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계산기/강영은
책상 위 한 쪽 구석에
낡은 주머니 속을 계산해오던 그가 있다
내장을 드러내놓고 숫자 판은 으깨어져
아무리 눌러도 더 이상
아무 것도 셈할 수 없는 그는 한 때
그에게 의탁했던 지폐나
동전의 생을 헤아리는 막강한 힘을 갖고 있었다
영수증으로 증명되어지는
그의 정직성과 정확성에 감복하여
10년을 그에게 매달렸던 적이 있다
수치와 욕망이 뒤엉킨 세상의 배후에서
오차 없는 미래를 기다리던
나는 또 다른 계산기였던 것일까
주먹구구식의 속도를 내려놓는 손가락 하나만으로
이제 더는 더하거나 곱해줄 삶이 없다는 듯
한 때는 몸밖의 욕망들을 끌어 들여
끊임없이 환산해주던 회로들은
까맣게 때에 절어 불꽃조차 일지 않는다
누르면 솟아올랐던 스프링의 꼬인 창자는
빼거나 나누어야 할 시간의 더께로 녹슬어 있다
아직도 누군가의 주머니를 헤아리고 싶은지
바람이 불 때마다 덜컹거리는
그 부서진 침묵의 깊이를 알 수가 없다
부서진 침묵의 깊이/해설/ 정공량(시인)
속도와 계산은 현대인을 더욱 욕망의 늪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존재가 아닌가 싶다. 부서지는 영혼을 붙들고 그 안타까움의 지경을, 오늘을 사는 인간의 행태를 꼬집고 있다. 한때는 몸 밖의 욕망들을 끌어들려/ 끊임없이 환산해주건 회로'로 치부되는 인간의 하염없는 무방비에 관하여 그 참담함을 파헤치고 있다. 또한 '나는 또 다른 계산기였던 것일까.로 인간의 나약함을 전제로 하고 있다. 물질 앞에 계산기가 된 우리들, 그 철없는 인간을 타이르고 영혼을 매만져줄 '부서진 침묵의 깊이'를 시인은 찾고 있고 우리가 다시 찾아야 될 명제가 아닐까 싶다.
-2005, 시선 가을호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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