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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의 항아리

판포

by 너머의 새 2015. 10. 22.

판포/강영은

 

 

  한낮인데도 뱀 눈깔이 돋았다. 작대기를 든 손목에는 들고

양이가 울었다. 갈매기가 물똥을 갈기고 가는 집에는 폐허가

담쟁이를 키웠다.

 

  진위를 알 수 없는 이웃이 있었다 하나 늦게 차린 밥상이 식

어갔다. 등 뒤에는 바람과 햇살보다 더 빨리 싹을 틔우는 고요

가 있었다.

 

 ​ 일주도로를 달려온 유채꽃무더기가 700번 버스에 올라타

곤 했다. 이국에서 밀려 온 수평선이 버스를 따라 달렸다.

 

  저녁마다 수평선이 객혈을 했다. 헤어진 애인에게 보내는 연

서처럼 한 발짝 먼저 도착한 별빛이 눈시울을 붉혔다.

 

 ​ 집채만 한 고요가 파도소리를 내려놓으면 사내들이 어둠

을 뒤집었다. 칸델라 불빛이 흔들릴 때마다 미늘에 걸린 고

요가 반짝였다.

 

 ​ 오름의 허리께에서 보면 흰 갈기 날리는 서쪽 포구가 바람

코지였지만 사람들은 누구나 바람의 옷을 입고 파도를 건넜

다.

 

 ​ 바람이 벗어 놓은 마당은 표백제처럼 희었다. 쑥부쟁이가

고개 드는 마당구석에선 검은 잠수복이 물때를 기다리며 늙

어갔다.

 

 ​ 별빛이 샘물을 들이붓는 새벽녘에는 해류를 타고 온 오대양

이 드무에 든 것처럼 고즈넉했다. 어느 쪽으로 고개 돌려도 긴

문장이 뒤따라 왔다.

 

 

*판포/ 제주도 한경면에 있는 마을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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