비행기가 연착되었다
북경공항 로비에서 삼백삼십 명의 여행자들은
여섯 시간째 발이 묶인 채 삼삼오오 몰려다녔다
현지여행객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여행가방에 다리를 올리고 앉아
떠들어대거나 서로 담배를 권했다
담배를 피워올리건 말건
나는 도시락으로 식사를 했다
비행기는 언제 올지 오지 않을지
아무도 모른다고 하였다
연착한다는 안내표시등 한 줄 뜨지 않았다
사람들은 연신 줄담배를 피우고
나는 로비를 몇 바퀴나 돌고
하릴없이 아이스크림을 핥다가
마침내는 쪼그리고 앉아 지루하게 졸았다
항의하는 나를 마주한 공항여직원
가슴께에 걸린 얼굴사진이 흐릿하게 지워져 있어
내가 가야할 길마저 희미해 보였다
비행기는 오지 않고
결리는 허리뼈를 아주 잊을 때까지 오지 않고
우루무치행 비행기는 언제 올지,
아무도 모른다고 하였다
-----------------------------------------------------------------------
하이퍼리즘의 기법을 보다/강영은
[2010 세계일보 신춘문예]당선작인 권지현의 '모른다고 하였다'를 읽었다. 평이한 일상 속에 깔리는 삶의 무늬를 과장하지 않고 드러낸 이 시는 얼핏 읽으면 현대 서정시의 질감이 느껴진다. 자연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전통 서정시와 달리 현대 도시공간에서 대상을 탐구하는 서정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서정시는 필연적으로 자아가 부딪힐 수밖에 없는 분리와 분열의 틈 속에서 작은 합일을 이루고, 그것을 통해 동일성의 미학을 추구하는 것이지만 이 시에서 나타난 서정성은 합일을 꿈꾸기보다 주관을 배제한 중립적 입장에서 관찰자의 눈을 지닌다. 비행기가 연착되는 공황의 상황을 아무런 코멘트 없이 극사실주의의 그림처럼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필자가 읽기에는 미술의 한 사조인 하이퍼리즘이 시의 기법으로 활용된 듯 여겨진다. 그냥 지나쳐버릴 수도 있는 현상을 감정이 배제된 타자의 말을 빌어 모른다고 하였다’ 라고 표현한 시적 내용은 현대인의 심상을 기계적으로 드러낸다.
극사실주의는 종래의 추상미술과 사진 자체에 대한 아이러니의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주로 일상적인 현실을 생생하고 완벽하게 그려내는 것이 특징이다. 세밀하게 그려내는 양상은 때로 매우 충격적인 효과를 나타낸다. 육안으로는 알아낼 수 없는 추악함, 이를테면 모발에 가려진 점이나 미세한 흉터까지도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세밀화의 터치와도 같이 시적 묘사는 간결하고 선명하다.
시적 화자는 수백 명의 여행객에 묻혀 이국의 공항에서 연착된 우루무치 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시적 화자가 가려는 우루무치는 중국 신장웨이우얼(新疆維吾爾) 자치구에 있는 도시로서 톈산 북로(天山北路)의 요충지이며, 몽골과 티벳을 접경으로 두고 있다. 한때 서역(西域)으로 불리기도 한 그 곳은 중국의 서북부에 위치한 변방이다. 먼 변방으로 가는 비행기는 잊혀진 애인을 찾아가는 것처럼 연착과 결항이 다반수일 것이다. 이국의 공항에서 뜻하지 않는 상황을 스케치 한 시인은 절제된 감정으로 꼼꼼히 풍경을 덧칠하며 상황에 대해 모른다고 하는, 모른 체 하는, 현대인의 초상을 보여준다.
‘모른다고 하였다’라는 구절은 중독성이 강한 메시지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너무나 흔히 사용되어지는 말이기 때문이다. 의존명사 '척'의 오묘한 쓰임새만큼이나 시 속에 담긴 의미는 함의적(含意的)이다. 게다가 ‘아무도 모른다고 하였다’ 는 현대인의 속성에서 나아가 삶의 본질을 타전한다. 일상의 모티프를 발전시켜 우리가 육안으로는 알아낼 수 없는 내면의 추악함,(책임회피, 무책임, 방관 등)을 드러낸 묘사법은 극사실주의의 기법과 동일하다.
담담하고 소박하다고 해서 만만하게 보면 안 된다.......읽기 어려운 시가 범람하는 우리 시단을 향하여 던지는 새로운 질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고 한 심사위원의 말처럼 일상의 단면 내지 삶의 본질을 찾아내 하이퍼리즘의 옷을 입힌 시인의 역량은 신인답지 않게 과감하다. 이처럼 편안하게 시를 이루어낸다는 것은 기량의 성숙함과 시를 바라보는 눈이 영글었음을 뜻한다. 당선자의 장점이자 자칫 안이한 시작에 임할 수 있는 위험성도 함께 보여주는 면이다. 그럼에도 소통 부재의 난해시들이 난무하는 시단의 유행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만의 시작법에 충일한 작품을 선보이는 용기는 앞으로 뚜렷한 족적을 보여줄 수 있는 반증이 아닐까. 자신을 통제하면서도 시 와의 거리감을 유지하는 균형감이 이 시의 미덕일 것이다.
소통이 잘되는 시를 만나면 우선 반갑다. 그러나 ‘시란 어휘를 사용하여 상상력 위에서 하나의 환상을 산출해 내는 예술을 의미한다’고 말한《T.B.매콜리》의 말처럼 시가 가지는 언어의 예술적인 측면에 조금 더 접근해 줬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예술로서의 언어적 운용 면에 있어서 평범한 듯한 시말들은 읽는 즐거움을 감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당선자처럼 장식과 수식의 화려한 치장을 벗기는 일, 시의 몸무게를 줄이는 일은 각고의 노력 없이 쉽게 얻어진 결과는 아닐 것이다. 더구나 삶의 미묘한 속성을 날카롭게 포착해내는 투시력은 예사롭지 않다. 詩의 ‘존재를 개명해 가는’ 당선자의 행보가 기대된다. “구체적인 주물을 부어주고 숨결을 들어앉혀 생동감 넘치는 세계들을 하나씩 세상 속으로 내보내고자” 하는 당선 소감에 걸맞게 앞으로의 행보가 절차탁마의 빛나는 언어를 캐내길 기원한다.
-계간 『다층』기획특집 2010년 신춘문예를 진단한다-
'너머의 단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여정의「이집트」 (0) | 2019.01.18 |
---|---|
시퍼런 하늘을 쳐다본다/ 고형렬 (0) | 2019.01.18 |
불륜시편 2—회춘(回春)/강우식 (0) | 2015.09.10 |
침향沈香, 매향埋香/정호정 (0) | 2015.09.10 |
비의 집/박제천 (0) | 2015.09.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