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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머의 단평

불륜시편 2—회춘(回春)/강우식

by 너머의 새 2015. 9. 10.




불륜시편 2—회춘(回春)/강우식









봄이 오듯이 그 여자가 왔다

꽃이 피고 새가 울었다

자연처럼 내가 초록 물들었다

늙마 인생에 그 여자가 봄으로 왔다

몸속 깊이에서

개울물 흐르는 소리가 맑았다

사람은 사람으로 하여

봄이 되고 겨울이 됨을 알았다

너는 몸의 피란 피가 잉잉 돌도록

한 사내를 흔들어놓는 돌개바람이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은 십리 밖 등불로 아득하고

이 봄날에 나는 계집에 캄캄 눈멀었다

다른 여자가 있어

이발소에서 막 나와 봄볕 속에 선 듯

멀쑥하게 키가 커졌었다

젊어지는 어떤 처방도 하지 않았다

여자만 있었다 드디어 불륜 같은

봄이 내습하여 죄가 되었다






—《미네르바》2010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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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륜, 사랑의 유한성과 시간 너머의 무한성

ㅡ'강우식'의 불륜시편 2—회춘(回春)을 읽고



강우식의 신작 시집「종이학」은 ‘개명과 무명“이라는 심리적 의미의 양면성을 지닌 화두와 화자들로 풍요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순환적 인생관을 확인하는 에로티즘의 미학을 세계화로 이끈 '불륜시편'이 나의 눈길을 끌었다. 장이지 시인은 ’사랑의 종교화’ 와 ‘애도의 시간’을 거쳐온 이 '불륜시편'에 대하여, '정신적인 사랑의 세계를 문학적 의장을 통해 형상화시켰다고 <미네르바, 2010년 가을 호>에서 언급한 바 있다. '불륜시편' 중에서도 알레고리가 선명하게 드러나는「불륜시편 2—회춘(回春)」을 다시 한 번 읽어보기로 한다.



“봄이 오듯이 그 여자가 왔다/꽃이 피고 새가 울었다/자연처럼 내가 초록 물들었다/늙마 인생에 그 여자가 봄으로 왔다” 첫 행에서부터 한 치 수식 없는 깔끔한 필력으로 ‘여자’라는 구체적인 대상을 통하여 ‘봄’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표현해내는 환상의 알레고리를 보여준다. 어떻게 보면 모든 관계에서 은유(metaphor)를 구현한 것이 알레고리라고 할 수 있는데 “너는 몸의 피란 피가 잉잉 돌도록/한 사내를 흔들어놓는 돌개바람이었다/사랑하는 아내와/자식은 십리 밖 등불로 아득하고/이 봄날에 나는 계집에 캄캄 눈멀었다” 라는 그림을 내어놓는 문장의 은유적 이미지는 독자를 상상의 세계로 이끄는 백미처럼 느껴진다.



은유가 단어나 문장에 사용되는 개념이라고 한다면, 시인이 보여주는 알레고리는 그 상세함에서 은유보다 길게 지속되고 더 충만한 의미를 담고 있으며, 보다 폭 넓은 상상에 호소한다. 화자의 가면 안에서 “이발소에서 막 나와 봄볕 속에 선 듯/멀쑥하게 키가 커졌었다/젊어지는 어떤 처방도 하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구절에 이르면 시력 45년의 명장임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솜씨라 아니할 수 없다.



“한 해가 네 계절로 채워져 있듯/인생에도 네 계절이 있나니//원기 왕성한 사람의 봄은 그의 마음이/모든 것을 분명 아름답게 받아들이는 때” 라고 18세기 영국 낭만주의 시인인 존 키츠(John Keats, 1795년~1821년)가 노래했듯, 봄이 다시 돌아온다는 것은 진정 행복하고 축복된 일임에 분명하다. 회춘 [回春] 의 국어사전적 의미 또한, ‘1, 봄이 다시 돌아옴. 2, 중한 병에서 회복되어 건강을 되찾음. 3, 도로 젊어짐.’이라고 기술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아내를 잃은 슬픔과 병마에서 회복된 시인의 현실과 시인이 소망하는 국면이 절묘하게 어울린 제목이라 아니 생각할 수 없다.



“드디어 불륜 같은/봄이 내습하여 죄가 되었다”고백하는 결구는 그러한 축복에서 멀리 벗어난 사랑을 보여줌으로써 사랑의 원형질이 어디에 닿아있는지를 파헤친다. 생성하는 자연의 기운과 접합하는 것을 불륜이라 말하는 그 이면에는 봄을 맞는 행위, 즉 회춘의 행위가 인간 본연이 가지고 있는 원죄의식과 맞닿아 있음을 드러낸다. 봄은 분명 회춘의 계절이지만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시인에게 있어 오감을 통하여 느끼는 봄의 생명력이야말로 영혼을 괴롭히는 징후임을 드러낸다.




계절의 순환 속에 다시 돌아오는 봄은 생리적 순환, 혹은 정신적 순환 속에도 어김없이 순회를 계속한다. 이와같은 사계의 순환을 본능적으로 받아들이는 행위가 사랑의 양태라면,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가질 수 있을 만큼 인생이 봄을 누릴 때는 진심으로 열망하던 사랑이 하나도 없다는 이율배반성이 성립한다. 절대로 가질 수 없는 것들이 생긴 지금, 그 어느 때 보다도 가장 강렬하게 오직 그것만을 원하게 되는 사랑의 속성은 사랑의 유한성을 쇠락하는 시간 너머의 무한성으로 지속시키려는 열망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사랑의 유한성을 시간의 영원한 순회 속에 붙잡아 매두려는 지속의 욕망이야말로 개인의 비극을 넘어서 무소불이(無所不二)의 세계가 지닌 또 다른 비극이라 할 것이다. 인간 본연의 원죄의식과 닿아있는 이 비극이야말로 육체적으로는 자유롭지만 심리적 창살 안에 사랑을 가두는 원인일 것이다. 이와같은 심정적 국면은 시인에게 있어 죄의식에 사로잡혀 부자유한 봄을 누릴 수 밖에 없는 페이소스를 보여준다. ‘불륜’의 의미는 노 시인의 심리적 현실을 조망하는 국면이다. 이러한 내적 국면에 처한 사랑은 주체가 되는 자아에게 환희 보다는 절망을 안겨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욕망은 준동하는 것이며 욕망의 주체적 자아는 결코 죄의식을 지울 수 없다는 메세지를 「불륜시편 2—회춘(回春)」를 통해서 재확인한 셈이다.



육욕을 정직하게 드러내는 시인의 원초적 세계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그려내는 미적 공간이다. '부도덕한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것으로부터 초연한 세계를 이처럼 완미'하게 그려낼 수 있는 것은 위 시에서 보 듯, 이루어질 수 없는 불가능성의 가능성 때문이다. 어떠한 형태의 사랑이든 현실에서는 영원히 불가능하다는 시인의 애정관이 불륜이라는 역설적 화두 속에 숨어있다. ‘봄이 내습하여 죄가 되어버린’ 시인의 봄을 읽는 동안, ‘유리병 속의 학을 꺼내는 것은 시인 자신’이다. 라는 시인의 말을 생각해본다. 쉽게 회자되지 않는 사랑의 부정적 이미지를 통하여 영혼의 품격을 승화시키는 고졸하고 진솔한 삶이야말로 진신사리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강영은



■ 문학과 창작 2010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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